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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안보/해외 파병

이라크파병 다이만부대 58항공수송단 자이툰부대

by 구석구석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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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 다이만부대


공군58항공수송단, 4년 2개월간 활동
임무 기간 중 비행거리 약 지구 83바퀴
한국어학당·태권도 교실 운영 큰 인기
우리 군 항공작전 우수성 세계에 알려

2000년대 중반 우리 군의 이라크 평화·재건 활동에는 공군 수송부대도 참여했다. 2004년 8월 창설한 공군58항공수송단이다. ‘다이만부대’로 더 잘 알려진 이 부대는 2004년 10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약 4년2개월간 자이툰부대를 포함한 다국적군 부대의 물자·병력을 완벽히 공수했다. 항공작전부대로서 이라크에서 다국적군 활동을 든든하게 지원했다.

다이만부대의 주 임무는 자이툰부대의 인원·물자·장비 공수였다. 사진은 자이툰부대 장병들이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공군기지에서 이라크 아르빌로 들어가기 위해 다이만부대 C-130 수송기에 오르기 직전 모습. 국방일보 DB

지역 안정의 하늘길 열다
다이만부대의 이름은 현지어로 ‘항상 그대와 함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라크의 안정과 안전을 위한 다국적군의 평화·재건 활동을 묵묵히 뒷받침하겠다는 의지였다. 2004년 8월 31일 창설한 부대는 약 한 달에 걸쳐 공군교육사령부와 5전술공수비행단(현재 5공중기동비행단)에서 교육·훈련을 했다. 중동 지역의 정세·문화·관습·언어 등 현지 적응 교육과 개인별·부문별 임무 수행 능력 강화 훈련을 했다. 신속하게 준비를 마친 부대는 같은 해 10월 12일 현지에 전개했다.

부대 주둔지는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공군기지로, 쿠웨이트 수도에서 서쪽으로 약 80㎞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에 있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일본 등 다국적군이 함께 주둔하는 다국적군 공수 임무의 중심 기지였다. 부대는 당시 이라크 아르빌에서 활동하던 자이툰부대에 병력·물자·장비를 공수했으며, 이라크 곳곳에 있는 다국적군 지원 활동도 펼쳤다.

부대는 2004년 10월부터 2008년 12월 철수 때까지 9개 진에 걸쳐 임무를 수행했다. 이 기간 1323명이 투입됐으며, 2530회 출격해 6000시간 이상을 비행했다.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4만3905명의 병력과 4572톤의 화물을 수송했다. 임무 기간 비행 거리는 331만㎞였다. 지구를 약 83바퀴 돈 셈이다.

부대가 주둔한 알리 알 살렘 기지는 다국적군이 함께 사용했다. 다이만부대는 각국 부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하며 긴밀한 협조체계를 구축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비사 상호교환 교육, 기상 실무협의, 정비 관계관 회의, 상호 현장체험 등의 교류를 이어갔다. 특히 우리 문화를 알리는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한국어학당과 태권도 교실은 부대가 운영한 대표적인 교류 프로그램으로, 다국적군 장병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완벽한 해외 임무 완수
다이만부대는 해외 항공작전을 위해 창설된 네 번째 공군부대였다. 별도 부대창설이 없었던 활동을 더하면 여섯 번째 해외 임무 수행 부대가 된다. 공군의 첫 해외 파병부대는 55공군지원단(은마부대)으로 1966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베트남전쟁 파병 병력의 장거리 공수 임무를 맡았다. 미 공군으로부터 인수한 C-54D 수송기로 총 500회가 넘는 공수비행을 했고, 1만5000시간의 무사고 비행기록을 세웠다. 두 번째는 걸프전에서 다국적군 임무를 완수한 56공수비행단(비마부대)이었다. 1991년 2월부터 같은 해 4월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 활약했는데, 460여 시간 비행하며 전투지역에서 인원·물자를 수송했다.

우리나라의 국제연합(유엔) 가입 이후에는 1993년 10월 공군 C-130 항공기가 평화유지활동(PKO)으로 소말리아에 파견된 상록수부대에 군수물자를 공수했다. 또 1999년 9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마찬가지로 유엔 PKO였던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를 지원했다. 이어 2001년 12월 57공수비행단(청마부대)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항구적자유작전에 참여했다. 싱가포르와 디에고 가르시아를 80여 차례 오가며, 310톤의 화물과 600여 명의 병력 등 다국적군 인원과 물자를 날랐다.

다이만부대는 58항공수송단으로 창설했다. 적대세력의 위협에 맞서 이라크 각지에서 활동하는 다국적군에 물자·장비를 수송했으며,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완벽히 임무를 마쳤다. 부대의 성공적인 임무 완수는 우리 군 항공작전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부대는 다국적군 공유 정보를 바탕으로 위협 요인을 정확히 판단해 선제적으로 예방 조치했다. 자동위협감지 및 대응시스템을 운용했고, 고난도 전술회피기동을 펼쳤다. 베테랑 조종사들과 숙련된 동승 근무자들은 뛰어난 실력과 깊은 헌신을 보였다. 같은 기지를 사용한 미 공군, 일본 항공자위대 등과 비교해 병력·항공기 수는 적었지만 비행 임무 횟수와 비행시간에서는 월등히 앞섰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이라크 다이만부대 ② 고석목 예비역 대령 (다이만 1·2진 참모장, 5진 단장)


다이만부대 1진 참모장 선발
걸프전·아프간 작전 경험 쏟아내

쿠웨이트~이라크 아르빌 공수작전
C-130 수송기에 대공사격 빈번
방탄헬멧·개인화기 갖추고 조종
회피기동 위한 나선강하 비행도
다이만부대는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기지에 주둔하며 자이툰부대와 다국적군 부대에 공수 지원을 펼쳤다. 사진은 다이만부대 C-130 수송기가 이라크 아르빌로 떠나기 위해 활주로에서 택싱(taxing)하는 모습. 국방일보 DB

병력·물자·장비 등을 공중으로 이동·배치하는 공수 임무는 전장에서 전략적·작전적 우위를 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특히 해외 작전부대는 적정한 시기·장소에서 이뤄지는 공수가 임무 완수의 결정적 배경이 된다. 2004년 8월 창설한 58항공수송단(다이만부대)은 이라크에서 평화·재건 활동을 하는 자이툰부대와 다국적군 부대를 훌륭하게 뒷받침했다. 헌신적인 지원군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고석목 예비역 대령(당시 대령)은 다이만부대 창설 과정부터 참여해 1·2진에서는 참모장을, 마지막 진에서는 부대장을 지냈다. 다이만부대에서만 총 22개월을 근무했다. 다이만부대 창설을 주도해 임무, 작전, 활동 범위 등 운영 전반에 관한 실무를 담당했다. 그 직전에는 정부 합동조사단에 공군 요원으로 파견돼 자이툰부대 주둔지 결정 과정에도 동참했다. 이라크 모슬, 슬레이크, 키르쿠크, 아르빌 등 부대 주둔 후보 지역을 방문·분석해 항공작전과 관련된 각 지역의 장·단점 및 세부 의견을 제시했다.

“자이툰부대가 아르빌 주둔으로 결정되고 나서는 작전지역 내 공항 위치를 선정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공수 임무를 책임진 다이만부대는 쿠웨이트에 주둔하면서 이라크 아르빌을 왕복해야 했는데, 주변 환경과 대공위협 등을 고려해 최적의 장소를 정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사실 그는 이라크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1991년 걸프전 당시 56공수비행단(비마부대)에서 조종사로 공수작전을 수행한 바 있다. 또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 항구적자유작전에 참여한 57공수비행단(청마부대)에서 대대장으로 활동했다. 우리 군의 2003~2004년 자이툰부대 파병 실무에 나서 활동했던 이유도 그가 이라크 현지 상황에 낯설지 않고, 풍부한 파병 임무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이만부대 1진 참모장으로 선발된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마부대에서는 기장요원(조종사)으로 참전했고, 청마부대에서는 대대장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경험과 역량을 쏟아내 부대 운영에 힘을 보태고, 후배 조종사를 비롯한 부대원들이 사고 없이 자신의 임무를 하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당연히 자원했고, 운 좋게 선발됐습니다.”

2008년 11월 13일 당시 다이만부대장이었던 고석목(오른쪽) 대령이 부대 6000시간 무사고비행을 기념하며 비행대대장(김영태 중령)을 격려하는 모습. 국방일보 DB

다이만부대에 부여된 임무는 공수였다.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공군기지에 주둔하면서 이라크를 오가며 다국적군 부대를 지원했다. 가장 큰 임무는 자이툰부대에 병력·물자·장비 등을 공수하는 일이었다.

“자이툰부대원들이 민항기를 이용해 본국에서 쿠웨이트 다국적군 기지로 오면, 이들을 다이만부대 C-130 수송기에 옮겨 태워 이라크 아르빌 주둔지로 이동하는 임무였습니다. 물자·장비도 마찬가지입니다. 항공·해상 루트로 쿠웨이트에 도착하면 이를 아르빌로 보급했어요. 이라크의 하늘은 위험했기 때문에 공군이 투입된 것이었습니다.”

공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자이툰부대의 차질 없는 작전 수행과 다국적군 전체의 평화·재건작전 실행을 위해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 공수가 이뤄져야 했다. 다이만부대 승무원들은 베테랑이었고 각오와 의지도 강했다. 문제는 대공위협이었다. 쿠웨이트 기지에서 자이툰부대를 가려면 이라크 하늘을 남에서 북으로 종단하다시피 해야 했다. 이라크 내에 불안정한 지역이 많아 곳곳에 위협이 있었다. 다국적군 부대들이 밀집한 바그다드 지역으로 공수 비행할 때면 더욱 긴장해야 했다.

“실제 우리 C-130 수송기를 향해 대공사격을 가해 오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조종사들은 평소 다양한 상황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기에 그때마다 대공위협을 방어·회피했어요. 전투기가 아닌 수송기 조종사들임에도 방탄복과 방탄 헬멧을 착용하고, 개인화기를 갖춘 채 조종할 정도였습니다.”

부대는 무장세력의 항공위협에 대비해 평소 꾸준히 교육·훈련했다. 대공포·사격에 맞서기 위해 플레어(flare)를 쏘거나, 나선강하(spiral dive) 비행훈련을 지속했다. 또 기지를 함께 사용하는 미 공군 조종사들과 연합 교육·훈련도 펼쳤다. 수송기는 기동성보다 안정성에 더욱 집중된 항공기다. 병력·물자의 안전한 공수가 주요 임무다. 수송기가 나선 형태로 비행하는 일은 매우 드물고, 또 상당히 위험한 회피기동이었다. 당시 작전 현장이 얼마나 열악하고 위협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직접 항공기에 올라 조종간을 잡기도 했다. 부대 1·2진과 5진에 걸쳐 참모장이었고 단장이었기에 실제 조종 임무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선배 조종사로서 또 지휘관으로서 책임감 때문이었다.

“선배 조종사로서 걸프전에서 겪은 이라크 비행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싶었습니다. 또 지휘관으로서 현장 상황을 파악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실제 작전에서 조종사와 정비사, 항법사(내비게이터), 항공적재사(로드마스터) 등 승무원들의 역할 전반을 이해하는 데서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저의 역할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어요.”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이라크 다이만부대 ③ 고석목 예비역 대령 (다이만 1·2진 참모장, 5진 단장)


美 공군도 ‘엄지척’…비법 묻기도
다국적군 협조 매일 경로 위협분석
전술 착륙으로 대공위협 대비

숙영지 공사 라마단과 겹쳐 지지부진
조종사·법무장교까지 나서 제때 완공

2004년 10월 당시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기지 내 다이만부대의 모습. 부대는 예방 관리에 힘써 전체 임무 기간 동안 단 한 건의 사건&middot;사고도 없었다. 국방일보 DB

다이만부대는 이라크에서 항공작전을 수행하며 늘 적대세력의 대공위협에 대비해야 했다. 몇몇 방책이 있었는데, 그중 전술 착륙이 대표적이었다. 비행장 착륙 약 50㎞ 전 6000~7000m 상공에서 기체를 좌우로 뒤틀며 시속 450㎞로 급강하하는 것. 이를 20여 분 동안 20여 차례 나눠 반복한 뒤 전방 10㎞에서 저고도로 날아 착륙하는 전술이었다. 최단 시간·거리 착륙해 적대세력에 노출되는 시간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우리 군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던 영국 공군 C-130 수송기 한 대는 2005년 바그다드 인근 상공에서 대공미사일에 피격·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기도 했다.

당시 다이만부대장이었던 고석목 예비역 대령(당시 대령)은 부대원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적대세력에 맞서 목숨 걸고 임무 수행하는 부대원들을 그는 단 한 명도 잃고 싶지 않았다. 전원 무사히 임무 완수하고, 모두 함께 조국으로 귀환하는 것이 목표였다.

“경로상 위협분석을 매일 진행해 어느 지역을 이동할 때 어떤 위협이 예상되는지 파악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다국적 공군과 협조체계를 구축해 우리 수송기의 위치를 실시간 확인하며 무전을 유지했던 것도요. 수송기가 활주로를 이륙하는 순간부터는 승무원들뿐만 아니라 지상의 저를 포함한 모든 부대원이 긴장감을 가졌습니다.”

당시 다이만부대 장병들이 공수 비행에 앞서 전술 토의를 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조종 임무는 조종사의 몫이었지만 필요에 따라 직접 조종석에 앉기도 했다. 지휘관으로서 현장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인지하고자 했다. 십수 년 전 이미 이라크에서 비행 경험이 있기에 자신의 경험을 후배 조종사들에게 전수하기를 희망했다. 부대원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마음이었다.

“이라크에서의 첫 비행은 그보다 13년 전인 1991년이었습니다. 그때 이라크에서는 걸프전이 한창이었는데, 56공수비행단(비마부대) 조종사로 참전했습니다. 또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57공수비행단(청마부대) 비행대대장으로 파병을 경험했어요. 이 때문에 다이만부대장직을 맡은 이후 부대원들에게 앞선 해외 파병지에서의 임무 수행과 이라크에서의 경험들을 자세하게 들려주고자 했습니다.”

그에게 1991년과 2004년의 이라크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다국적군 작전에 참여해 공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은 다르지 않았지만, 비행에서 느끼는 위협의 정도나 강도는 크게 달랐다.

“제가 걸프전에서 비행하며 느꼈던 가장 큰 위협은 시야 확보가 어려웠던 것이었습니다. 불타오르는 유전에서 나온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으며 앞을 많이 가렸어요. 비행을 마치고 나면 수송기에 기름때가 잔뜩 묻어 있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다이만부대에서는 대공 사격이 큰 위협이었습니다.”

공중에 떠 하늘을 바라보면 한없이 평화로웠지만, 구름 아래 지상에서는 눈으로는 쉽게 보이지 않는 세력이 곳곳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부대원들과 함께 이를 극복해냈다. 다이만부대는 그가 참모장·부대장으로 임무했던 시간을 포함해 전체 임무 기간을 통틀어서 단 한 건의 사건·사고도 없었다. 타국 공군에게 흔하게 나타났던 엔진결함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현지 비행장은 사막 한가운데 지어진 곳이 많아 모래바람이 활주로에 가득했다. 그 모래들이 엔진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고장은 시간문제였다.

“우리 부대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수송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공수 임무에도 차질이 생깁니다. 우리가 완벽히 임무 해야 자이툰과 다국적군이 원활하게 작전하는 것이지요. 부대가 예방 관리에 힘쓴 이유입니다.”

부대의 완벽함은 같은 기지를 사용한 미 공군 장병들도 엄지를 치켜세우도록 만들었다. 수송기 무사고·무결함 비법을 묻기도 했고, 양국 정비사들 간 연합 교육·훈련을 제의하기도 했다. 창설부터 시작해 현지 전개를 거쳐 이후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물론 부대가 처음 쿠웨이트에 전개해서는 모든 일이 도전이고 난관이었다. 하다못해 숙영지를 건설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은 당시 일화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04년 첫 1진에서는 참모장이었어요. 선발대로서 먼저 도착해 생활 공간을 건설하는 시기가 현지 라마단 기간과 겹쳤습니다. 건물 신축을 돕는 현지인 근로자들이 하루 다섯 번씩 종교의식을 가지니 공사가 진척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는 한 달여의 라마단 기간에 일출부터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하고, 하루 다섯 번 기도한다.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이었던 현지인 근로자들에게 매우 신성한 의식이었다.

“시간이 없었어요. 우리가 목표한 일정들이 있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모든 인원이 공사에 달라붙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필수 임무를 빠르게 처리하고 그 외 시간에는 건축에 집중했어요. 조종사는 물론이고 공병 작업 경험이 거의 없는 법무장교까지 나서 삽질했으니 말을 다 했지요.”

덕분에 숙영지는 제때 완공됐고 부대는 차질없이 임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이라크 다이만부대 ④  고석목 예비역 대령 (다이만 1·2진 참모장, 5진 단장)


한국어학당 열어 680여 명 교육
태권도교실 250명 승급 심사 통과
마라톤 대회 개최 우정·화합 다져
주둔기지에 파병기념비 제작 설치
4년2개월 부대원들의 땀방울 기록
다이만부대는 파병 기간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완벽히 임무를 수행했다. 사진은 2008년 12월 부대 마지막 진 장병들이 철수를 앞두고 수송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국방일보 DB

다이만부대는 우리 공군의 항공작전부대로, 이라크 자유작전에 참여해 완벽한 공수 임무를 수행했다. 2004년 10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기지에 주둔하며 6000시간 이상을 비행하고, 4만3000여 명의 병력과 4500여 톤의 물자·장비를 공수했다. 또 다국적군 장병과 문화·체육 교류를 진행하고,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수송을 지원함으로써 국가와 공군의 위상을 높였다.

다이만부대의 대표적인 다국적군 문화 교류 활동은 한국어학당과 태권도 교실 운영, 체육대회 개최였다. 부대 임무 기간 한국어학당에서는 680여 명이 교육을 받았고, 그중 이수 기준을 통과한 158명에게는 부대장 명의의 수료증을 수여했다. 또 태권도 교실에서는 약 250명이 승급 심사를 통과해 노란 띠, 파란 띠, 빨간 띠를 받았다.

“한국어와 태권도 전수 외에 매주 한 차례씩 한국음식과 전통놀이를 체험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부대로서는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였고, 다국적군 장병에게는 우정과 추억을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고석목 예비역 대령(당시 대령)은 2008년 다이만부대장으로서 문화 교류 활동에 힘쓴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특히 부대는 2008년 9월 대한민국 건군 60주년을 기념하는 마라톤 대회를 열어 다국적군 장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각국이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동맹군 체육대회를 더욱 의미 있게 준비한 행사였다.

당시 대회에는 다이만부대를 비롯해 미국·일본·호주 등 4개국 장병 350여 명이 참가했다. 5㎞ 달리기와 2.5㎞ 걷기 종목에 참가한 각국 장병들은 우정과 화합을 나누며 성공적인 연합작전 의지를 다졌다.

“경쟁이 아닌 단합을 위한 행사였어요. 참가자 전원에게 건군 60주년 마크가 새겨진 기념 티셔츠를 제공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막의 땅에서 다른 나라 장병들과 국군의 건군 6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완벽한 단독·연합 공수작전을 수행하고, 또 다국적군 장병과 유대 강화에도 노력한 다이만부대는 2008년 12월 귀국길에 올랐다. 그 직전에는 성공적인 임무 완수와 이라크 평화·재건 활동에 기여한 뜻을 기리는 파병기념비를 주둔 기지에 세웠다.

2008년 11월 당시 다이만부대장 고석목(왼쪽 둘째) 대령과 부대원들이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기지에서 다국적군 장병과 함께 파병기념비 제막식을 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파병기념비를 제작해 설치한 것입니다. 4년2개월여 동안 다이만부대 전 부대원이 흘린 땀방울이 기억되기를 바랐습니다. 또 부대가 철수해도 지역의 평화를 염원했던 한국군과 한국민의 마음은 남겨지기를 원했습니다.”

대리석으로 만든 기념비에는 당시 같은 기지에 주둔한 국가 국기와 함께 ‘2004년 10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대한민국 공군의 이라크 자유작전 파병을 기린다’는 문장이 새겨졌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그곳을 찾아 기념비를 보고 싶습니다.”

다이만부대는 자이툰부대의 병력·장비 수송 지원 임무를 끝내고 나서야 철수 준비에 돌입했다. 제일 먼저 들어가서 제일 나중에 나오는 일, 공수 임무가 그렇다. 다이만부대의 철수는 그야말로 작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쿠웨이트에서 한국까지 약 6000㎞를 비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행 시간과 거리에서 쿠웨이트~이라크를 오갔던 평소 임무와는 차원이 달랐다.

“해외 장거리 비행의 성공은 준비가 8할입니다. 그만큼 철저한 준비가 성패의 관건이라는 이야기지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기에 모든 상황의 발생 가능성을 열어둬야 합니다.”

2008년 12월 18일 자정 무렵, 부대원들이 탑승한 마지막 수송기가 다국적군 장병들의 환송을 받으며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기지를 이륙했다. 인도·태국·필리핀을 경유하는 여정의 출발이었다. 임무통제관, 조종사, 항법사(내비게이터), 정비사, 화물적재사(로드마스터) 등 모든 승무원은 긴장을 유지하며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수송기는 이륙한 지 6시간 만에 인도 뭄바이에 도착했다. 테러 위협이 있어 약 3시간 동안 연료 보급만 한 뒤 곧장 이륙했다. 철야 비행이었다. 태국 우타파오에 도착해서야 부대원들은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비행에 나서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21일 김해기지에 도착했다. 쿠웨이트를 떠난 지 나흘 만이었다.

“가족을 만난 기쁨과 행복도 정말 컸지만, 그보다 부대원들과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조국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더 크게 들었습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대원들에게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는 귀국해서도 한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조금 더 하지 못한 아쉬움, 사건·사고 없이 임무를 완수한 뿌듯함, 국격을 높이고 공군의 역량을 높인 자부심, 많은 생각과 감정은 꽤 오랜 시간 그를 그곳에 잡아 뒀다.

“분명한 사실은 다이만부대가 정말 잘했다는 것입니다. 전개부터 철수까지 전 부대원이 합심해 만들어낸 성과입니다. 아직도 부대 마크를 보면 뭉클한 마음이 먼저 생겨납니다.”

그는 공군교육사령부 행정학교장 임무를 끝으로 32년여의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2015년 전역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을 제외한 공군의 모든 해외파병에 참여한 역사의 산증인으로 후배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제 딸이 가을에 결혼합니다. 제가 1991년 걸프전 당시 공군 비마부대 조종사로 파병됐을 때 태어난 아이입니다. 태어난 것도 보지 못하고, 본국에서 전화로 소식을 들었습니다.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공군 조종사로서 국민이 먼저였고, 임무가 먼저였습니다. 그걸 묵묵히 이해해준 가족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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