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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군대이야기

이라크파병 서희부대 제마부대

by 구석구석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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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 이라크 자유 작전 개시
전후 복구·재건 국제사회 노력 동참
2003년 4월 파병…1년간 임무 수행
우리 군의 국제평화 활동 범위 넓혀

2003년 4월 30일 서희·제마부대 1진 장병들이 출국에 앞서 비행기에 오르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방일보 DB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2003년 3월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 Freedom)을 개시하고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방지하기로 했다. 우리 정부 역시 이 같은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해 같은 해 4월 서희·제마부대를 이라크에 파병했다. 두 부대는 중동의 거친 모래바람과 작열하는 폭염을 이겨내며 공병·의료 지원 등 임무를 수행했다.

이라크 자유 작전과 당시 상황
2002년 11월 유엔 감시검증사찰위원회(UNMOVIC)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441호에 따라 이라크에서 약 두 달간 대량살상무기 조사를 했다. 하지만 당시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은 불성실한 자세로 조사에 임하며 관련 의혹을 더욱 키웠다. 이에 미국, 영국, 호주, 폴란드 등은 지상구성군사령부(CFLCC)를 만들고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자유 작전을 펼쳤다.

작전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했다. 먼저 1단계에서는 후세인 정권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면서 군사력을 이라크에 전개했다. 동맹군이 집결한 2단계에서는 4월 중순께까지 한 달여간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발사하고 F-117, B-2, B-52 폭격기를 투입해 후세인 정권 군 시설과 전략 표적을 공격했다. 또 후세인 정권의 최후 저항 거점으로 진격해 산발적인 저항을 제압하고 지역을 장악했다.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동맹군은 이후 3단계 안정화 작전을 계속했다. 잔존 적대세력을 소탕하고 대량살상무기를 확보하며 이라크를 복구·재건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우리는 상록수부대와 동의·다산부대가 각각 동티모르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지역안정과 평화협력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이 흐름을 잇는 서희·제마부대 파병은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며 우리 군의 국제평화 활동 범위를 더욱 넓히는 계기가 됐다.

평화를 재건한 서희부대
서희부대는 2003년 4월 15일 1117야전공병단 예하 대대를 모체로 창설했다. 부대명은 고려 초기 거란과의 국경 분쟁에서 탁월한 군사외교 능력을 발휘한 서희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 전개 지역은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였다. 이라크 남·북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나시리야는 당시 미군과 이라크군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시내 곳곳이 파괴됐으며 이에 따른 복구 소요가 많은 지역이었다.

서희부대는 4월 30일 1진 1제대 236명이 쿠웨이트 북부 동맹군 캠프에 전개했고, 이후 현지 기후 적응과 임무 수행 준비를 마친 뒤 나시리야 미군 공군기지로 이동했다. 이어 이곳에서 2제대 329명과 합류해 부대 전개를 완료했다. 이후에는 미군 5군단 265공병단과 함께 작전을 펼쳐냈다.

서희부대의 주 임무는 이라크 재건을 위한 토목·건축 공사였다. 학교·도로·교량 등을 보수하고, 수도·전기시설 등을 개설했다. 또 동맹군 기지 건설을 지원해 미군·이탈리아군·루마니아군 기지 시설을 개·보수했고, 동맹군과 함께 불발탄 제거 작전도 펼쳤다. 아울러 지역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사업을 하며, 특히 기술학교를 운영해 중장비 조작과 전기 용접 등을 교육했다.

희망을 찾게 해준 제마부대
제마부대는 2003년 4월 17일 320의료지원단으로 창설해 같은 달 30일 서희부대와 함께 파병됐다. 군의관·간호장교 등 100여 명으로 구성됐으며, 부대명은 조선 말기 한의학자 이제마 선생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 우리 군은 서부사하라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의료지원부대 활동을 계속하는 중이었으며, 제마부대 파병으로 세 개 지역에서 동시에 의료지원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제마부대는 파병 직후 8개 진료과로 구성된 제마병원을 개원하고 동맹군 치료, 이라크 난민 진료, 지역 주민 순회 진료 등을 수행했다. 이를 통해 약 1년의 파병 기간 1만5000여 명에 대한 진료·치료 성과를 올렸다. 이라크 주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재건을 이루는 데 소중한 힘이 됐다.

서희·제마부대는 2003년 4월 창설 및 현지 전개 후 이듬해 4월까지 1년간 2개 진에 걸쳐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에는 이라크 북부 에르빌 지역으로 이동, 우리 군 이라크 평화·재건사단(자이툰부대)에 통합해 자이툰사단 공병대대와 자이툰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건지원과 의료지원을 계속했다. 이 같은 서희·제마부대의 활약은 국제평화와 질서유지에 동참하고자 했던 우리의 의지였으며, 이라크의 안정과 재건에 싹을 틔우는 희망이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도움=군사편찬연구소

이라크 서희·제마부대 ② - 박상중 예비역 중령 (서희부대 2진 민사작전 총괄장교)

남부 나시리야 탈릴 기지서 임무 수행
주민 대부분 시아파…우리 군에 우호적
기반 시설 열악 전기 하루 1시간 공급
오염된 강물 식수로 사용하는 주민도

서희부대 장병들이 이라크 나시리야 일대에서 지뢰탐지 작업을 하는 모습. 국방일보 DB

2003년 4월 이라크 나시리야에 최초 전개한 서희부대는 지역 내 무력 갈등·충돌로 인해 재건을 위한 공사 소요가 늘어난 상황에서 다양한 공병 작전을 수행하며 여러 시설·건물을 복구했다. 또 곳곳에 방치돼 현지 주민을 위협하는 불발탄·유기탄을 처리하며 그들에게 안전한 환경을 제공했다. 이 같은 활동들은 주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데 큰 힘이 됐다.

박상중 예비역 중령(당시 소령)은 서희부대 2진 민사작전 총괄장교로 2003년 10월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의 탈릴 기지로 떠났다. 이전까지 연합작전 임무를 오랫동안 수행한 경험이 있었고, 미국에서 교관 교육을 진행하며 미군 장병들과 직접 교류도 했다. 이에 실제 작전 현장에 투입해 동맹군과 함께 임무하며 지역 안정에 기여하기를 바랐다.

“6·25전쟁 당시 도움을 받았던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해 유엔 회원국이 되고 다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책무를 다하는 때였습니다. 지역안정과 재건을 위한 연합작전에 동참하는 일은 흔치 않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군인으로서 가진 사명감이었습니다. 아울러 국가적 임무에 참여해 그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서희부대 장병들이 나시리야 일대에서 시설 보수작업을 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이라크 나시리야 현지에 도착한 박 예비역 중령과 부대원들을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뜨거운 태양이었다. 사막 지형의 고온건조한 나시리야는 한낮 기온이 섭씨 47도였고 최고 기온은 섭씨 57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교차가 커서 해가 진 이후 기온이 내려가면 새벽녘에는 쌀쌀하기도 했다.

당시 나시리야 인구는 약 50만 명. 주민들은 대부분 이슬람 시아파였는데, 수니파였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를 장악하면서 이 지역의 사회 기반시설은 상당히 열악한 편이었다. 전기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만 공급됐고, 급수 역시 부족해 인근 오염된 강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주민도 있었다.

다만 치안 상태는 이라크 내 다른 지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수준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우리 군 장병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자신을 돕기 위해 온 부대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부대 주둔지였던 탈릴 공군기지에는 서희·제마부대를 비롯해 다국적군 부대들이 함께 있었다.

“나시리야 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거리에 탈릴 기지가 위치했습니다. 치안 상황은 나쁘지 않았지만 부대원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교육·훈련을 수행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나시리야 지역 내에서 민사작전을 위한 민·군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국적군 장병을 대상으로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한 것이었다. 나시리야는 이탈리아군이 군사경찰로서 치안을 담당하던 터였다. 김 예비역 중령은 회의를 중단하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폭탄의 위력은 생각보다 셌어요. 건물이 파괴되고 이탈리아군 장병과 현지 주민 등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주민 대부분도 자신들의 뜻과 다른 일부 세력의 테러와 그로 인한 사상에 크게 슬퍼했습니다.”

서희부대는 그럴수록 더욱 긴장감을 유지하며 작전에 임했다. 부대의 임무는 공병지원을 통한 재건 활동이었다. 부대원들은 지역 내 주요 시설 개·보수, 동맹군 기지건설, 불발탄 제거 활동 등을 수행했다.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박 예비역 중령은 그중 민사작전 총괄 임무를 부여받았다. 지역에 필요한 재건 소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부대장을 비롯한 구성원들과 공유해 부대의 활동 범위·내용을 결정했다. 지역과 부대를 연결·조율하는 역할이었고, 부대원들이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활동하도록 만드는 밑바탕이었다.

“파병부대의 임무 수행은 결국 그 지역과 주민을 위한 일입니다. 주민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또 그들이 무엇을 희망하는지 파악하는 업무는 중요했습니다. 단순히 대민지원을 펼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역과 부대, 주민과 부대원을 연결하는 일을 했습니다.”

임무 수행에는 네댓 명의 현지인 통역요원이 큰 도움을 줬다. 이들은 영어와 아랍어를 능숙하게 사용했는데, 김 예비역 중령을 비롯한 우리 민사작전 장교들은 영어에 유창했다. 김 예비역 중령이 우리 말로 부대원들과 이야기하고 이를 영어로 통역요원에게 말하면 그들은 다시 아랍어로 바꿔 현지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임무 간 소통에는 전혀 문제없었다.

“현지인 통역요원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와 관습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양국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 안정적인 작전 활동을 펼치는 데 숨은 공로자들이었습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이라크 서희·제마부대 ③ - 박상중 예비역 중령 (서희부대 2진 민사작전 총괄장교)

도움 이상으로 한국의 정 전하려 노력
대화 통해 우선 필요한 물품 파악
물품 전달할 때도 논의해 순위 결정
진심 어린 부대 활동 현지 방송 보도

서희부대는 재건·복구 외에도 지역 주민을 위한 다양한 민사활동을 했다. 사진은 천영택 서희부대장(2진)이 이라크 나시리야 교사협의회가 선발한 지역 학생에게 장학증서를 전달하는 모습. 국방일보 DB

서희부대는 이라크 나시리야 지역 내 다양한 재건·복구 활동을 비롯해 지역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여러 민사작전을 수행했다. 또 국내 기업·기관 및 후원단체 등과 협력해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했다. 하지만 부대원들은 주민들에게 단지 도움을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 한국의 온기를 전하고자 했다.

박상중 예비역 중령(당시 소령)은 서희부대 2진 민사작전 총괄장교로서 현장에서 누구보다 많은 주민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가까워지기를 바랐다. 민사작전의 시작은 신뢰라고 생각했고, 그 신뢰가 굳건히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서희부대 장병들이 이라크 나시리야 주둔지 내에서 위급 상황 발생을 가정한 교육·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그곳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지역은 인류 문명이 발상한 곳이며 오랜 역사와 문화가 이어지는 땅입니다. 개인적으로 중동지역 역사·안보·국제관계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지역 주민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낯설고 어색한 느낌보다는 반갑고 친근한 감정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진심 어린 호감으로 다가갔기에 더욱 빠르게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노력 없이 금세 친해진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의 물리적인 시간이 소요됐고 직접적인 교류도 필요했다. 그들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고 그들 역시 서희부대를 존중하며, 서로의 마음을 열어 가까워지도록 하는 정성이 있었다.

“한번은 지역 내 어느 부족장에게 초대받았습니다. 저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었어요. 집으로 찾아가 함께 식사하는데 낯선 현지음식에 식기도 없이 손으로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그렇다고 수저나 포크를 요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박 예비역 중령은 부족장이 선의로 자신에게 베푸는 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손으로 식사하는 방식은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우리의 식사 문화를 몰랐던 것뿐이었다.

“부족장이 상처받지 않도록, 또 현지의 문화를 이해해 저 역시 기꺼이 손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유익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다만 그날 부대로 복귀해서는 낯선 음식이 문제였는지 복통과 설사로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부족장은 그날의 웃지 못할 내막을 듣고는 박 예비역 중령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이에 박 예비역 중령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괜찮다는 뜻을 전했고,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한참 뒤 다시 마련된 식사 자리에서는 박 예비역 중령을 위한 식기가 가지런히 챙겨져 있기도 했다.

또 한번은 지역 내 민사작전 수행을 위해 차량으로 이동하려는데 주민들이 무장한 채 박 예비역 중령 일행의 차를 막아섰다. 깜짝 놀란 부대원들은 바짝 긴장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경계 자세를 취했다. 자칫 총격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급한 상황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주민들이 부대원들의 차를 막아선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경계 병력을 태운 우리 차량 네 대가 이동하는데 주변에 안개가 자욱한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평소 친분이 있던 주민들이 중무장 상태로 나타나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를 경호해주겠다는 것이었어요. 순간 마음을 쓸어내리며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부대원들의 전투력은 충분히 강했고, 오히려 주민들의 안전이 걱정됐거든요.”

주민들은 되돌아갔고, 그날의 임무는 문제 없이 종료됐다. 주민들이 이렇게 마음을 쓰는 데에는 서희부대의 헌신과 박 예비역 중령의 노력이 있었다. 타국 군 장병들과 달리 서희부대원들은 주민을 동등하게 바라봤고 세심하게 보살폈으며 진심으로 그들을 도왔다. 또 물품을 기부할 때에도 주는 사람이 아닌 받는 사람을 생각해 나눴다. 지역 주민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 무엇이 시급하게 필요한지 파악하는 것은 물론 그 물품을 누구에게 먼저 전할 것인지까지도 의견을 구하고 동의를 얻어 잡음이 없도록 했다.

국내 기업·기관의 도움으로 노트북과 휠체어를 제공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현지에서도 귀한 물품을 기증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주민이 몰려들었다. 이에 박 예비역 중령은 지역사회 관계자·책임자들과 충분한 논의를 거친 뒤 우선순위를 매겼다. 노트북은 개인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닌 각 학교에 공평하게 배부하고, 휠체어는 현지인 의사와 경찰이 입회한 가운데 꼭 필요한 주민에게 선별해 지급했다.

“국내 전자회사의 노트북이라는 것을 알고 ‘아랍어 지원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재미있는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세계적인 기업의 제품이고 현지에 맞춰 생산됐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국내 봉사단체들이 보내온 각종 의료품과 생필품 배부도 마찬가지였다. 충분한 대화와 설득으로 공정·공평하게 배분되도록 했다. 또 주민들의 자존심을 지키고 존중하면서 한국인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를 주더라도 멀찌감치 서서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눈높이를 맞추고 손으로 직접 건네줬다. 그와 같은 서희부대의 마음을 담은 행동들은 현지 지역방송에 수차례 보도되며 주민들이 한국에 우호적인 기억과 감정을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이라크 서희·제마부대 ④ - 박상중 예비역 중령 (서희부대 2진 민사작전 총괄장교)


지역사회 돕기 다양한 프로그램 마련
기술학교 열고 목공·용접 등 교육
정보기술 센터 고교·대학 등 4곳 설치
컴퓨터 140여 대 설치 IT 인재 육성
2진 임무 종료 즈음 주둔지 이동 결정

서희부대는 완벽한 공병지원은 물론 다양한 민사지원으로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며 신뢰를 구축했다. 사진은 주민들에게 기술교육 중인 부대원들의 모습. 국방일보 DB

서희부대는 1진과 2진이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 다국적군 기지에 전개해 지역 내 공병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약 1년의 활동 기간 서희부대는 적극적인 평화·재건 및 인도주의적 지원으로 이라크 국민으로부터 ‘친구이자 형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기간 작전 지역에서 적대세력의 위협을 받거나 곤경에 처한 적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당시 서희부대 2진 민사작전 총괄장교였던 박상중 (예)중령(당시 소령)은 재건지원과 불발탄 처리업무 외에 부대와 지역사회 간 신뢰를 구축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함께 마련·운영했다. 사랑의 기술학교 운영과 정보기술(IT) 센터 개소가 대표적이었다.

사랑의 기술학교는 서희부대 1진에서 처음 시작해 2진에서도 계속 운영됐는데 주민들이 교육을 통해 스스로 일어서고 희망을 되찾는 힘이 됐다. 또 IT 센터를 지역 내 대학교 2곳, 고등학교 1곳, 교사교육시설 1곳 등 4개소에 건립하고, 국내 기업·기관의 협조를 받아 총 140여 대의 컴퓨터를 설치해 IT 인재 육성에 힘을 보탰다.

“기술학교는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기술 분야 이론·실습 교육을 하고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도록 도움 주고자 운영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프로그램에서는 목공, 벽돌 미장, 굴착기 조작, 전기 용접 등의 기술교육이 진행됐어요. 교육에 참여한 주민들은 열정적인 자세로 배움을 이어갔습니다.”

서희부대 2진 활동은 원활하게 계속됐다. 이후 임무가 종료될 즈음 서희·제마부대 주둔지 이동 소식이 현지에 전해졌다. 자이툰부대의 파병에 따라 서희·제마부대는 자이툰부대와 통합해 이라크 내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되는 내용이었다. 나시리야 지역 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서희·제마부대의 공병·의료 지원으로 지역은 빠르게 재건과 안정을 이루는 상태였다. 부대원들과도 신뢰를 쌓으며 돈독한 우정을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큰 도움을 주던 한국군의 이동은 주민들에겐 슬픈 이야기였다.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너무나도 아쉬워했습니다. 크게 서운해했어요. 한국군이 조금 더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물론 아쉬움은 저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군인은 결정된 지시를 받아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할 뿐입니다. 철수 시까지 남은 기간 더욱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며 주민들과 좋은 관계가 이어지도록 노력했습니다.”

박 (예)중령은 민사작전을 총괄하는 장교로서 누구보다 주민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그렇기에 서운함과 미안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돕고 싶은 마음도 여전했다.

“2진 임무를 마치고 이라크를 떠나며 슬퍼하는 주민들에게 약속했어요. 다시 이곳에 돌아오겠다고. 그래서 꼭 도움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약속은 거짓말처럼 현실이 됐다. 2004년 4월 귀국한 박 (예)중령은 이듬해 다시 이라크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이었다.

“늘 이라크 주민들을 생각하면서도 다시 마주할 방법은 막막했습니다. 그때 운명처럼 이라크대사관 무관부 근무 명령을 받았어요. 물론 파병부대 임무와 전혀 다른 업무였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제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2004년 3월 서희부대 장병들이 IT 센터 개관식을 진행해 위성 인터넷 시연회를 하는 모습. 당시 행사에는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을 비롯해 현지 정부 및 삼성전자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국방일보 DB

다시 이라크를 찾은 박 (예)중령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며 나시리야 주민을 돕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에 나시리야 지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원단체를 찾아 지역사회와 연결했다. 이를 통해 생필품을 비롯한 물품이 주민들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약속의 실천이었다.

“약속을 지킬 수 있어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시리야 주민들은 저에게 특별한 인연이었어요. 또 이라크에서의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뿌듯하고 보람된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

박 (예)중령은 현재 국방대학교 직무교육원 교수(정책학 박사)로 근무하고 있다. 국방 정책 분야의 특화된 전문교육을 담당하면서, 때로 해외파병을 떠나는 후배 장병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중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해외파병은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는 노력입니다. 국가 이미지를 높이고, 경제 협력의 교두보가 됩니다. 장병들의 소중한 땀방울은 그 바탕이 됩니다. 이 때문에 장병들은 전문성을 갖고 강한 의지로 참여해야 하며, 우리 모두는 더욱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서희부대는 2진 장병들이 2004년 4월 22일 귀국하며 임무를 종료했다. 1·2진 장병들은 약 1년간 토목·건축공사를 통해 학교보수와 급수 및 오·폐수 처리 등 전후 복구공사 50여 건을 진행했다. 또 미군, 이탈리아군, 루마니아군 등 동맹군 기지 보강 및 건설지원으로 70여 건의 공사를 추진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3진부터는 사단급인 자이툰부대에 합류해 자이툰 공병대대로서 그 역할을 계속했다. 이라크의 재건·지원에 힘을 쏟으며 뜨거운 사막 땅에 희망의 싹을 틔웠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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