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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구리 동구릉 유네스코문화유산 건원릉

by 구석구석 2022.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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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시 동구릉로 197 / 동구릉 031-563-2909

동구릉(東九陵)은 도성 ‘동쪽에 있는 아홉 기의 능’이라는 뜻이다. 조선 최대의 왕릉군이다. 1408년 태조를 시작으로 1904년 헌종의 계비 효정황후가 묻히기까지 약 500년에 걸쳐 조성된 9기의 능이 모여있다. ‘동구릉’이란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종 때(고종 34년 1월 3일, 이하 월일은 음력으로 표기)고 이전의 선조·현종·정조·순조실록에는 지금의 동구릉 지역을 뜻하는 ‘동도(東道)’라는 지명으로 불렸던 기록이 보인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가 죽자 그를 당시 양주 남쪽에 있는 검암산에 장사 지내고 능 이름을 건원릉(健元陵)이라 했다. 이것이 동구릉의 출발점이 됐다. 

동쪽의 9개릉이 있어 동구릉이라 하며 가장 많은 릉이 모여 있는 곳으로 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숭릉순으로 둘러 보면 좋다.

동구릉관리소

서울 동북쪽의 동구릉(東九陵)과 홍유릉, 서쪽 고개 너머 서오릉(西五陵) 등 수도권 일원에는 조선왕조 오백년이 잠들어 있다. 그중에도 조선왕조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후비가 잠들어 있는 곳이 동구릉이다.

여기를 동구릉이라 부른 것은 1849년 헌종의 경릉이 아홉번째로 들어서면서부터이고, 그전에는 능이 늘어나는 대로 동오릉(東五陵)·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렸다

9릉은 조선 제1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힌 현릉(顯陵),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가 묻힌 목릉(穆陵),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崇陵), 제20대 경종비 단의왕후가 묻힌 혜릉(惠陵),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元陵),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경릉(景陵), 추존된 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綏陵)이다.

동구릉 초입에 있는 재실로 능괄리인이나 재관들이 머무는 곳이다.

 

수릉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보통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각각 2좌씩 놓았으나 조선 후기부터 조성된 합장릉은 혼유석을 1좌로 줄여서 조성하였다.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으로 조각하였다.

보존을 위해 묘구역으로는 못올라간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형태로 왕이 오른쪽, 왕비가 왼쪽에 모셔지는 것이 원칙이나 수릉은 왕이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모셔져있다. 이는 세상을 떠날 때의 신분차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존황제 문조는 순조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아들로 1809년(순조 9)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27년(순조 27)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왕세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1830년(순조 30)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명세자(孝明世子)라 하였다. 이 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대왕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신정익황후 조씨는 본관이 풍양인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씨의 딸로 1808년(순조 8)에 두포 쌍호정 사저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827년에 헌종을 낳았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왕세자빈은 불행히도 1830년에 남편 효명세자를 잃었다. 이후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철종 8)에 순조의 왕비 순원숙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종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고종)을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에 올렸으며,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실시하여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했다. 수렴청정 기간에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등의 개혁을 실시하였고,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현릉(顯陵) - 문종과 현덕왕후 이야기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1418년(태종 18) 6월(음) 태종은 맏아들이자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운다. 이어 8월에는 살아생전에 왕위를 넘기니 그가 곧 세종이다(태종은 양위 4년 후 죽는다). 아버지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태어난 문종은 1421년(세종 3) 여덟 살 때 세자로 책봉됐다. 문종은 세자 시절, 세 명의 세자빈을 맞이했다. 후궁이 아니라 정실 빈을 맞아들이는 혼인을 세 번이나 했으니 당시로서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첫 번째 세자빈 휘빈(徽嬪) 김씨는 세자가 자신보다 효동과 덕금이라는 궁녀를 더 좋아하자 당연히 이를 시기했다. 그녀는 세자의 마음을 돌리려고 압승술이라는 민간의 주술을 쓴다. 하나는 두 궁녀의 신발을 태워 가루를 내 세자의 술에 타 마시게 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교미하는 뱀의 정액을 묻힌 수건을 자신이 차고 다니는 거였다. 이런 사실이 발각돼 휘빈 김씨는 2년여 만에 쫓겨났다.

몇 달 후 두 번째로 맞은 세자빈 순빈(純嬪) 봉씨도 문제가 많았다. 그녀 역시 시기 질투가 심해 승휘(세자의 후궁) 권씨가 임신하자 분개해 궁인들이 다 듣도록 통곡한다. 또 자신도 ‘임신했다’, ‘낙태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궁궐 물건이나 음식을 친정으로 빼돌리기도 했다. 술주정으로 구설수에 올랐고, 마침내는 소쌍(召雙)이란 여종과 동성애에 빠진 문란한 생활상이 드러났다. 결국 7년 만에 세자빈의 자리에서 내쳐지고 말았다.

현덕왕후 권씨는 화산부원군 권전(權專)의 딸로 원래는 세자의 후궁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다 1436년 순빈 봉씨가 폐출되자 두 달 후 세 번째 세자빈이 됐다. 그러나 그녀는 세자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441년(세종 23) 원손(훗날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꽃다운 나이 스물 넷이었다.

 

개국 이래 최초로 맏아들이 왕위에 오르다

문종은 30년 가까운 세자 생활 끝에 1450년 왕위에 오른다. 그는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장남이 왕위에 오른 기록을 남긴다. 증조부 태조부터 그 뒤를 이은 정종과 조부 태종도, 부왕 세종도 하나같이 맏이가 아니었다. 이 기록은 그가 죽은 후 아들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아우 수양대군이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장남의 왕위 계승은 중단된다.

문종은 이미 세자 시절부터 상당 기간 아버지 세종을 보필해 정사를 맡은 경험이 있었다. 세종은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 나빠지면서 1442년 세자에게 정무를 넘기기 시작했다. 건강이 악화되자 1445년에는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이 그랬던 것처럼 양위를 결심하지만 대신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자로 하여금 섭정을 하게 한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8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자에게 왕위 실습을 시킨 셈이다.

현릉 / 문화재청

문종은 1450년 즉위 2년 3개월 만에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길 새도 없이 세상을 떠난다. 조선의 왕 중 인종(8개월), 예종(1년 2개월), 정종(2년 2개월)에 이어 재위 기간이 네 번째로 짧다. 사후 그의 묘호(廟號)는 문종(文宗), 시호는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으로 정해졌다. 명황제로부터 받은 '공순(恭順)'이란 시호가 더해진다. 1452년 9월 태조의 건원릉 동남쪽 현릉에 안장됐다.

현릉의 홍살문을 지나 ‘ㄱ’자로 꺾인 향·어로를 따라 걸으면 정자각 앞에 이른다. 정자각 뒤로, 좌우 양편으로 나뉜 두 언덕에 각각 능의 봉분이 보인다. 왼쪽이 문종, 오른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이처럼 같은 산등성이의 서로 다른 언덕에 자리 잡은 능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한다. 왕과 왕비를 합장하는 게 보통이지만, 현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따로 썼다. 여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단종을 낳자마자 죽은 세자빈 권씨에게는 현덕빈(顯德嬪)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그녀는 경기 안산군(현 안산시 목내동)에 묻혔다. 9년이 지나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현덕왕후로 추존되는 한편, 묘 또한 소릉(昭陵)으로 승격됐다. 문종은 생전에 아버지 세종의 영릉(당시 영릉은 지금의 헌인릉, 인릉 자리에 있었다) 옆 언덕을 자신의 능지로 정해뒀었다. 그러나 사후에 파보니 물이 나고 바위가 있어 이곳 건원릉 동쪽에 묻히게 됐다.

현덕왕후능침 / 문화재청

72년 만에 이뤄진 소릉과 현릉의 재회

문종 부부는 죽은 지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났으나 함께 묻히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를 바라본다. 이들의 현릉을 뒤로 하고 동구릉 숲길을 산책 중인 어느 부부의 뒷모습이 다정해 보인다

1456년(세조 2)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기도 사건에 연루돼 현덕왕후의 친정어머니와 남동생이 처형당한다. 이듬해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해 영월로 유배하고, 그 어머니 현덕왕후도 추폐(사후 폐위)했다. 앞서 단종이 즉위하면서 아버지 문종과 함께 종묘에 모셨던 어머니의 신주는 종묘에서 철거되고, 소릉은 파헤쳐져 안산 바닷가에 개장됐다. 연려실기술 등에 의하면 세조가 권씨의 능을 파헤쳐 관을 꺼내 바닷가에 버렸는데 어떤 스님이 물 위에 떠 있는 관을 발견하고 다시 묻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 대목은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므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성종 때 권씨의 추복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나 이뤄지지 못했다. 중종 때 다시 제기됐는데 일부 신하들의 반대로 처음엔 성사되지 못했다.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는 변고가 생기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이어져, 결국 추복과 더불어 능의 천장(이장)이 결정된다. 이렇듯 사후에 추존, 추폐, 추복을 거친 현덕왕후의 신주는 1513년(중종 8) 종묘 문종실(文宗室)에 다시 모셔졌다. 또 소릉은 문종의 현릉 곁으로 옮겨지면서 옛 이름이 없어지고, 함께 현릉이 됐다.

건원 

견원릉 / 문화재청
왼편은 향로 오른쪽은 어로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능침에는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는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방울) 등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밖을 향하고 있는 형상으로 수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개씩 서있다. 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보물),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태종대에 세운 신도비(보물)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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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고려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벼슬길에 올랐고,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침입 시 공을 세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다. 우왕 즉위 후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건원릉 봉분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단행되었는데, 이성계는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이 후 정권을 잡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다. 

산등성이 위로 솟은 건원릉의 능침은 멀리서 바라봐도 여느 능과는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봉분을 덮은 사초가 흔히 보는 잔디가 아니라 억새기 때문이다.

후대 인조실록(인조 7년 3월 19일)에는 ‘원래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북도(北道)의 청완(靑薍)을 사초(莎草)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여기서 북도는 태조의 고향 영흥을, 청완은 억새를 말한다. 태조의 유언에 따라 건원릉 봉분에 고향의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가을이면 무성한 억새가 봉분을 뒤덮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연출한다.

 

목릉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상설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상설은 선조의 능과 같다. 특히 의인왕후 능침의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만, 의인왕후의 능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처음 조성한 능이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각미가 다소 떨어지지만,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선조는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에 인달방(현 서울 사직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명종의 아들)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에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인순왕후의 명으로(명종의 양자 입적)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는 본관이 반남인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나,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침착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여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는 본관이 연안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씨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반송방(서울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인목왕후릉

 

휘릉

휘릉 /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단릉 형식으로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장렬왕후 조씨는 본관이 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로 1624년(인조 2)에 직산현(충남 천안) 관아에서 태어났다. 1635년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38년(인조 16)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자의왕대비가 되었으며,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살아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그 후 1688년(숙종 14)에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릉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쌍릉의 형태이며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좌씩 배치되었다.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1694년(숙종 20)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에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정순왕후 김씨는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1745년(영조 21)에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757년 영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에 1759년(영조 35)에 15세의 나이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정순왕후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체통을 지킬 줄 아는 당찬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경릉

 

경릉 정자각의 동계

조선 24대 헌종성황제와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와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이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의 형태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정자각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성황후, 오른쪽이 효정성황후의 능이다.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따로 설치하였다.

헌종은 추존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아들로 1827년(순조 27)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830년(순조 30)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834년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할머니인 순원숙황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헌종 연간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서로 대립하여 두 차례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으며 ,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큰 부담을 안고 살아가던 시기였다. 또 천주교 탄압(기해박해)으로 인해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했다. 친정 후에는 『동문휘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조보감』등을 완성하였으며, 각 도에 제언을 수축하게 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그 후 1849년(헌종 15)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융희 2)에 헌종성황제로 추존되었다.

경릉의 정자각뒤로 능침이 보인다. 국가문화유산포털

효현성황후 김씨는 본관이 안동인 영흥부원군 김조근과 한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1828년(순조 28)에 안국방(현 서울 안국) 외가사저에서 태어났다. 1837년(헌종 3)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헌종 사이에 후사를 낳지 못하였다. 1843년(헌종 9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융희 2)에 효현성황후로 추존되었다.

경릉 능침 / 국가문화유산포털

효정성황후 홍씨(재세 : 1831년 음력 1월 22일 ~ 1904년 양력 1월 2일)는 본관이 남양인 익풍부원군 홍재룡과 연창부부인 안씨의 딸로 1831년(순조 31)에 함열현(현 전북 익산) 관사에서 태어났다. 1843년에 헌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년 뒤에 헌종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헌대비가 되고, 1859년(철종 10)에 왕대비가 되었다. 이 후 왕실의 어른으로 지내다가 1897년(광무 1)에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최초의 태후가 되었다.

 

혜릉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조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에 능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 석물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명릉(明陵)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 작게 조각하였다.
장명등은 현재 망실되어 터만 남아있고,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단의왕후 심씨는 본관이 청송인 청은부원군 심호와 영원부부인 박씨의 딸로 1686년(숙종 12)에 회현동(현 서울 회현동) 우사에서 태어났다. 

경종은 세자시절 두 번째 세자빈으로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 왕비로 책봉된 선의왕후와 함께 의릉(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잠들어 있다. 그의 첫 번째 세자빈으로 훗날 경종에 의해 왕후로 추봉된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심씨(沈氏)의 능은 이곳 동구릉에 있다. 국가문화유산포털

 

숭릉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능침 아래에 있는 정자각은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며, 보물로 지정되었다.

숭릉 정자각 보수준공 고유제 / 문화재청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아들로 1641년(인조 19)에 청나라 심양 관사에서 태어난 조선 역대 임금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1645년(인조 23)에 인조의 세자인 소현세자가 급서하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원손이 되었고, 1648년(인조 26)에 왕세손이 되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된 후 1659년에 왕위에 올랐다.

 

명성왕후 김씨는 본관이 청풍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송씨의 딸로 1634년(인조 12)에 장통방(현 서울 종로2가 관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현종 사이에 1남(숙종) 3녀(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1683년(숙종 9)에 창덕궁 저승전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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