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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추천 테마여행

9월여행 조선왕릉여행 서오릉 동구릉 홍유릉 융건릉

by 구석구석 2022.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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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서오릉

조선왕릉따라 주인공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500년 조선 역사에는 제1대 태종에서 제26대 고종까지 26명의 왕과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후 고종, 순종 등 2명의 황제가 있다. 고종이 왕과 황제에 중복되므로 모두 27명의 임금이 있었다.

조선왕릉은 임금 숫자보다 많은 42기이다. 왕은 없이 왕비만 따로 묻혀 있거나 살아서는 왕이 아니었지만 죽고 나서 후대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그 왕비의 능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왕이라고 해서 모두 왕릉에 묻힌 것은 아니다. 종묘(宗廟)에 신주를 모시지 않은 왕은 왕릉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제10대 연산군과 제15대 광해군이 이런 경우로 왕릉이 아닌 묘에 잠들어 있다.

조선 왕실의 무덤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능(陵)’,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등이 묻혀 있는 ‘원(園)’, 그리고 대군, 공주, 옹주, 후궁 등이 묻힌 ‘묘(墓)’가 있다. 원과 묘에는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이 묻혀 있기도 하다.

왕족의 무덤은 북한에 있는 2기의 능(제릉과 후릉)을 포함해 능 42기, 원 15기, 묘 64기 등 총 121기에 이르며 전국에 산재해 있다.

서오릉 재실

조선왕릉 구조 비슷비슷, 스토리로 구분해야  

조선왕릉은 일반적으로 비슷한 틀을 갖추고 있다. 물론 묻혀 있는 왕의 업적과 왕릉을 조성한 후대 왕이 누구인지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다. 

능 입구에는 제사 준비와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상주하던 재실이 있고, 이어서 연못과 금천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금천교는 왕의 혼령이 머무는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경계라 할 수 있다. 금천교를 지나면 신성한 장소임을 뜻하는 홍살문이 있다. 여기까지를 능의 진입공간이라 할 수 있다.

홍살문 안으로는 두 길이 있다. 제향 때 향을 들고 가는 길인 향로와 임금이 다니는 어로로 나눠져 있다. 향·어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정자각이 있다. 정(丁)자 형태의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던 곳, 곧 제사를 지내던 장소다.

정자각 뒤편에는 능침(무덤)으로 이어지는 신도(신로)가 있는데, 홍살문에서 여기까지가 제향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왕의 치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진 비각, 제사 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수라간, 제기를 보관하거나 청소 등 능을 관리하던 관노가 지내던 수복방 등도 포함돼 있다.

능침 앞에는 좌우로 망주석이라 불리는 돌기둥이 있다. 그 옆에 문무 신하를 상징하는 문·무석인 석상, 그 뒤로 돌로 만든 말(석마)이 서 있다. 두 문석인 사이에는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장명등이 있고, 봉분 바로 앞에는 혼유석(석상)이라는 넓은 돌이 있다. 혼유석은 음식을 올려놓는 곳이 아니라 영혼이 능침에서 나와 놀거나 쉬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혼유석 뒤의 봉분에는 난간석과 병풍석을 세운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무덤 주변에는 돌로 만든 동물(석양, 석호 등)이 무덤을 지키고 있으며, 능침의 양옆과 뒤를 둘러싸고 곡장이라 부르는 담장이 세워져 있다. 여기까지가 능침공간인데, 비록 규모는 작아도 상징적으로 왕이 살아서 지냈던 궁궐을 옮겨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정형화된 능의 구조 때문에, 보고 난 후에도 이 능 저 능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능의 모습을 달리 기억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능의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 바로 역사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연재할 조선왕릉 이야기에서는 거기에 묻힌 왕이나 왕비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함께 소개해 나갈 계획이다.

 

2009년 국내 소재 40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겼으므로 조상들의 묘를 관리하는 데 정성을 다했다. 여염집의 묘도 그리 관리하는데, 하물며 국가의 왕과 왕비의 능은 얼마나 더 엄격히 관리했겠는가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덕에 42기의 왕릉 중 어느 하나도 파묘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또한 조선왕릉은 우리의 문화유산일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42기의 왕릉 중 북한 개성지역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세계문화유산이다.

왕릉 대부분은 당시의 수도 한양 외곽에 자리를 잡았다. 근거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는 왕릉이 도성 4 대문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 제향을 위한 임금의 참배 행렬이 궁궐을 떠나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조선왕릉은 서울 외곽 동북쪽(현재의 구리, 양주, 남양주)과 서북쪽(고양, 파주, 김포)에 주로 모여 있다. 경기 화성의 융건릉, 여주의 영녕릉, 강원도 영월의 장릉은 예외적으로 서울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

/ 한국아파트신문 유병갑

 

한국관광공사선정 9월 조선왕릉여행

수도권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는 조선왕릉 탐방은 왕릉의 문화역사적 가치나 잘 보존된 자연경관으로 인해 근사한 여정을 꾸리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최근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면서 일반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솔숲 울창한 왕릉을 거닐며 숨겨진 보물찾기, '서오릉-서삼릉'

서오릉 관리사무소(02-359-0090), 서삼릉 관리사무소(031-962-6009)

 

서삼릉의 효릉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동구릉을 비롯한 수도권에 위치한 왕릉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이중에서도 교통체증을 피해 아이들과 호젓이 하루를 쉬고 싶다면 바로 고양시의 서삼릉과 서오릉 당일 나들이 코스를 추천할 법하다. 서오릉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 왕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오릉은 평지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산책하기가 좋고 능 중간에 벤치와 휴식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서오릉과 인접해 있는 서삼릉은 가는 길이 호젓하다. 희릉, 효릉, 예릉의 삼릉이 있다고 해서 서삼릉이라 불린다. 서삼릉 주변 농협대학과 원당종마목장은 서삼릉 이상으로 이름난 쉼터이다. 원당종마목장은 초지 위에 한가로이 뛰노는 말들의 모습 속에 유유자적 나들이를 즐기기에 그만이다. 배다리술박물관, 중남미문화원 등 연계 관광지도 즐비하다.

 

▶조선왕조 500년을 이어온 왕릉전시장, '동구릉'

동구릉 관리사무소(031-563-2909)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40기의 조선왕릉 중에서 가장 많은 9기가 몰려 있는 곳이다. 중국사신이 '하늘이 만든 땅덩어리'라고 칭송할 정도로 명당 중의 명당이다. 조선왕조 500년 능제의 시원이자 기준이 되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은 석물의 조각이 섬세하고 위엄이 넘친다. 영조의 능인 원릉은 왕의 치세답게 규모가 크고, 선조의 능인 목릉은 전쟁을 겪어서인지 투박한 석조물을 보여주고 있다.

 

단릉, 합장릉, 쌍릉 이외에도 산줄기를 달리해 두 분을 모신 동원이강릉, 세 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 등 다양한 형태의 능을 볼 수 있어 가히 '조선왕조 500년의 왕릉전시장'이라 부를 법 하다. 고구려 대장간마을과 아차산유적지, 구리한강시민공원의 코스모스가 주변 볼거리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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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회한과 정조의 원망, 이곳에 함께 묻히다

원릉의 주인공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는 조선의 임금 중 가장 오래 살았다. 우리 나이 83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40대 중반에 불과한 조선 왕들 평균수명의 두 배에 가깝다. 가장 어린 나이 17살에 죽은 단종의 다섯 배다.

그는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왕위에 있었다. 무려 52년이다. 겨우 8개월 재위로 최단 기록을 가진 인종이야 말할 게 없고, 두 번째로 긴 숙종보다 6년을 더했다. 아버지 숙종이 왕위에 오래 있었던 데다 재위 4년이지만 이복형 경종까지 거치면서 영조는 서른한 살 늦깎이로 왕위에 올랐다. 훗날 8살이라는 최연소 기록으로 왕위에 오른 헌종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영조의 치세가 길었던 까닭에 그에 관한 얘기 또한 무궁무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다 소개하기엔 지루하고 지면도 턱없이 부족하다.

동구릉에 있는 원릉의 겨울

영조는 숙종과 후궁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종이 그 유명한 장희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아들(경종)은 그의 이복형이다. 최씨는 숙원, 숙의, 귀인을 거쳐 숙빈에 오르는 동안 아들 셋을 낳았다. 첫째와 셋째는 낳은 지 얼마 안 돼 죽었고, 숙의 때 낳은 둘째 아들이 영조다.

숙종은 최씨가 낳은 아들을 우리 나이 7살에 연잉군(延礽君)으로 봉했다. 숙종실록에는 6살(1699)에 봉해진 걸로 기록돼 있으나 영조실록에는 자신이 연잉군에 봉해진 건 6살이 아니라 7살 때라는 본인의 얘기가 있다. 그의 휘(諱, 임금의 이름)는 금(昑)이고, 호는 양성헌(養性軒)이었다.

연잉군 시절 잠저였던 창의궁 내 양성헌은 그가 사부 이현익으로부터 대학을 배우던 곳으로, 숙종이 그곳 이름을 연잉군에게 호로 내려준 것이다. 실록에는 그가 18살 때 마마(천연두)를 앓았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마마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으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조는 세자가 아닌 세제(世弟)로 책봉돼 왕위를 이은 임금이란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물론 효종처럼 형(소현세자)이 죽어 대신 세자로 책봉돼 왕이 된 예도 있지만 왕세제라는 이름으로 왕의 후계자가 된 건 영조가 유일하다. 이렇게 왕세제라는 특이한 지위는 그의 정통성에 취약점으로 작용해 왕위에 오른 후까지도 두고두고 당쟁거리가 된다.

그의 이복형 경종은 병약하긴 했으나 후사를 포기하기엔 이른 나이였음에도 노론의 압박에 의해 즉위 1년여 만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다. 세제 책봉에 성공한 노론은 한술 더 떠 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한다. 그러나 소론의 반격으로 신축(1721)과 임인(1722) 두 해에 걸친 옥사를 치르면서 노론은 큰 타격을 입고, 연잉군까지도 역모 연루자로 몰릴 위기에 처한다. 경종의 배려로 가까스로 왕세제의 지위를 보존한 그는 1724년(경종 4)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영조는 노론과 소론 간 붕당의 폐해를 불식하고 양 당파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이른바 ‘탕평’을 천명한다. 그러나 앞서 경종조에 신임옥사로 숙청됐다가 영조 즉위 후 복귀한 노론 강경파의 소론 응징을 위한 반격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는 고육지책으로 노론 강경파를 축출하고 온건파로 교체한다. 결국 영조 초반의 탕평은 노론을 중심으로 정국의 안정을 꾀하면서 노론과 소론을 고루 기용하는 방식이었다.

후반에 들어 노론계는 다시 분열된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과 정순왕후의 친정아버지 김한구를 각각 중심으로 한 척신세력의 등장 때문이다. 이들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소론과 남인 등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한다.


이처럼 얽히고설킨 세력다툼 가운데, 1749년 대리청정을 하게 된 세자에 대한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영조와 세자 간에는 틈이 생긴다. 1762년 김한구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허물을 고하며 그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글을 올린다. 영조는 대노해 세자에게 자결하라 명하나, 세자가 이를 따르지 않자 세자를 폐서한 후 뒤주에 가둬 죽인다. 임오화변의 비극이다. 그가 죽은 후에야 후회한 영조는 세자로서 그의 위호를 회복시키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영조는 세손(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이듬해인 1776년(영조 52) 3월 승하한다. 어느 드라마에서는 야사를 인용해 그가 죽기 전 매병(치매)을 앓았던 것으로 설정했으나 정사에서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얘기다. 실록에 기록된 그의 마지막은 가래가 심하고 구토 증세를 보이는 등 병세가 악화한 끝에 숨을 거둔 것으로 돼 있다. 죽은 후 그의 묘호(廟號, 종묘에 모시는 신주의 이름)는 영종(英宗)이었고 당대 실록의 제목도 ‘영종대왕실록’이다. 1889년(고종 29) 영조(英祖)로 고쳤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인 11살 때(1704, 숙종 30) 당시 진사였던 달성 서씨 서종제의 딸을 첫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실록에 따르면 그 혼인은 ‘사치가 법도를 넘어 만금으로 헤아릴 정도’라고 했으니 그야말로 호화결혼식이었던 셈이다. 1721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그녀는 세제빈이 됐으며, 세제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그녀는 조선의 왕비로서는 가장 긴 33년간을 왕비로 있었다.

홍릉에 홀로 남겨진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오릉의 홍릉으로 오른쪽이 비어 있는 정성왕후 능 / 문화재청

자녀가 없었던 그녀는 정빈 이씨가 낳은 영조의 첫아들 효장세자와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를 친아들처럼 아꼈다. 그녀는 1757년(영조 33) 64세로, 시어머니 인원왕후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정성왕후(貞聖王后)는 죽은 후에 올려진 시호다.

원비 정성왕후가 죽자 영조는 아버지 숙종의 명릉(明陵, 현 서오릉 내) 근처에 그녀의 능(홍릉·弘陵)을 조성했다. 그때 자신도 나중에 거기 묻히고자 오른쪽에 묏자리를 비워뒀다. 허우(虛右)라 한다. 그러나 영조가 죽자 손자 정조는 당시 대비였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를 의식해선지 할아버지의 유지와는 달리 현재의 자리에 원릉(元陵)을 조성했다. 이에 따라 정성왕후는 옆자리가 비워진 채 홍릉에 홀로 남게 됐다. 

영조는 정성왕후가 죽은 지 2년 후 1759년(영조 35)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이때 영조 나이 66세, 계비는 15세였다. 문족(文族)으로 재야에 있던 그녀의 친족들은 국혼 이후 조정에 진출했다. 특히 오빠 김귀주는 노론계의 남당으로, 세력을 키워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북당과 맞서기도 했다.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여군(女君)이 되다

그녀는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한 후에는 왕대비로서, 노론 벽파를 비호하며 시파와 대립했다. 그러나 정조는 척신정치 청산을 위해 영조 후반기에 위세를 떨쳤던 척신들을 배척했다. 이때 김귀주 등 대비의 친족들도 조정에서 축출됐다.

1800년 정조가 죽고,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그녀는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한다. 수렴청정 당시 그녀는 자신을 여군(女君, 여자임금)이라 칭하며 국정을 주무른다. 드라마 속의 어린 계비 시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녀의 수렴청정과 함께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조가 추진하던 탕평의 원칙은 깨진다 .

대비와 노론 벽파는 정조의 지지기반이자 자신들의 정적인 시파, 그중에서도 남인 시파에 많았던 천주교인들을 탄압한다. 시파 제거를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천주교 탄압이 확대되면서 희생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박해다.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내외 등 왕실 일족과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 등도 이때 목숨을 잃는다. 성종 때 한명회가 제안해 만든 오가작통법에 따라 다섯 집 중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인이 적발되면 모두 연좌해 처벌하면서 많은 사람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효종 능 자리에 잠든 영조…정조는 왜?

3년 반에 걸친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난 그녀는 1805년(순조 5) 61세로 세상을 떴다. 영조가 이미 고령이던 때에 계비가 됐으니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정순왕후(貞純王后)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단종비였던 또 다른 정순왕후(定順王后)와 한글 이름이 같아 혼동하기 쉽다. 순조는 원릉의 영조 곁에, 합장하지 않고 쌍릉을 조성해 그녀를 장사지냈다.

원릉은 원래 제17대 임금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던 자리였다. 그런데 능의 석물이 기울고 봉분에 틈이 생겨 해마다 수리해도 문제가 계속되자 아들 현종은 여주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옆에 새 능을 조성해 옮기고 옛 능은 파묘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영조가, 그리고 다시 30년 후에는 정순왕후가 그 자리로 들게 된 것이다.

정조가 유지를 무시하고 굳이 버려진 묏자리를 할아버지 능으로 재활용(?)한 건 정녕 정순왕후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에 스스로 실소한다. 원릉 주변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아들을 죽인 영조의 회한, 아버지 죽음의 집행자와 방조자였던 영조와 정순왕후에 대한 정조의 원망이 함께 묻혀 있을 원릉의 정자각 뒤로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  한국아파트신문 유병갑

 

▶숲길 너머 만나는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의 능, '홍릉-유릉'

문화재청 홍유릉 관리소(031-591-7043)

홍릉과 유릉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26대 고종(1852~1919)과 27대 순종(1874~1926)이 모셔진 능이다. 홍릉에는 명성황후(1851~1895)와 고종이 합장돼 있으며, 유릉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의 합장릉이다. 두 능을 합쳐 흔히 홍유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홍릉과 유릉은 조선의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왕이 아닌 황제라는 칭호로 불린 고종과 순종의 능으로, 역대 왕릉과는 달리 중국 황제의 능제를 따라 조성됐다.

다산정약용유적지, 수종사, 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주변 들를 곳이 쏠쏠하다. 



▶사도세자에 대한 효(孝)를 담은 화성 '융건릉'

융건릉 관리사무소(031-222-0142)

 

융릉 항공사진 / 문화재청


경기도 화성시에 자리한 융건릉은 장조(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장조는 영조가 마흔이 넘어 얻은 아들로 젊은 나이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의 한을 가슴에 품은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양주에 있던 아버지 릉을 화성으로 모시고 현릉원으로 칭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용주사를 원찰로 하고, 수원화성을 축조해 현릉원 행차시 머물 곳을 마련했다. 효(孝)가 밑바탕에 깔린 화성은 정조의 정치적 포부를 펼칠 새로운 고장이었으며 사후 정조 자신도 아버지와 더불어 묻힐 피안의 세계였다. 제부도, 궁평항, 제암리 등 주변 연계 관광지가 있다.

 


▶강남 도심에 흐르는 조선 왕조의 역사 '선정릉'

선정릉 관리사무소(02-568-1291)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왕릉이다. 조선 왕조 제9대 성종의 능인 선릉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 그리고 제11대 중종의 능인 정릉 등 세 개의 능이 한 곳에 모인 선정릉. 왕과 왕비의 무덤은 초-중-고생들에게 역사체험 학습의 명소로, 잘 보존된 숲은 주변 직장인과 주민들의 소중한 산책 코스가 되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 능역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역사의 향기, 숲의 향기가 온몸을 사로잡는다. 선정릉 권역을 산책하다 보면 때로 도시의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아 명상에 젖어들 만큼 호젓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한국관광공사

 

숙종과 그의 왕비 네명이 서오릉에 잠들다

한양 도성 동쪽에 조선 최대의 왕릉군 동구릉이 있다면 서북쪽에는 서오릉이라는 또 다른 왕릉군이 있다. 이곳에는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 등 다섯 기의 능이 있다. 이 중 명릉과 익릉에 제19대 임금 숙종과 그의 세 왕비가 잠들어 있다.

숙종(肅宗·재위 1674~1720)은 적장자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몇 안 되는 임금 중 하나다. 또 재위기간이 46년으로, 아들 영조(52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길었던 왕이기도 하다. 두 임금 사이에 있었던 경종(4년)을 빼고도, 조선왕조 500년 중 100년이 숙종과 그 아들 영조의 치세였다.

그는 1661년(현종 2)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됐다. 1674년 현종이 죽자 그가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대비인 어머니(명성왕후)와 대왕대비인 증조할머니(장렬왕후)가 살아있었으나 수렴청정 없이 곧장 친정을 시작했다.

숙종은 환국(換局)정치의 달인이었다. ‘환국’은 국면을 전환한다는 뜻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판을 새로 짜는 것이다. 그는 서인과 남인 중 집권당파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출척(黜陟), 요즘으로 말하자면 개각을 통해 집권세력을 교체해 특정 당파의 권력 독점을 견제했다. 숙종조 세 차례의 환국은 당파 간 충성경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부왕인 현종 말년(1674, 현종 15)에 있었던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조정에서 축출되고 남인 정권이 들어섰다. 이후 남인은 서인 송시열 처벌 등을 두고 강경파 청남(淸南)과 온건파 탁남(濁南)으로 나뉘었다. 청남은 허목과 윤휴가, 탁남은 허적과 권대운이 이끌었는데 정국의 주도권은 탁남이 쥐고 있었다.

현종에 이어 즉위한 숙종은 1680년(숙종 6, 경신년) 비대해진 남인 세력을 경계해 서인들로 교체하는 경신환국을 일으킨다. 영의정이던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평대군(인조의 셋째 아들)의 차남 복선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그 형제들과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허견은 능지처사로, 복선군은 교수형으로 각각 처형된다. 복선군의 형 복창군도 사사되고 막내 복평군만 살아남아 유배된다.

이렇게 인평대군의 아들 삼형제가 변을 당해 ‘삼복의 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허적은 평민 신분으로 쫓겨난 후 사사된다. 이처럼 남인의 핵심 세력은 물론 그들과 가깝게 지내던 종친들까지 죽임을 당한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도 조정에서 축출되고 서인들이 집권하게 된다.

1689년(숙종 15, 기사년)에 일어난 기사환국은 흔히 장희빈이라 부르는 후궁 장씨가 1688년 왕자를 낳은 데서 비롯됐다. 숙종은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고 소의(昭儀)였던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올리려 했다. 그러자 서인계 중전(인현왕후)의 지지 세력인 서인들은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이에 반대한다.

하지만 숙종은 원자 책봉과 장씨의 희빈 승급을 강행한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작심하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분노해 그의 벼슬을 빼앗고(削奪官爵) 도성 밖으로 내쫓는다(門外黜送).

이어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하고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기용함으로써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된다. 남인 집권세력의 송시열에 대한 탄핵으로 숙종은 결국 그를 유배하고, 제주도에서 정읍으로 유배지를 옮기던 도중에 사약을 내린다. 송시열 이외에도 김만중, 김수흥, 김수항 등 서인 다수가 처형되거나 유배된다. 이후 숙종은 원자의 생모인 장씨를 투기했다는 이유 등으로 인현왕후를 폐해 쫓아낸다. 그리고 이듬해 원자를 세자로,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한다.

재집권한 남인은 1694년(숙종 20, 갑술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된다. 사건은 ‘소론과 노론 인사의 아들·손자 등이 폐비 민씨 복위를 위해 역모를 꾀했다’는 남인계 함이완의 고변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며칠 후 서인계 유생 김인이 상반된 고변서를 올린다. ‘장희재(장희빈의 오빠)가 숙원 최씨(숙종의 후궁으로 훗날 영조의 생모)를 독살하려 하는 한편, 신천군수 윤희 등의 역모에 가담했으며, 거기에 우의정 민암 등도 연루됐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로를 역모로 모는 고변 공방 중에 숙종은 돌연 기사환국 때 쫓아냈던 소론과 노론 인사들을 복관해 불러들이기 시작한다. 또한 남인인 민암이 함이완을 사주, 고변하게 하고 옥사를 확대해 임금을 우롱하려 했다며 사건 국문을 주관했던 우의정 민암을 외딴 섬에 유배한다. 국문에 참여했던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등 남인 대신들도 벼슬을 빼앗고 쫓아낸다.

이와 함께 숙종은 기사환국으로 유배된 소론의 영수 남구만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귀양갔던 서인들을 대거 풀어주고 다시 등용한다. 이로써 소론은 삼정승을 장악하며 정권 주도 세력이 된다. 노론도 기사환국 때 사사된 송시열, 김수흥, 김수항 등이 이때 복관된다. 갑술환국과 함께 숙종은 폐비 민씨를 사가에서 불러들여 복위시키는 한편, 중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해 별당에 머물게 한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701년 복위된 인현왕후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무고옥’으로 소론은 노론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내어주게 된다.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가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지어 놓고 무녀(巫女)와 궁녀들을 시켜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실이 발각된 때문이었다.

숙종은 제주에 유배 중이던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고, 장희빈도 자진하게 하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세자의 생모인 희빈의 구명을 위한 소론의 상소가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버틴다. 숙종이 거듭 자진하라는 명을 내리자 마침내 장희빈은 죽음에 이른다.

과거 장희재 구명에 앞장섰던 소론의 핵심 인물 남구만과 유상운도 벼슬을 잃고 쫓겨난다. 이처럼 ‘무고옥’으로 소론계 대신들이 유배 또는 파직돼 물러나면서 소론은 세력이 약해지고 노론이 조정 실세가 된다.

숙종과 인현왕후 능침 / 문화재청

숙종은 세자 시절 열한 살 되던 1671년(현종 12) 당시 이조참의였던 김만기(金萬基, 훗날 광성부원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1674년 그가 현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 세자빈도 왕비(시호: 인경왕후 仁敬王后)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인경왕후는 천연두에 걸려 1680년(숙종 6) 스무 살의 나이로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 능침 / 문화재청

인경왕후가 죽은 다음 해인 1681년(숙종 7) 숙종은 민유중(閔維重, 여양부원군)의 딸을 계비(시호: 인현왕후 仁顯王后)로 맞아들였다. 그 후 인현왕후는 기사환국 때 폐출됐다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되는 극적 반전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복위한 인현왕후는 원인 모를 병으로 1701년(숙종 27) 서른다섯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정하고, 원비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남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때 숙종은 훗날 자신이 묻히기 위해 인현왕후 능 오른쪽을 파서 모래를 채워두는 ‘허우(虛右)’를 만들게 했다.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 숙종은 김주신(金柱臣, 경은부원군)의 딸을 두 번째 계비(시호: 인원왕후 仁元王后)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숙종은 1720년(숙종 46) 환갑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 능 옆에 쌍릉을 조성하여 묻혔고, 능호는 인현왕후 장사 때 정한 명릉을 그대로 썼다.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는 장수해 숙종이 죽고 경종을 거쳐 영조 때인 1757년(영조 33)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능호는 숙종을 따라 그대로 명릉으로 정해졌다. 인원왕후는 생전에 명릉 곁 좀 떨어진 곳에 능자리를 미리 정해뒀었다.

그러나 인원왕후가 죽은 당시는 그녀보다 한 달 먼저 죽은 영조의 원비(정성왕후)의 능인 홍릉(弘陵) 공사를 하고 있던 때였다. 영조는 명릉에서 400여 보나 떨어진 곳에 따로 인원왕후의 능을 만들어야 하는 인력과 경제적 부담을 덜고자, 그녀가 원했던 자리 대신 명릉에 가까운 곳으로 능자리를 옮겨 세 능이 정자각을 공유하게 했다.

이로써 인원왕후의 능은 능 뒤에서 볼 때 숙종이 묻힌 명릉의 오른쪽 산등성이로 정해졌다. 이 같은 사정으로, 명릉은 동일한 능역 안에서는 가장 오른쪽에 임금의 능을 쓰는 상례와는 달리 나중에 조성된 인원왕후 능이 숙종 능 오른쪽에 자리 잡게 됐다.

이처럼 인현왕후, 숙종, 인원왕후 순으로 조성된 명릉은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두 언덕에 세 기의 능을 배치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다. 정자각에서 바라보면 오른쪽 언덕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이 있고 왼쪽 언덕에 인원왕후의 단릉이 자리하고 있다.

인경왕후의 익릉 / 문화재청

일찍 세상을 떠난 숙종의 원비(元妃) 인경왕후는 현재의 서오릉에 가장 먼저 조성돼 있던 추존 덕종(세조의 일찍 죽은 장남 의경세자)의 능인 경릉(敬陵) 동쪽에 묻혔다. 능호는 익릉(翼陵)이다. 익릉은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경사가 있어 향·어로 중간에 계단을 뒀다. 또한 익릉 정자각에는 양옆으로 한 칸씩을 더 내 벽 없이 기둥을 세운 익랑(翼廊)이 설치돼 있다.

장희빈 대빈묘

서오릉에는 숙종과 세 왕비 외에, 능은 아니지만 한때 왕비로 책봉됐다가 폐위된 장희빈의 묘도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숙종의 왕비였던 네 여인이 한곳에 모여 있는 셈이다. 숙종의 명으로 자진한 희빈 장씨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 인장리(현 구리시 인창동)에 있었는데, 묏자리가 불길하다 해 1719년(숙종 45) 경기 광주 진해촌(현 오포읍)으로 천장됐다. 그 후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이 즉위한 후 1722년(경종 2) 그는 생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했다. 이에 따라 그녀의 묘는 대빈묘로 불리게 됐다. 경기도 광주에 있던 대빈묘는 1969년 서오릉 내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 한국아파트신문 2022 유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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