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용산구 원효로 184 1층 / 박명도봉평메밀막국수 ☎ 02 717 7711
길 한편에 불쑥 솟아난 장승처럼 느닷없이 나타난 이 집은 점심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다. 막국수집이지만 겨울이면 김치찌개 같은 뜨거운 음식을 따로 메뉴에 올린다. 막국수는 여름이 아니라 겨울에 먹는 음식이었다. 냉장고도 없던 옛날에는 겨울에 동치미나 김칫국물에 면을 말아 먹는 것이 당연했다.
막국수를 시켰다. 면 뽑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상 위에 들기름 막국수가 오르자마자 ‘다르다’는 느낌이 왔다.
들기름 맛을 칭찬하며 슬쩍 물으니 강원도 말투가 묻어나는 주인이 신이 나서 말했다. 들기름은 강원도 횡성에서 토종으로만 골라 직접 짜낸다고 했다.
그것도 1년에 15가마니가 전부, 그때 짠 기름을 다 쓰면 가을 추수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김가루, 들깨가루가 눈 내린 것처럼 흩뿌려진 막국수에는 참기름과 달리 내성적인 들기름의 고소한 향이 숲속에 들어온 듯 밀도 높게 퍼졌다.
쇠젓가락을 단단히 움켜쥐고 면을 들었다. 손에 얹히는 감각이 매끄럽고 무언가에 걸리는 느낌이 없었다.
국수를 훌훌 말아먹는다는 그 말 그대로 뻑뻑하지 않고 부드럽게 젓가락이 움직였다. 젓가락에 걸린 면은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입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면은 거칠거나 굵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밀가루 면처럼 쫄깃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끊기고 그러면서도 가늘고 찰기가 있는 면발은 넉넉히 친 들기름으로 코팅이 되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그 맛에는 이로 꽉 깨물어 잡지 않으면 뿜어져나갈 것처럼 생생한 기세가 있었다.
멸치 육수에 간장으로 간을 한 물막국수는 옛날 눈바람이 휘몰아치던 겨울에도 왜 이런 찬 국수를 먹었는지 이해가 되는 맛을 지녔다. 명치 언저리까지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은 어른으로 살아가며 쌓일 수밖에 없는 화, 짜증, 불안 같은 그 모든 것을 씻어 말끔히 내려버렸다.
명태식혜와 함께 오른 수육은 겨울의 한복판을 잘라 내온 듯 맛이 깔끔하고 잡티가 없었다. 좁쌀로 밥을 지어 새큼하게 삭힌 명태식혜를 올리고, 간장을 빼지 않은 막장을 얹고, 도라지 무침과 백김치를 엇박자로 섞어 먹었다.
하얀 김을 내며 상에 오른 감자옹심이는 한 숟가락 뜨자마자 신음도 탄성도 아닌 무언(無言)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감자 전분이 스며든 국물은 고구마나 옥수수 전분이 섞인 국물과 다른 물성, 그러니까 한 방울 한 방울 크게 맺히며 국물이 떨어지되 끈적거리지 않는 오묘한 점도를 가지고 있었다.
껍질을 벗긴 들깨로 가루를 내어 우려낸 국물은 다른 건더기 없이 오직 옹심이만 하얗게 배를 내밀고 떠 있었다. 직접 빚은 옹심이는 과하지 않게 쫄깃거렸다. 음식 하나하나 무심한 듯하면서도 정겹고, 맛이 심심하다 싶으면서도 뒤돌아서면 생각이 나서 산 뒤에 산이 버티고 선 것처럼 맛 뒤에 또 다른 맛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 출처 : 조선일보 2023.12 정동현음식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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