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단비부대①
2010년 2월부터 2년10개월간 활약
연인원 1440명 장병 총 6진 파병
대지진에 초토화된 레오간 재건 지원
공병·의료·민사 등 작전 수행 구슬땀
아메리카 지역 활동 최초·유일한 부대
6·25전쟁 당시 경제원조 보답 기회도
아이티(Haiti)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의 서쪽 3분의 1을 영토로 하는 국가다. 섬의 동쪽은 도미니카공화국이 자리하고 있다. 1697년 스페인 식민지가 됐다. 1804년 독립했지만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이 계속됐다. 2000년대 들어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04년 6월 평화유지군 파병을 결의했다. 이후 아이티는 국제사회 지원과 협력으로 조금씩 치안과 질서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010년 1월 12일 아이티에 또 한 번 시련이 찾아왔다. 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아이티를 초토화했다. 당시 현지 보도에 따르면 사망 25만 명, 부상 100만 명에 이르렀다. 유엔은 즉시 아이티 재건복구 지원을 결의했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회원국에 평화유지활동(PKO)을 위한 파병을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신속히 대응해 그해 1월 28일 파병준비단을 소집했다. 2월 9일에는 국회 본회의에서 파병동의안이 가결됐다. 군은 육군수도방위사령부 1113공병단 예하 156공병대대를 모체로 국군 아이티재건지원단(단비부대)을 편성했다. 경비복구지원대(해병대)와 작전지원대 240명 규모였다. 2월 10일 선발대 30명이 아이티로 떠났고, 27일 본대가 출국했다.
단비부대의 이름은 ‘꼭 필요할 때 내리는 비’를 뜻한다. 단비부대는 2010년 2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2년10개월간 아이티 남부 레오간 지역에서 총 6진에 걸쳐 헌신적인 복구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레오간은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남쪽으로 40㎞ 떨어진 지역이었다. 대지진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겪은 도시 중 하나였다. 아이티에 파병한 19개국 대부분이 수도 일대에 주둔지를 구축했던 것과 달리 아이티 주민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던 선택이었다.
부대의 재건지원은 크게 공병·의료·민사로 구분됐다. 단비부대가 현지 전개해 유엔 아이티안정화임무단(UN MINUSTAH)에서 부여받은 첫 공식 임무는 204번 도로 긴급복구였다. 204번 도로는 아이티 중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핵심 시설이었는데, 부대의 성공적인 공병작전으로 유엔의 아이티 재건 활동도 활기를 얻었다. 이후 지진 잔해 제거, 도로 복구, 하천 준설, 부지 정리 등 485건의 공병 지원을 펼쳤다.
특히 심정 개발과 급수지원은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큰 재해로 질병과 전염병의 위협이 커지면서 식수·생활용수는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부대는 우수한 심정 장비와 뛰어난 기술력으로 임무 기간 총 21건의 심정을 개발했다.
의료지원 성과도 이에 못지않았다. 부대의 의무지원은 애초에 주민이 아닌 부대원을 대상으로 편성됐다. 하지만 부대는 의료시설이 전무한 현지 상황과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부대 전개 직후 별도의 시설도 갖추지 못한 채 야전 텐트를 임시로 마련해 주민들을 진료·치료했다. 이후에는 주둔지가 구축되고 시설·장비를 보강하면서 단비병원을 개원했다. 하루 평균 200여 명의 주민을 마주하며 임무 기간 6만 명 진료라는 기록을 세웠다.
단비부대 2진 활동 시기였던 2010년 10월에는 아이티 전 지역에 콜레라가 발병·확산하면서 다시 한 번 위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부대는 부대원과 주둔지 안전을 최우선으로 관리하며 작전지역에서 방역 활동, 위생교육, 약품 보급 등에 집중해 사태를 조기에 안정시켰다.
단비부대는 초기 재건 활동에 집중했고, 조금씩 안정을 찾으면서 민사작전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학교 부지·시설을 정비하고 학용품과 간식을 제공했다. 태권도·중장비·컴퓨터 교실을 운영해 주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했다. 지역 학교를 방문해 한글·영어·음악 수업 등으로 어린이들이 꿈과 웃음을 되찾는 데 힘썼다. 중장비·컴퓨터 과정을 수료한 42명 중 35명이 자격증을 획득했고, 태권도 교실은 37명의 유단자를 배출했다.
단비부대 파병에는 특별한 의미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1991년 유엔 회원국 가입 이후 본격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해외 곳곳에 군을 보내 평화·안정을 도왔다. 그중 단비부대는 아메리카 지역에서 활동한 최초이자 유일한 우리나라 해외 파병부대였던 것. 자연재해 복구지원을 주 임무로 하는 부대도 단비부대가 처음이었다. 약 2년10개월에 걸쳐 파병된 연인원 1440명의 장병은 아이티에 희망과 용기를 심어줘 ‘레오간의 축복’ ‘레오간의 천사’로 불렸다.
이와 함께 6·25전쟁 당시 2000달러의 경제원조를 했던 아이티에 빚을 갚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환율과 화폐가치 상승분을 고려하면 지금의 100억 원 이상 금액이다. 단비부대는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국가로 성장한 우리나라의 위상과 역할을 실천한 활동이었다. 단비부대는 2012년 12월 24일 귀국해 해단하며 임무를 종료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도움=군사편찬연구소
아이티 단비부대 ② 박성호 예비역 대령 (단비부대 2, 3진 단장)
대선·총선 앞두고 정치·사회적 혼란
유엔군이 전염병 전파 헛소문 나기도
주둔지 주민 대표와 지속적인 만남
종교·사회 지도자들과는 정례 회의
초기엔 아침마다 아이티 국가 틀어
부대의 진심 전달하려는 노력 기울여
2010년 1월 발생한 아이티 대지진은 주민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아이티는 크나큰 재해로 평화·안정의 희망조차 잃었다. 당시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으로 아이티 재건 복구에 나선 단비부대(아이티재건지원단)는 위협 요소들을 극복해 나가며 작전을 수행했다.
단비부대 2·3진 단장이었던 박성호 예비역 대령(당시 대령)에게 아이티는 실전 지역에서 임무하며 역량을 펼치는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부대를 총괄·지휘하며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했기 때문이다.
“군인으로서 해외 임무를 수행하며 실전 경험을 얻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파병부대장으로 선발되고 전투복에 태극기를 부착했을 때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이미 몇 차례 파병 임무를 겪었기에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는 아이티 파병에 앞서 앙골라와 이라크에서 재건복구 작전을 수행했었다. 1996년 아프리카 앙골라에 파병된 공병부대 2진에서 공병중대장으로 작전을 이끌었고, 2005년 이라크 자이툰부대에서는 공병대대장 임무를 맡았다. 재건복구가 중심인 해외 공병 작전에서 충분한 경험과 역량을 갖춘 것.
하지만 아이티는 그가 겪은 나라들과 성격이 달랐다. 앙골라와 이라크가 수그러든 내전·갈등을 안정화하고, 열악한 시설·환경을 복구·정비하는 일이었다면 아이티는 자연재해로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임무 성질과 작전 환경에 차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를 포함한 부대원들이 이겨내야 할 위협이 달랐다.
“먼저 아이티는 지진 발생 전부터 국내 정세가 불안정했습니다. 20세기 이후 수십 년간 군부 파벌의 권력 다툼에 무력 충돌이 계속됐고, 2000년대 들어서는 무정부 상태로도 이어져 2004년 유엔에서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던 것이었어요. 평화·안정이 정착되기도 전에 대지진이 났고, 사회적 혼란이 컸습니다.”
특히나 지진 발생 당시 아이티에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정치적 혼란은 사회적 갈등으로 번졌고, 이는 단비부대를 비롯한 각국 유엔 PKO 부대에도 위협이 됐다.
“잘못된 소문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 일대에 전염병이 발생했는데 그 원인이 유엔군이라는 것이었어요. 유엔군이 아이티에 들어와 병균을 퍼트렸다는 황당한 내용이었습니다. 주민들 사이에 반(反) 유엔 정서가 나타나 적대 행위를 하기도 했어요. 타국 군에서는 무장해제되지 않은 세력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단비부대는 자연재해 재건 복구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예상 밖의 위험이 펼쳐지자 그는 무엇보다 부대 방호와 부대원 안전에 신경 썼다.
“부대장으로서 부대원들이 안전하게 임무 완수하고 무사히 귀국하기를 바랐습니다. 주둔지 외부 임무 땐 개인화기와 방탄 장구류를 챙겼고, 더욱 각별하게 주위를 살폈습니다. 또 본국에 수시로 변화하는 상황을 보고·공유하고, 현지 유엔임무단 사령부와 협조해 적절한 조치를 했습니다.”
다행히 우리 군에는 무력 충돌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부대의 선제적 노력이 있었다. 주둔지에 처음 전개했을 때부터 지역사회에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부대의 진심을 전달하고자 했다.
“부대가 주둔한 레오간 지역의 주민대표를 지속적으로 만났어요. 종교·사회 지도자들과 정례적으로 회의도 했고요. 아이티를 돕고자 하는 단비부대의 목적을 알리고, 그들을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초기에는 아침마다 주둔지에 아이티 국가(國歌)를 틀기까지 했어요. 주둔지 인근에 난민 캠프들이 꽤 있었거든요. 작은 아이디어였지만 그만큼 주민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 부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국가를 들으며 주민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겠지만, 최소한 단비부대에 대한 적개심은 사라졌을 것이다. 조금씩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단비부대가 단 한 건의 충돌이나 사건·사고 없이 임무 완수한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부대를 위협하는 요소는 날씨도 한몫했다.
“대지진이 지나간 터라 한 번씩 여진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밤에 잠들 때면 땅이 흔들거려 처음에는 놀라기도 했어요. 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집중 호우가 며칠간 쏟아지기도 했고요. 초대형 허리케인이 발생했을 때는 긴급 대응반을 편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위협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가 부대장이었던 시기 가장 큰 위기는 콜레라(Cholera) 창궐이었다.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에 열악한 위생 환경이 더해지면서 대규모 전염병이 발생한 것이다. 아이티 전국에 걸쳐 수천 명의 주민이 콜레라에 감염됐다. 부대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아이티 단비부대 ③ 박성호 예비역 대령 (단비부대 2, 3진 단장)
본국서 즉각 의료 장비·약품 등 보급
손 씻기 생활화하고 방역 활동 강화
임무 기간 단 한 명의 감염도 없어
학교 등 공공시설 대상 재건 복구 집중
2010년 2월 아이티에 파병된 단비부대는 지진으로 인한 재해 재건 복구가 주 임무였다. 건물·도로·시설이 파괴돼 도시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임무를 시작한 부대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2010년 10월 아이티 전역에 콜레라가 퍼지면서 부대 운영·활동에 위기를 맞았다.
단비부대 2·3진 단장이었던 박성호 예비역 대령(당시 대령)은 그때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당시 아이티는 국가적 재난에 이어 대규모 감염병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단비부대 역시 안전이 보장된 상태가 아니었다. 자칫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는 부대를 방호하고 부대원을 보호해야 했다. 책임감과 사명감이었다.
“부대원들의 안전이 무엇보다 먼저였습니다. 부대원 건강이 확보돼야 지역주민 지원·활동도 가능한 것이니까요. 단 한 명도 콜레라에 걸리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 실행했습니다.”
부대는 본국과 실시간 소통 채널을 유지해 현장 상황을 수시·정기 보고했다. 본국에서는 즉각 의료 장비·약품 등을 보급했고, 새로운 지침을 하달해 단계별 대응을 펼치도록 했다. 부대는 현지 유엔임무단, 타국 평화유지군, 지역 정부 등과 협조체계를 강화해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자 했다. 또 주둔지 내 전염병 예방 활동에 각별히 신경 썼다.
“부대원들에게 청결한 위생 상태를 특히 강조했습니다. 손 씻기를 생활화·습관화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별도로 내과 군의관을 두는 동시에 방역 활동을 강화했습니다. 또 위병소에는 차량 바퀴를 세척·소독할 수 있는 세륜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부대 방역 활동은 주둔지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과 난민 캠프에서도 이어졌다. 도움이 필요한 주민들에게 긴급구호품·약품을 전달하고 질병 예방 교육도 진행했다. 이 같은 부대의 노력과 활동으로 임무 기간 단 한 명의 부대원도 콜레라에 감염되지 않았다. 또 부대가 주둔한 남부 레오간 지역 역시 아이티 내 다른 곳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단비부대는 재건 복구 작전에도 적극적이었다. 지진으로 파괴된 도로를 복구하고, 지역 곳곳에서 잔해를 제거했다. 우기에 집중 호우가 내리는 기후 특성을 고려해 우기 전 하천에 쌓인 토사를 치웠다. 심정 개발에도 나서 마실 물이 절실했던 지역주민들에게 식수를 제공했다. 의료지원과 민사지원도 마찬가지.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방향에서 작전을 펼쳐나갔다.
“난민촌, 학교, 지역기관 등 공공시설을 대상으로 재건 복구를 집중했습니다. 지역사회에 의견을 구하고 주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항상 살폈습니다. 또 재건 복구 활동에 주민들이 참여해 성취를 얻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시설물 신축이 대표적이었다. 주민들이 작업에 참여토록 해 재건 복구의 자부심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일방적 민사작전이 아닌 그들과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배려였다. 단순 재건 복구가 아닌 상처 받은 주민의 마음을 생각한 부대의 헌신은 현지 타국 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타국 부대들은 단비부대의 세심하고 진심 어린 활동을 본받아 자신들의 부대 운영에 반영하기도 했다. 또 현실적 도움이 된 아이디어 활동을 모델 삼아 벤치마킹했다.
“부대 내에 오·폐수 정화시설을 제작·설치한 일도 기억에 남는 성과였습니다. 아무래도 위생이 중요한 이슈였어요. 지역을 재건 복구하면서 위생 환경을 계속 개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대부터 앞장서고자 했습니다.”
부대의 정화시설은 유엔임무단 사령부에서 부대 운영 우수 사례로 선정됐고, 각국 유엔 평화유지군 캠프에 모델로 전파됐다.
“훗날 부대가 임무 완수하고 떠난 이후를 생각했어요. 주민들이 깨끗하게 남겨진 우리 군 주둔지를 보며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져주기를 바랐습니다.”
아이티 단비부대 ④ 박성호 예비역 대령 (단비부대 2, 3진 단장)
재건 복구 활동 외 주민과 교류 심혈
중장비·태권도·한글 등 교육도 힘써
6·25전쟁 참전국 장병 부대 초청도
2년 10개월간 단비 같은 희망 선물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으로 아이티에서 임무를 수행한 단비부대는 재건 복구 활동 외에도 의료지원과 대민지원으로 주민들에게 힘이 됐다. 2010년 파병 초기 야전 텐트에서 의료지원을 시작한 부대는 이듬해 단비병원을 개원하고 철수 직전까지 활동을 이어가 6만 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했다. 또 대민지원 활동에도 적극 나서 주민들에게 중장비·태권도·컴퓨터 등을 교육하고, 어린이들에게 한글·영어·음악을 가르치며 희망과 웃음을 되찾도록 도왔다.
단비부대는 주민들과의 교류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개 초기부터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멈추지 않은 것. 아이티를 돕는 우리 군의 행동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주민들은 점차 우리 군의 정성을 알게 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단비부대장으로 활동했던 박성호 예비역 대령(당시 대령)은 부대-주민 간 교류를 넘어, 주민들 사이의 단합·통합도 추구했다.
“부대가 축구대회와 체육 행사 등을 개최한 이유입니다. 한편으로 부대원들과 주민들이 친목을 도모해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바랐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상처와 아픔을 겪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용기를 얻고 다시 일어서기를 희망했습니다.”
2011년 열린 단비부대장배 축구대회에는 지역 16개 클럽팀이 참가했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뛰었고, 주민들은 열띤 응원을 보내며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에 환호했다.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인 축구를 마음껏 즐기는 장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아울러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 그에 맞는 활동을 전개하며 소통·공감하려는 부대의 깊은 뜻이었다.
“우리 부대는 대회를 위해 마을 공터를 정비해 축구 경기장을 조성했습니다. 축구공을 비롯한 경기 용품도 제공했어요. 현지 언론에 소개됐고, 지역사회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호응을 보냈습니다.”
이 같은 활동은 현지 유엔임무단 사령부도 동의한 것이었다.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의 민사활동일지라도 현지 유엔임무단·타국 군 등과 조율·협업이 없다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생각. 평화유지활동은 어느 한 국가, 한 부대가 독단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민사작전에서는 주민들의 필요·요구를 먼저 생각해 판단하고 이후 지역 정부, 유엔군사령부 등과 협력·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병작전과 의무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감하고 조율하며 협업을 이뤘던 점이 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던 배경이었습니다.”
단비부대는 타국 평화유지군과의 교류도 놓치지 않았다. 여러 교류 활동이 있었는데, 그의 기억에 가장 진하게 남은 행사는 6·25전쟁 참전국 장병 초청이었다.
“현지에 전개한 유엔 평화유지군 국가 중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도움을 준 나라 장병들을 부대로 초청했어요. 간단한 행사를 진행하면서 감사장을 전달했습니다. 우리를 도와줘 고맙다고 했어요.”
부대의 정성 어린 마음에 그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역사와 우정을 기억해줬다면서 오히려 고마워하더라고요. 손을 맞잡고 서로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마음이 짠해짐을 느꼈어요.”
그에게는 잊지 못할 경험이 하나 더 있다. 2진과 3진에서 단장직을 수행하는 중간에 잠시 귀국할 일이 있었다. 수개월 만에 갖는 휴식이기도 했고, 본국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도 있었다.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다시 아이티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국에서 출발해 미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아이티로 가는 여정. 전세기나 군용기가 아닌 민항기를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국적기로 기억합니다. 국내에서 아이티를 가려면 미국에서 외국 항공사를 이용해야 했거든요. 가장 저렴한 좌석에 앉았어요. 어서 부대로 복귀할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때 승무원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승무원은 전투복을 입은 그에게 다가와 인적사항이며 국적과 부대명을 물었다. 또 왜 아이티에 가는 것이고,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처음에는 낯선 동양인 군인이 수상하게 보여서 그런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승무원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단비부대원으로서 유엔 평화유지활동으로 아이티의 재건을 돕고 있으며, 본국에서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 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승무원은 자리를 떠났고, 얼마 뒤 기장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저에게 무료로 좌석 등급을 올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기장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헌신하는 분에게 조금이나마 베풀고 싶다고 했어요.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면서요. 손사래 치며 거절했는데, 주변 승객들까지 제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퍼스트 클래스로 옮겼어요.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단비부대는 마지막 진이 2012년 12월 24일 귀국·해단하며 임무를 마쳤다. 부대는 약 2년 10개월 동안 485건의 공병지원으로 도로·건물·시설을 재건·복구했다. 또 지하수 개발, 의료지원, 대민지원 등으로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주민들에게 부대는 그 이름처럼 꼭 필요한 때 맞춰 내린 단비였다.
“국가를 대표해 해외 작전을 수행한 일은 영광입니다. 내가 아닌 우리가 함께였기에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전 세계에 한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게 된 것은 부대원 한 명 한 명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당시 부대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 국방일보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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