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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고양 북한산 태고사

by 구석구석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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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태고 보우가 도량을 열고, 조선 후기 북한산성과 함께 승영사찰로 변모

 

[인문기행-경기도의 전통사찰 9]태고 보우의 원융회통(圓融回通) 정신이 깃든 곳, 북한산 태고사

◇고려 말 태고 보우가 도량을 열고, 조선 후기 북한산성과 함께 승영사찰로 변모태고사(太古寺)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北漢山)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한국불교태고종의 종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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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太古寺)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北漢山)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한국불교태고종의 종찰이다. 고려 말기 불교에 대한 폐단을 극복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던 태고 보우가 인접한 중흥사에 주석하면서 개인의 수도처로 1341년에 세운 사찰이다.

창건 후 보우가 5년 동안 머물렀고 중흥사의 동쪽에 위치한 이유로 동암이라 불렀고 1382년 보우가 입적한 이후로는 그의 당호를 따서 태고암으로 고쳐 불렀다. 그러나 이후 조선시대 중기까지의 연혁은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보우가 창건 한 태고암은 고려의 왕조가 멸망하고 거의 폐허로 남아 있다가 1711년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승영사찰로 다시금 변모한다. 당시 팔도도총섭으로 중흥사에 머물렀던 승려 계파 성능이 옛 태고암 자리에 총 131칸으로 중건하여 산성의 수비를 담당시킨 것이다.

이때 태고사(太古寺)로 사액을 다시 걸면서 지금과 같은 이름을 얻었다. 1715년에 작성된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에는 "보국사, 보광사, 용암사, 태고사 4사찰이 이 구역에 속한다"고 기록해 당시 태고사의 역할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태고사전경

태고사는 북한산성 내 사찰에서 유일하게 영조가 하사한 어필을 소장하고, 고종대에는 왕실의 책과 족보를 보관하는 등 왕실의 보장처 역할을 하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승군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세는 급격히 쇠락한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찰령이 제정된 후 30개의 본산이 확정되면서 제1교구인 봉은사의 말사로 소속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을 겪은 전후로는 초가 하나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다.

그러던 1964년 청암스님이 중창불사를 일으키면서 태고사의 법등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사찰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대웅보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건립되고 오늘날의 가람 모습을 형성하였다.

태고사 경내 전경, 京電하이킹, 경선전기, 1937년 출처 : 중부일보

◇불국토 경주 남산에 버금가는 수도권 불교의 성지 북한산에 위치하다


태고사가 자리한 북한산은 오랜 세월동안 형성된 기암괴석들로 강인한 위용을 자랑하며,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리고 가장 높은 세봉우리인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도 삼각산 혹은 화산이라 부르며 신성시했다.

따라서 북한산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불교가 구심점이 되어 변화하는 시대의 정신이 담긴 다양한 층위에 유적과 유물을 남겼다.

568년 신라 진흥왕이 세운 진흥왕 순수비에는 북한산에 살고 있는 불교 도인을 기록하였다. 659년 백제와의 통일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춘랑과 파랑을 위해 세운 장의사나 신라 고승 의상이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후 화엄십찰의 하나로 세운 청담사도 모두 북한산에 위치하였다.

고려시대에 북한산은 삼경 중 하나인 남경에 속하고 왕들의 행차가 끊이지 않으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제8대 임금 현종은 재위에 오르기 전에 대량원군으로 있을 때 천추태후의 위협을 피해 신혈사에 몸을 숨겨 목숨을 구했고, 1010년과 1018년에는 거란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태조의 관을 임시로 옮겼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현릉으로 장례하였다.

제13대 임금 선종도 승가사에 행차하여 재물과 경례를 들였다. 이외에도 고려 초기에 활동한 법상종의 고승인 대지국사 법경도 삼천사에 주석하였고, 고려 말 태고 보우도 중흥사에 머물렀다.

삼각산

조선시대에도 북한산은 오악 가운데 하나인 중악으로 불리며 국가적으로 신성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왕실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사세를 유지하였다. 진관사는 매년 수륙재를 설행하였고, 그 유명한 문정왕후는 아들의 무병과 장수, 그리고 자손의 번영을 위해 향림사에 나한탱화 200여 점을 봉안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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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북한산은 역사적으로 왕실과 귀족 등 지배계층을 위한 불교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를 증명하듯이 마치 경주의 남산처럼 북한산도 불교적 색채가 가득하다. 현재 북한산 봉우리 중 불교적 이름이 남아 있는 봉우리는 영취봉, 석가봉, 미륵봉, 문수봉, 보현봉, 나한봉, 의상봉, 원효봉 등 8개이다. 이 봉우리들은 수도권의 유일한 불국토였던 북한산을 상징하는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태고 보우의 원융회통 가르침이 시작된 곳,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성지로 자리 잡다


고려 말 고승인 태고 보우는 1301년 9월 21일 출생하였다. 홍주 출신으로, 부친의 성씨는 홍씨, 모친의 성씨는 정씨로 알려져 있다. 그는 13세에 출가하여 26세 때 화엄선에 합격하였고, 경전의 의미 등을 탐구하였다.

그리고 양평 용문산의 상원암에 들어가 관음보살 앞에서 12대원을 서원하였으며, 33세에는 감로사에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고 게송 8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1341년 고려 충혜왕이 41세의 보우에게 삼각산 중흥사에 주석토록 하자 개인의 수행을 위해 중흥사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5년 동안 머물렀고, 46세인 1346년 원나라에 유학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알하였다. 당시 보우는 순제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아 금란가사와 침향목으로 만든 불자 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특히, 보우는 평생 교와 선을 융합하여 원융회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인물로 주목된다. 그는 공민왕 5년인 1356년 왕사에 책봉되자 국왕에게 광명사에 원융부를 설치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원융부는 ‘구산원융 오교홍통’을 말하는 것이었다. 즉, 당시 사상적으로 분열ㆍ대립된 불교 종파였던 9산과 5교를 그는 임제선에 의한 9산선종으로 통일하여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현재 조계종에서는 태고 보우를 종조 또는 중흥조로 인식한다.

태고사 삽도(불교창간호, 1924년) 출처 : 중부일보

보우는 신돈의 미움을 받기도 하였으나, 공민왕과 우왕은 그를 높이 존경하여 16년 동안 왕사, 12년 동안 국사를 역임토록 하였다. 보우는 1381년 봄에 양산사로 거처를 옮겼다가, 1382년 여름에 소설암으로 다시 옮겨 머물게 된다. 그러다가 같은 해 12월 미질에 걸렸고, 12월 23일 문도들을 불러놓고 마지막 임종게를 설하고 세수 82세 법랍 69세 나이로 입적하였다.

이때 국왕은 그의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한다. 태고 보우의 시신을 다비한 후 사리 100과를 국왕에게 올리자 시호를 ‘원증’, 탑호를 ‘보월승공’으로 내렸다. 문도들은 그와 인연이 깊은 태고사를 비롯해 양산사, 사나사, 소설암 등에 분사리하여 석탑, 승탑 등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근대기 조선 불교계의 대표적 잡지인 ‘불교’ 창간호에서 안진호스님은 ‘태고암배관기’에서 보우의 승탑, 태고암 전경, 태고암가 등을 소개하면서 한국 불교계 전통에서 그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시키기도 하였다.

태고사 원증국사탑비전 전경 출처 : 중부일보

◇태고 보우가 남긴 흔적 원증국사탑비와 탑, 그리고 2022년 부처님 오신날


현재 태고사 경내에는 창건주 태고 보우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탑비와 그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 남아 있다.

원증국사탑비는 태고사 경내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 편에 건립되어 있는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이 탑비는 귀부(비석 하단의 용 또는 거북형태의 석조), 비신(비석의 몸통), 이수(용의 형상을 한 비신의 머릿돌)를 모두 갖추었으나, 각각 다른 돌을 치석하여 짜 맞추었다.

이 작품은 귀부에 대한 전체적인 평면이 사각형을 이루고, 좌우 너비에 비해 높이가 낮아 귀부가 지대석에 달라붙어 움츠린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수도 구름과 용이 평면적으로 조각되어 양식의 간략화 및 형식화가 진행되었다.

비는 원증국사가 입적한 3년 뒤인 1385년 세워졌으며, 글은 고려 후기의 문신 이색이 지었고 글씨는 문신이자 명필로 이름을 떨친 권주가 적었다. 원증국사탑비는 비신과 귀부로 구성된 고려후기 전형적인 탑비이며, 전체높이가 340㎝로 그 규모가 매우 크다. 한편, 비신 뒷면에 있는 음기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당시에 관직명이 기록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에 반해 원증국사탑은 태고사 북편으로 형성된 낮은 능선 상에 세워져 있다. 현재 원증국사탑비와 떨어진 탑전에 따로 모셔져 있는데, 오래 전에 도괴되어 무너져있던 것을 1980년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원증국사탑은 전체높이가 410㎝이며, 탑신폭이 87.5㎝로 그 규모는 매우 큰 편이다. 장대석을 이용해 만든 지대석 위에 기단을 비롯해 탑신과 상륜 등의 모든 부재가 갖추어져 있는데, 기단에 있는 사각형의 하대석과 원형의 탑신석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부재가 팔각형을 이루고 있어 고려시대에 유행하는 팔각원당형의 승탑 양식을 잘 따른다.

유승혜 여행작가

이 작품은 기단부터 상륜까지 사각, 팔각, 원형 등 다양한 형태의 부재들이 섞여 있어,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일관성이 없는 편이지만, 여러 단면의 부재들이 승탑의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후기에 건립된 승탑 중에서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건립 시기는 태고사 경내에 있는 원증국사탑비가 입적한 지 3년 후인 1385년에 세워졌으므로 늦어도 1385년 이전에는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몇 년간 우리들을 괴롭혀 왔던 코로나19가 2급 감염병으로 햐향되고, 사회 곳곳에서는 일상회복을 준비 중이다. 어김없이 올해에도 봄날은 왔다. 공교롭게도 다음 주면 부처님 오신 날이다. 태고사가 위치한 북한산은 수도권에서도 남녀노소가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따라서 이번 주말에는 수도권의 유일한 불국토이자 고승 태고 보우의 정신과 흔적이 남겨져 있는 북한산 태고사를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 출처 : 중부일보 - 글·사진=김수현 고양시청 학예연구사

 

 

 

고양 북한동 상운사 노적사 무량사 국녕사 태고사 북한산성

덕양구 북한동 370번지 상운사 02-387-4731 북한산성 내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이다. ‘상서로운 구름 속의 사찰’이란 이름의 상운사는 북한산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로 원효봉,

chooga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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