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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여주 고달사지

by 구석구석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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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도 법당도 없는 절터를 찾는 마음

 

[경기도의 아름다운 사찰] 불상 사라진 자리에 내 마음 놓고 왔네, 여주 고달사지 - 중부일보 - 경

승려도 법당도 없는 절터를 찾는 마음처서가 지나고 연일 비까지 내려 더위가 완전히 가셨다. 계절의 변화는 바람이 가장 먼저 전한다. 가을이 들면 호젓한 곳에 가서 소슬한 바람을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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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가 지나고 연일 비까지 내려 더위가 완전히 가셨다. 계절의 변화는 바람이 가장 먼저 전한다. 가을이 들면 호젓한 곳에 가서 소슬한 바람을 맞고 싶다. 찻집 말고 절집에 가서 따뜻한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풍경 소리를 가만히 듣다 오는 것도 좋겠다. 그런데 때로는 그마저도 어수선하게 느껴져 인적 없이 바람만을 벗하고 싶을 때 있다. 그럴 때는 폐사지가 좋다.

비워진 땅에서 마음을 채운다. 집도 절도 없이 무해한 빈 터에서 가을 햇살과 바람을 무량하게 느끼고 온다.

고달사지

과문한 탓에 관련 연구자들이 아니면 찾기 어려운 임야의 폐사지는 찾지 못한다. 폐사지도 명성이 있다. 무심하게 놓인 듯 하나 실은 발굴조사를 마치고 나름의 제 자리에 놓인 석물들이 있는 단정한 폐사지를 찾는다. 잘 깎은 잔디와 펜스를 두른 유구, 곳곳에 설치된 안내판에서 빈 땅을 관리하기 위해들인 돈과 인력을 엿본다. 절집도 스님도 사라진 대지를 이토록 아끼는 까닭은 무엇인가.

경기도에는 이른바 3대 폐사지가 있다. 세 곳 모두 나말여초 시기 나라를 대표했던 사찰들이다. 양주 회암사지, 안성 봉업사지, 그리고 여주 고달사지다. 앞서 두 절터는 본지 경기도 아름다운 사찰 기획기사에서 소개한 바 있다. 모두 폐사지여도 서로 다른 분위기를 지녔다.

양주 회암사지는 호방한 듯하면서도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위엄이 있고 안성 봉업사지는 논밭 가운데서 절터마저 상상의 영역에 맡겨야 하는 분방함이 있다. 여주 고달사지는 폐사지를 떠올릴 때 기대하는 고적함에 부응한다. 

고달사지 느티나무. 수령 440년의 나무였으나 현재는 고목이 되었다.


폐사지가 전하는 ‘텅 빈 충만’

감히 어떤 정의를 내리기에는 조심스럽지만 폐사지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가장 잘 자아내는 곳이 고달사지다. 과거의 화려함은 간데없이 평면화 된 사역을 굳이 이상적인 공간으로 만들 의도는 없다. 다만 폐사지를 부러 찾은 범부의 입장에서는 만물의 무상함을 깨닫고 평안에 가닿기에 이만한 공간이 또 없다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위로 받는 느낌이 좋아 일부러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실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절터의 위무를 받고 싶어 고달사지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8월말의 고달사지는 아직 초록의 기운이 만발하다. 일부 주춧돌은 잔디에 가려 보이지 않고 석축 사이에는 앙증맞은 야생 꽃이 싱그럽게 피어 있다. 절터 가장자리 도랑에는 무성한 수풀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른다. 아직 한낮의 볕이 따가워 그늘 없는 절터에 앉기는 어렵겠지만 아무 곳에나 돗자리를 깔고 반나절 쉬었다 가도 좋겠는 풍경이다. 당간지주도 문도 없어 어디가 입구인지, 또 어떻게 돌아봐야 할 지 알 수 없는 너른 땅이다.

다만 400년 넘게 고달사지의 수문장으로 서있는 느티나무가 나름의 지표가 된다. 나무는 최근 명을 다해 고목이 되었다. 푸른빛을 잃고 생장을 멈춘 가지와 기둥만 덩그러니 남았지만 여전히 고달사지의 첫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초록이 사라지는 겨울에 이르면 폐사지의 골격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정도(正道)는 아니어도 대략의 가시적인 동선이 잘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여름이든 겨울이든 스님도 법당도 없는 절터에서 반드시 법도를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바람이 길을 정해놓고 불지 않듯 방문객 또한 상상 속의 금당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사역의 규모는 1만2천 평에 달한다.

불상은 사라지고 보물 8호 석조대좌만 남았다.


빈 석조대좌에 모시는 상상의 불상

폐사지를 둘러보는 방법은 따로 없지만 아무래도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 사전정보가 있다면 가장 가치 있는 석물에 먼저 관심이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너른 고달사지에서 시선을 잡아채는 것은 높이 5m에 달하는 원종대사탑비다. 그런데 이 탑비는 느티나무를 기준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어 결국 고달사지를 지그재그로 다 걸어본 후에야 닿는다. 고달사지에는 총 5점의 국가지정문화재와 1점의 경기도지정 문화재가 있다. 이중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보물 282호 쌍사자 석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터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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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는 경기도지정 문화재인 석조가 있다. 석조는 현재 흐르는 냇가와 가까운 곳에 자리한다. 언젠가는 이 석조에도 혜목산(현재의 우두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그득 담겼으리라. 석조가 있던 자리 일대는 법당과 승당, 요사채가 있던 수행 및 생활 영역에 해당한다.

석조에서 위쪽을 바라보면(방위상으로 동쪽) 보물 8호 석조대좌가 보인다. 석조의 왼편에 조성된 나무 데크길을 따라 석조대좌로 향한다. 풀밭으로 걸어도 그만이지만 석조와 석조대좌 사이에는 도랑이 깊이 패여 데크길로 가는 쪽이 편하다.

이 도랑과 석축을 경계로 영역이 바뀐다. 석조대좌가 있는 곳은 불전 및 영당 영역이다. 불상은 홀연히 사라지고 부처님이 앉으셨던 자리만 홀로 남은 금당 자리다. 석조대좌는 높이 1.48m, 3단의 사각대좌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조대좌다. 부드럽게 표현한 연꽃잎의 묘사가 돋보이며 고려 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대좌가 걸작이니 불상은 또 얼마나 크고 아름다웠을까. 원주인이 비운 자리에 상상의 불상을 모신다. 부처님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눈을 감고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린다. 좌선이 별 것 인가. 폐사지에서 명상하길 즐긴다는 지인의 말처럼 마음으로 부처를 만난다. 

원종대사탑비의 받침돌. 생생하게 묘사한 거북머리가 인상적이다.


이토록 생생한 돌거북을 보았나

‘사방은 산으로 절을 둘러싸고(四面山屛圍紺宇) / 한 개의 비석은 푸른 하늘에 의지했네(一條碑石倚靑天) / 웃으며 주고받는 말로 저녁이 되어 돌아갈 줄 모르니(笑談竟夕忘歸路) / 도리어 그때 묘연(묘법연화경)에 온 듯하구나(還似當時在妙蓮)’

고려 문신 유항 한수가 쓴 고달사시의 일부다. 보물 6호 원종대사탑비 앞에 서면 이 시에서 풍기는 고졸한 향취를 공감할 수 있다. 절터에서 가장 덩치가 큰 탑비는 고달사지가 폐사되기 이전의 영광을 간직한 듯 위용을 과시한다. 푸른 하늘에 담긴 머릿돌은 소용돌이치는 듯한 구름과 꿈틀대는 용이 어우러진 조각 장식으로 눈길을 끈다.

아주 섬세하고 우아한 묘사가 앙코르와트 유적의 크메르 조각을 떠오르게도 한다. 그곳의 사암보다 훨씬 단단한 화강암에 이토록 세밀한 조각을 한 석공은 아마도 당시 내로라는 고려의 장인이었을 것이다. 받침돌(귀부,龜趺)의 거북머리 역시 매우 높은 수준의 조각 기술을 뽐낸다. 부릅뜬 눈은 맹수의 것과 다를 바 없고 콧구멍에서는 뜨겁고 센 바람이 분출될 것만 같으며 바닥을 꾹 누르고 있는 발톱은 언제라도 박차고 일어나 앞으로 뻗을 기세다.

머릿돌과 받침돌 사이의 비신(碑身)은 2014년 새로 복원된 것이라 이질감이 느껴진다. 본래의 비신은 1915년에 바람에 쓰러져 8개 조각으로 나뉘었고 이는 현재 여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원종대사탑비의 머릿돌. 화려한 조각이 돋보인다.


황제도 큰스님도 사라졌지만 용은 살아있다

비신에는 고려 전기 국사(國師)로 활동한 원종대사 찬유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다. 원종대사는 광종 때 불교 종단의 정비와 사상 통일에 기여했던 스님인데 불교를 통해 민생을 살폈던 광종이 그를 많이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원종대사 입적 후 975년, 그의 행적을 기리는 비를 만들도록 하고 원종이란 시호를 내렸다. 스스로를 ‘황제’로 칭한 광종이 기린 스님, 그리고 그 스님을 모신 곳이 고달사라는 점에서 당시 사찰의 위상과 국교로서 불교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기념비가 있다면 근방에 사리탑도 존재할 터. 고달사지에 국보가 있음을 알고 온 이는 바깥쪽 길을 따라 곧장 우두산 안길로 들어간다. 등산로로 향하는 길을 조금만 걸으면 2기의 부도탑을 만날 수 있다. 그중 낮은 곳에 있는 1기가 보물 7호 원종대사탑이고 원종대사탑에서 계단을 올라 등산로로 이어지는 높은 곳에 있는 다른 1기가 국보 4호 고달사지 승탑이다.

고달사지 승탑은 정확히 누구의 부도탑인지 전하는 기록은 없으나 학계에서는 신라 말 고승으로 고달사를 중창한 원감국사 현욱의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두 탑은 몹시 닮아 있고 일부 학자들은 국보로 지정된 탑이 원종대사탑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고 있어 흥미롭다.

높이 4.3m의 8각 원당형의 부도는 원각대사탑비 못지않게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탑은 전체적으로 장중하고 묵직한데 탑을 이루는 기단, 몸돌, 지붕돌의 면면은 흙으로 빚은 듯 유려하다. 용을 닮은 거북과 거북을 호위하듯 감싼 네 마리의 용, 넘실대는 구름무늬가 돋보이는 기단 중대석과 숨겨진 듯 지붕돌 아랫면에 새겨진 비천은 곱고도 신비롭다.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는 절은 폐사 시기도 알 수 없이 사라졌는데, 돌에 남은 거북과 용, 그리고 비천은 형형하게 존재한다. 이들이 폐사지를 결코 폐허로 만들지 않는다.

/ 출처 중부일보 2021.8 글·사진=유승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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