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둘레길 2코스는 동구릉을 둘러싸고 있는 구릉산과 갈매천을 따라 갈매지구를 둘러볼 수 있는 7.8㎞ 길이의 코스로 약 3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코스를 따라 걸으면 갈매도당굿전수관을 만날 수 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5호인 ‘갈매동도당굿’은 ‘갈매동 산치성 도당굿’으로 500~600여년 전부터 갈매동 일대 7개 마을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도당굿은 짝수 해의 삼월 초하루부터 삼짇날에, 마을 산신과 도당신에게 제(祭)를 올리고 굿을 하며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무탈함과 복을 기원하는 의례다.
또한 동구릉은 전체 능역이 59만여 평에 달해 그 광활한 대지와 숲만도 장관이다. 숲이 울창해 삼림욕을 즐기기에 그만이고, 학생들 소풍 장소로, 역사 공부의 현장으로도 제격이다.
동구릉 깊은 곳 팔작지붕 굽어보는 숭릉(崇陵)의 현종 부부
제18대 임금 현종(顯宗 1641~1674, 재위 1659~1674)은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어머니 풍안부부인 장씨(훗날 인선왕후)가 그곳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때였다. 병자호란 끝에 인질로 끌려간 적국에서 태어났으니 비록 의도적인 원정출산은 아니지만,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을 갖게 됐다.
그의 아버지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 있다가 1645년(인조 23) 청에서 풀려났다. 그런데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세자에게는 아들(원손)이 있었으나, 인조는 원손을 제치고 차남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이에 따라 그(현종)는 자연스럽게 원손이 됐다. 4년 후에는 왕세손에 책봉됐다. 왕세손 책봉은 1448년(세종 30) 단종의 왕세손 책봉 이후 200여 년만의 일이었다. 같은 해 5월 할아버지 인조가 죽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왕세자로 책봉됐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훗날 명성왕후)과 혼인했다.
그 후 1659년(효종 10) 아버지 효종의 뒤를 이어 19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현종은 세손·세자·왕의 단계를 모두 거쳐 왕위에 올랐다. 흔치 않은 이력을 지닌 임금이다.
현종은 재위 15년간의 대부분을 예론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지냈다. 상복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두 차례의 예송(禮訟)이 일어났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가 죽자 그의 아들(원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손을 제치고 차남인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돼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 예송의 발단이었다. 국왕의 정통성과도 관련된 문제인 만큼 정쟁의 명분이 됐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서인과 남인 간의 격렬한 당쟁거리가 됐다.
첫 번째 예송(기해예송)은 1659년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장렬왕후(자의대비)가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 할 것인지를 두고 일어났다. 당시의 지배적 이념이던 성리학의 주자가례를 보자.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인 경우는 3년간, 차남 이하의 경우에는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했다.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들은 봉림대군(효종)이 인조에 이어 왕위를 계승했지만 차남이었으므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윤휴, 허목 등 남인들은 왕위를 계승했으니 장자나 다름없으므로 3년복이 옳다고 맞섰다. 양 세력 간 격렬한 논쟁 끝에 현종이 1년복을 택하면서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두 번째 예송(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 효종비이자 현종의 모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일어났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첫째 며느리의 경우는 1년, 둘째 며느리는 9개월간 장례의 예를 치르도록 돼 있었다. 따라서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하는 경우 시어머니인 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을 차남으로 볼 경우는 9개월복이 돼야 한다. 9개월복을 주장한 서인과, 1년복을 주장한 남인 간 치열한 대립에서 이번에는 현종이 남인 손을 들어줬다. 이로써 서인 정권은 축출되고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현종은 재위 중 종기를 자주 앓았다. 머리, 발등, 넓적다리, 목 등 여기저기에 종기가 나서 뜸을 뜨거나 침을 맞았다는 기록이 끊이질 않는다. 이렇게 종기로 고생했던 그는 재위 15년이 되던 1674년(현종 15) 8월 신하들을 인견하려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위중해졌다. 며칠 후 혼수상태에 빠진 현종은 34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같은 해 2월 어머니 인선왕후가 앞서 사망한 지 불과 반년 만이었다.
사후 그의 묘호는 현종(顯宗)으로, 능호는 숭릉(崇陵)으로 정해졌다. 숭릉 묏자리는 현 동구릉 내 건원릉 안쪽 혈로 결정됐고, 현종은 그해 12월 13일(음) 거기에 잠들었다.
현종은 조선 임금 중 경종, 순종황제와 더불어, 정실 왕비 외에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은 왕이다. 그는 명성왕후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뒀다. 위로 두 공주는 출가 전에 사망했고, 왕세자(훗날 숙종)와 막내 명안공주만이 장성해 혼인했다. 명안공주는 1687년(숙종 13) 20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현종의 유일한 왕비였던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는 후대에 고종황제의 왕비였던 명성황후(明成皇后)와 한글로 ‘명성’이란 시호가 같아 혼동하기 쉽다. 현종비 명성왕후는 김씨(金氏)고, 고종비 명성황후는 민씨(閔氏)다.
명성왕후는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여성의 겸덕을 중시하던 조선의 왕비상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인조의 셋째 아들로 시아버지 효종의 동생이자 남편 현종의 숙부였던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등 이른바 삼복(三福)이 어린 숙종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 이들을 싫어했다. 그러던 중 남편 현종이 죽고 15살 된 아들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된 후인 1675년(숙종 1) 대형 사고를 친다.
그녀는 자신이 수렴청정하던 중이 아닌데도, 임금에게 얘기도 없이 한밤중에 대신들을 불러들인다. 다름 아닌, 삼복 형제들을 처벌하는 일로 임금과 대신들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친정아버지 김우명을 사주해 삼복 중 복창군과 복평군 형제가 궁녀들과 간통했다고 모함해 이들을 제거하려 했다. 궁녀가 등장하는 사건, 바로 ‘홍수(紅袖)의 변’이다.
이 사건은 당쟁으로 번졌다. 삼복 형제와 가까웠던 남인들은 이들을 구명하고자 김우명과 대비를 비판하고, 서인들은 남인들을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숙종은 대비의 성화에 못 이겨 복창군 형제와 궁녀들을 처벌했으나 사형 대신 유배로 감형한다. 몇 달 후 형제는 석방되며 귀양갔던 궁녀 상업과 귀례도 2년여 만에 풀려난다.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복창군과 복선군은 역모죄로 결국 처형된다. 숙종은 막내 복평군만은 목숨을 살려 유배했다가 훗날 풀어주고 관작을 돌려준다.
명성왕후는 왕비 때부터 병치레가 잦았다. 온천 요양을 위해 남편 현종, 시어머니 인선대비 등과 함께 온양행궁에 가기도 했는데, 이는 숙종 때까지도 이어진다. 그녀는 1683년(숙종 9) 아들 숙종의 두질(천연두) 치료를 위해 ‘매일 차가운 샘물로 목욕하고 치성드리라’는 무당의 말을 듣고 따르다 자신도 병을 얻어 앓다가 병세가 위중해져 세상을 뜬다. 죽은 후 대비에게는 명성(明聖)이라는 시호가 올려졌고, 이듬해 4월 5일(음) 남편 현종의 숭릉에 나란히 묻힌다.
숭릉의 보물, 팔작지붕 정자각
숭릉은 하나의 곡장(담장) 안에 두 개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이다. 각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두 봉분이 난간석으로 연결돼 있다. 숭릉의 석물은 현 동구릉 내 영조의 능(元陵) 자리에 있었던 현종의 부왕 효종의 능(寧陵)을 여주로 옮기면서 옛 능자리에 묻어 뒀던 석물을 사용했다. 요즘 말로 석물 재활용인 셈이다.
숙종은 공사가 커지면 백성들이 힘들 것을 염려해 공사 기간 임시로 현종의 재궁(시신)을 모시는 영악전을 따로 짓지 말고 정자각에 임시 안치하도록 명했다. 그런데 조감이란 이가 상소를 올려 석물을 재활용하는 것과 영악전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먹다 남은 음식으로 아들 제사를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구릉 가장 깊숙한 곳에 보물처럼 숨어있는 숭릉에는 진짜 보물이 있다. 숭릉의 정자각은 익랑(날개처럼 붙인 회랑)이 있고, 지붕도 여타 능에서 보는 맞배지붕이 아닌 팔작지붕으로 매우 아름답다.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숭릉의 팔작지붕 정자각은 보물 제1742호로 지정돼 있다.
숭릉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성리학의 우주관을 나타내는 연못(蓮池)이 있다. 원형 섬을 가운데 둔 사각형 연지 근처는 백로와 왜가리의 서식지기도 하다. 숭릉의 보물을 지키려는 듯 공중에서 낯선 방문객을 살피는 백로들, 멀리 건너편 물가를 무심히 서성대는 왜가리 한 마리를 뒤로 하고 영조의 원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한국아파트신문 유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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