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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여주 조선왕릉 영릉 세종대왕릉 효종대왕릉 녕릉

by 구석구석 2022.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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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는 제4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英陵), 그리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이 있다. 둘 다 우리말 표기가 같아, 여주에 두 기의 영릉이 있다고 하면 무슨 소린가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 조선왕릉이 한양 인근에 조성된 데 비해 두 능이 멀리 여주에 자리를 잡게 된 데는 풍수와 관련된 사연이 있다. 성리학 이념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풍수지리를 미신이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막상 자신의 조상 묏자리는 명당에 잡으려는 욕심을 떨쳐버리진 못했다. 왕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산릉 후보지를 찾는데 풍수학자 내지는 지관이 동행했다. 능을 조성했던 곳의 묏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왕릉을 옮기는 일도 적지 않았다. 바로 여주 영녕릉이 대표적인 예다.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50  사적 제195호(1970.5.26) 세종대왕릉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

왕릉은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능의 하나로서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두 개의 혼유석이 있고 봉분 둘레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12개의 석주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능의 정중앙에 팔각의 장명등이 있으며 주위에 석호 석양 석마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을 배치했고 능뒤에는 나즈막한 곡담을 둘렀다. 능밑에는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과 제사때 음식을 준비하던 수라간, 능을 지키는 관리가 살던 수복방이 있고 정자각 동편에 능비와 비을 세웠다.

조선의 임금 중 세종대왕(1397~1450, 재위 1418~1450)만큼 잘 알려진 이는 없는 데다 지면도 부족하니, 그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해도 될 것 같다.

세종 곁에 잠든 소헌왕후(1395~1446)는 청송 심씨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이다. 그녀는 열네 살 되던 1408년(태종 8) 두 살 아래인 충녕군(忠寧君, 훗날 세종)과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敬淑翁主)로, 다시 9년 후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해졌다. 1418년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경빈(敬嬪)에 봉해졌고, 같은 해 세종이 즉위한 후 왕비로 책봉돼 공비(恭妃)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훗날 중궁(中宮·왕비의 높임말)을 미칭(美稱)으로 부르는 것은 법도에 없는 일이라 해 1432년(세종 14) 왕비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녀가 죽은 후 예조판서 정인지가 지어 바친 지문(誌文)은 이렇게 쓰여 있다. ‘인자하고 검소하며, 정숙하면서도 다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왕후가 나아오고 물러갈 때 전하께서 반드시 일어서시니, 그 공경하고 예로 대하심이 이와 같았다.’ 왕비가 대전을 드나들 때 임금이 일어나서 맞이하고 배웅했다는 말이다. 그녀에 대한 세종의 존중과 배려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런 그녀였지만, 세종 즉위 초 왕비 자리에서 쫓겨날 위기를 겪었다.


1418년 6월(음) 태종은 세자 양녕을 폐하고 셋째 아들 충녕을 세자로 세웠고 8월에는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군권은 세종에게 넘겨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신이 정안군(靖安君) 시절부터 가신으로 데리고 있었고, 임금이 된 후 내금위장을 거쳐 병조참판까지 올려준 강상인이 상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상왕은 강상인이 군사에 관한 일을 자신을 제치고 세종에게만 아뢰는 한편, 임금을 속여 자기 아우에게 벼슬을 내리게 했다는 이유로 그를 하옥한다. 그의 상관인 병조판서 박습을 비롯해 병조의 관리들도 줄줄이 투옥된다. 그러나 강상인과 박습은 개국에 공을 세운 원종공신임이 참작돼 죄를 용서받는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부원군에 봉해진 세종의 장인 심온은 강상인의 옥사가 시작된 직후 영의정에 임명된다. 며칠 후 그는 사신이 돼 명나라로 파견된다. 양녕 대신 충녕의 세자 책봉을 추인한 명(明) 황제에게 사례하고 태종이 전위한 사실을 아뢰기 위한 것이었다. 심온이 명으로 떠난 다음 날 강상인과 박습은 원종공신의 녹권과 직첩을 몰수당한다. 이어 형조와 대간의 합동 상소로 강상인은 지방 관아의 관노가 되고 박습 등은 귀양 보내진다.

심온이 명나라로 가던 날 상왕과 임금, 그리고 왕비는 각각 환관들을 보내 그를 전송하게 했다. 실록은 ‘임금의 장인으로 쉰 살도 안 돼 수상(首相)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해 이날 전송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될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 같은 말을 전해 들은 상왕의 심기가 편했을 리 없다. 이씨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걸림돌이 될 것으로 여겨 자신의 처남 넷을 모두 자진해 죽게 했을 정도로 외척을 경계했던 그였으니 말이다.

장자각

심온이 명나라에 가 있는 동안 상왕은 다 끝난 이 사건을 다시 들춰낸다. 오늘날로 보자면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무시한 셈이다. 강상인 등이 군권을 임금이 아닌 상왕이 갖고 있는 데 대해 불평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로 인해 강상인, 박습 등은 다시 의금부로 잡혀온다.

상왕의 지시로 압슬형을 네 차례나 당하는 등 모진 고문 끝에 강상인은 심정(심온의 동생) 등이 연루됐다고 자백한다. 다시 고문을 당한 강상인, 심정 등은 마침내 “심온이 ‘군사는 마땅히 한곳에서 명령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는 거짓 자백을 하기에 이른다. 상왕이 기다렸던 말이었다. 역적으로 몰린 심정과 박습에 참수형이 내려졌으나 박습은 이미 옥사한 뒤였고, 강상인은 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에 처해진다.

명나라에서 귀국하던 심온은 의주에서 체포됐고 의금부로 압송돼 신문을 받는다. 그는 강상인 등과의 대질을 요구했다가 그들이 이미 처형됐음을 알게 된다. 모진 매질과 압슬 고문 끝에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하고 죄를 인정한다. 그는 수원으로 이송돼 사약을 받고 죽는다.

이 사건은 외척 심온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태종, 그리고 심온 때문에 영의정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고 생각한 좌의정 박은에 의한 무고였다. 태종이 죽은 후에도 세종은 부왕이 처결한 일이라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문종이 즉위하자 죽은 심온에게는 영의정부사의 관작 복구와 함께 안효공(安孝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영릉재실

사실상 태종이 기획한 강상인의 옥사로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과 숙부 심정이 죽고 어머니 안씨와 자매들이 천민으로 전락했다. 그의 친정인 심씨 일가는 멸문 지경에 이르렀다.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정인 민씨 일가가 당했던 것과 닮은꼴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심온이 비록 중죄를 지었으나, 공비(恭妃)가 이미 주상의 배필이 돼 아들을 많이 둔 경사(慶事)가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에 비할 수 있으랴”라면서 왕비를 폐해야 한다는 논의를 덮었다. 

그의 말대로 당시 소헌왕후는 이미 세 명의 왕자와 정소, 정의 두 공주를 낳은 후였다. 세 왕자가 훗날의 문종, 세조와 안평대군이다. 소헌왕후는 이후에도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대군을 더 낳았으니 모두 8남 2녀다. 이 중 정소공주와 광평, 평원대군은 요절했다.

세종대왕은 소헌왕후 외에 열 명의 후궁을 뒀다. 소생이 없었던 다섯 후궁을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후궁에게서 열 왕자와 두 공주를 더 낳았다. 세종은 모두 18남 4녀를 뒀다.

1446년(세종 28) 52세로 왕비가 죽자 세종은 그녀에게 소헌(昭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당시 경기 광주(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 태종의 능인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쌍실의 능을 조성해 장사지냈다. 이때 오른쪽에 훗날 자신이 묻힐 석실을 만들어 뒀다. 능호는 ‘영릉(英陵)’이라 했다. 영릉은 하나의 봉분 아래 석실 두 개를 붙여 왕과 왕비를 함께 안치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었다.

영릉을 당초 헌릉 옆에 조성한 것은 ‘아버지 태종 가까이에 묻으라’는 세종의 유지를 따른 것이었다. 세종은 죽기 몇 해 전 헌릉 근처에 왕비와 자신이 죽으면 묻힐 묏자리를 미리 살펴보게 했었다. 그런데 태종의 사위이자 풍수학제조였던 성원군 이정녕을 수행한 최양선이 풍수설을 내세워 그곳이 ‘손이 끊기고 맏아들을 잃는(絶嗣損長子) 자리’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의정부와 예조에서는 불순한 주장이라며 그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풍수의 해석이 맞았던 것인지, 이후에 여러 일이 벌어졌다. 세종이 영릉에 묻힌 후 맏아들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죽었다. 또 문종의 외아들 단종, 그리고 안평·금성대군 형제가 세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거기에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도 스무 살에 요절하고, 차남 예종의 맏아들 인성대군도 겨우 세 살에 죽는 등 흉사가 잇따랐다.

세조 때 ‘영릉의 묏자리가 좋지 않은 탓이니 능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서거정 등의 반대로 천장은 이뤄지지 못했다. 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천장을 추진해 1469년(예종 1) 영릉을 현재의 여주로 위치를 옮겼다. 예종은 불행히도 즉위 14개월 만에 스무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지금의 영릉 자리에는 원래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 때 공을 세운 두 사람의 묘가 있었다. 하나는 목은 이색의 손자로, 세종 때 등과해 집현전 직제학, 도승지를 지낸 한산(韓山) 이씨 문열공 이계전의 묘였다. 그는 정난공신이 돼 세조 때는 호조·병조·이조판서 등을 거쳤다. 다른 하나는 태종 때 급제하여 세종 때 대사헌을 지내고, 정난공신으로 세조대에 우의정까지 올랐던 광주(廣州) 이씨 충희공 이인손의 묘였다.

세종대왕릉

영릉을 옮겨올 명당자리를 찾는 일은 당대 최고의 지관 안효례에게 맡겨졌다. 그가 세종의 새 묏자리로 지목한 곳은 이계전의 묘였다. 바로 아래에 있어 능역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이인손의 묘도 이장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 두 가문은 명당으로 알려진 조상의 묏자리를 내주고 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명당을 빼앗긴 후손의 입장에선 억울할 만하다.

세종의 영릉을 옮기면서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란 말도 생겼다. 풍수를 따른 영릉의 묏자리 기운 덕분에 조선왕조의 국운이 백 년 더해졌다는 의미다. 반면 세종에게 묏자리를 내어준 광주 이씨 가문은 연산군 초 영의정으로 섭정승을 맡기도 했던 이극배(이인손의 장남)를 끝으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동생 이극균이 연산군의 황음에 쓴소리를 하다가 조카 이세좌와 함께 처형되는 등 무오·갑자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며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훗날 이 집안을 다시 일으킨 한음 이덕형은 이장 후 92년 만인 1561년 태어났다. 백 년이 지나서야 되살아났으니 세종의 영릉 천장이 이 집안에는 거꾸로 감백년(減百年)이었던 셈이다.

영릉은 가까이서 봉분을 내려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능 중 하나다. 능침 뒤쪽으로 우회해 올라가는 탐방로 덕분이다. 다른 능들도 최소한 이런 정도로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을 언제까지 보존에만 치중해야 할 것인가. 왕릉이 시간을 뛰어넘어 죽은 이와 산 이가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 일반 관람객이 멀리서 봉분 꼭대기만 바라보게 하는 것은 현대의 유산관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쉬움을 품은 채 또 하나의 영릉,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으로 걸음을 옮긴다.

/ 한국아파트신문 2022 유병갑

 

○ 관리 : 세종대왕 유적관리소 031-885-3123∼4
○ 이용안내 : 동절기(11월 ~ 2월) 09:00 ~ 17:00/하절기(3월 ~ 10월) 09:00 ~ 18:00/월요일 휴무
○ 주차시설 : 12,000㎡ (승용차 700대 주차)

왕대리 산83-1 효종대왕릉

조선 제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왕비 인선황후 장씨가 모셔진 쌍릉이다.

 
효종릉 역시 푸른 소나무들이 능역 주변에 울창하여 그윽함을 풍기지만 세종릉에 비해 찾는 이가 적어 사방이 조용하고 호젓하다. 능을 감싸며 유장하게 흘러내려온 묘내수는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를 빠져나와 참도를 가로질러 흐르고, 참도 가운데에 금천교가 놓인 것이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이채롭고 절묘하다.

재실

정자각 뒤 봉분은 오른쪽이 왕비릉이고 왼쪽이 효종릉이다. 왕비릉엔 둘러쳐진 곡장이 없고 왕릉에는 곡장이 있다. 십이지신의 병풍석은 세조 이래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되어 쓰여왔던 것이다. 효종대왕릉은 다만 쌍릉이면서 앞뒤로 엇비슷하게 위치를 잡고 있어 지형과 상관없이 애당초 `나란히` 놓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의 석물들은 똑같이 갖춰져 있는데, 배치와 양식은 조선 전기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1937년 (인조 15)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 나아가 청나라 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리며 항복했다.

정자각

삼배구고두란 여진족이 천자를 배알할 때 행하는 의식이었는데 한번 절 할 때 마다 머리를 세 번 땅에 부딪치는 것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머리 부딪는 소리가 크게 나야하는데 청태종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다시 할 것을 계속 요구해 인조는 꽁꽁언 땅바닥에 수십번 머리를 부딪쳤고 이로인해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치욕적인 광경을 목격하고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잡혀있다가 귀국한 뒤 형인 소현세자를 대신해서 왕위에 오른이가 조선 17대 임금 효종이다.

효종대왕(1619~1659)의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였다.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인 인열황후 한씨이며 비는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인 인선황후 장씨이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겸 등을 파직시키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대청 강경파를 중용하는 한편 이완, 유혁연, 원두표 등에게 국비확장을 지시하였다.

효종(위)과 인선왕후 무덤은 같은 언덕에 대각선상 위아래로 배치한 동원상하릉이다. (출처 : 문화재청)

1652년(효종 3)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을 기병화하였으며 사포부대를 조직하고 대국을 정벌할 양마를 기르게 하였다. 이밖에도 군사들이 입는 융복의 소매를 짧고 좁게 줄여 간편하게 하고 군례 또한 국궁대신에 공수, 장궤로 바꾸게 하였다. 군비확충을 위해 군역의 의무가 없던 공경등의 상류층에게서 베 1필, 승려에게서 3석씩을 거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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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대왕은 재위 10년 동안 좋아하던 술도 끊어버리고 심기일전, 복수설치의 의지를 다졌지만 중국의 형세는 명나라의 잔존세력에게 불리하였고 조선에서는 왜란, 호란 등의 전란으로 인한 경제적인 피폐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아 북벌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문인석과 무인석

이런 와중에 군비보다는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하는 신하들과 갈등을 겪던 효종이 1659년 5월 4일 41세를 일기로 돌연 승하하니 북벌의 꿈은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불운했던 시대의 불행했던 왕이다. 한때 북벌의 웅지를 품고 대륙 공략의 기세를 드높이던 중심인물들이 우리 여주에 터를 잡고 있다. 효종을 모신 영릉과 효종대왕을 바라보며 애틋한 모습으로 서있는 대로사의 송시열 초상, 북좌에 앉아 남면하고 있는 임금을 뵈옵듯 영릉의 정남쪽에 있는 이완 대장묘가 그것이다.

자료 - 경기관광공사

 

'효종왕릉 재실' 최초로 보물 지정 보물 제1532호

'영릉(英陵)·녕릉(寧陵)'의 효종대왕릉 입구에 있는 재실의 건물들은 전반적으로 외벌대 장대석기단, 방형초석, 각주, 민도리 홑처마 집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짜임새 있게 건립됐다. 또 안향청, 제기고, 재방, 전사청,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의 시설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유기적으로 적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특히 경내의 재향과 관계있는 향나무와 느티나무,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95호) 등의 고목과도 함께 어울려 있어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대왕(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며, 재실(齋室)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효종대왕릉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의 서쪽에 조성하고, 능호를 익릉(翼陵)이라 하였으며, 그 앞에 재실을 건립하였다. 이후 1763년 석물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능호를 영릉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조선왕릉의 재실들이 대부분 원형이 훼손된 것과는 달리 영릉의 재실은 기본형태가 잘 남아있고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보물로 지정돼 있다. 또 재실 앞 보기 드물게 크고 오래된 회양목은 그 생물학적 역사적 가치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출처 : 한국아파트신문(http://www.hapt.co.kr)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어 원형이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고,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건축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충청일보 장중식기자

-이용안내: 09:00 ~ 16:30(동절기), 09:00 ~ 17:30(하절기) / 매주 월요일 휴무 / 어른 500원, 청소년·군경 300원 (대인 단체(30인 이상) 400원, 소인 단체(10명이상) 200원) / 무료 6세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및 그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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