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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도

파주 용미리 용암사

by 구석구석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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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가는 길, 의주대로의 랜드마크

조선시대, 한양과 의주를 잇는 의주대로는 중국으로 향하는 가장 대중적인 길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사신, 학자, 상인들이 이 길을 오가며 수많은 문물과 물자, 지식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한양과 전국 각지를 잇던 여러 갈래의 경기옛길 중에서도 한양 돈의문을 출발해 고양, 파주와 북녘을 거쳐 연경(북경)까지 연결된 의주대로는 ‘글로벌 로드’로써 조정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시대 옛길을 기록한 <도로고>, <증보문헌비고>, <대동지지> 등 여러 고문헌은 의주대로를 주요 교역로로 꼽는다. <열하일기>의 연암 박지원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 김대건도 모두 이 길을 걸어 국경을 넘었다.

오늘날 이 의주대로는 ‘역사문화탐방로 경기옛길’의 ‘경기 의주길’로 정비되어 많은 이들이 걷는다. 비록 분단으로 임진강 너머로는 갈 수 없고, 차도로 인해 우회하는 구간이 제법 있지만 옛길의 흔적을 경험하며 걷기 좋다.

의주길 총 구간 52.7km, 5개 코스 중 중간 코스에 해당하는 제3길 쌍미륵길 위에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쌍미륵, 바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다. 높이 17m에 달하는 한 쌍의 거불석은 길을 오가는 옛 사람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했다.

파주 광탄면 장지산 자락에 자리한 미륵불은 멀리서도 잘 보일만큼 웅대하다. 여름에는 수풀이 우거져 조금 가려져 있고 겨울에는 형체가 완전히 드러나 보인다. 지나가던 길에도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게 되는 존재감이다. 큰 석불이 2구나, 게다가 커다란 모자까지 쓰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 사연을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세워진 대웅보전과 최근에 세워진 두 기의 석탑. 출처 : 중부일보


왕자를 내려준 장지산 돌미륵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용암사로 들어서야 만날 수 있다. 석불이 있었으므로 절이 들어섰는지 절이 있어 석불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사찰은 마애이불입상이 세워진 시기에 창건되었으리라 막연하게 추측된다.

두 석불은 파주시 광탄면 일대를 내려다보는 장지산 자락에 자리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13대 임금 선종 때 마애이불입상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선종은 자식이 생기지 않아 고민이 많았는데 이때 셋째 부인인 원신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틈에 사는 사람인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꿈 얘길 전해들은 왕은 장지산 바위에 마애이불을 새기라 명했고 이후 불상에 불공을 드리니 원신궁주가 왕자 한산후를 낳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전설 외에는 기록이 없어 창건시기를 특정할 수 없다. 근대에 들어와서야 1936년 파주의 유지들이 절을 새로 짓고 1954년에 이승만 전대통령이 칠층석탑과 동자상 제막식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대웅전은 1979년에, 그 외 요사채와 범종각 등의 전각은 1980년대 초에 지었다. 그러나 대웅전은 화재로 소실되어 2004년, 대웅보전으로 새로이 불사를 마쳤다. 

솔숲 사이로 보이는 두 마애불의 뒷모습. 머리 부분을 따로 올렸음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아담한 절집 속 웅대한 석불 2구

사찰은 78번 국도변에 있어 돌계단을 조금만 오르면 곧장 경내로 진입할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아담한 가람이 보인다. 의주길을 걸어 절에 들른 이들에게는 진입로가 길지 않아 반가울 테고, 그저 절을 목적지로 온 이들에게는 산사를 걷는 고즈넉함이 없으니 아쉬울 테다.

절집은 작고 전각들은 대부분 최근에 지어 볼거리가 많지는 않다. 대웅보전 앞 절마당의 두 탑은 2004년에 대웅보전과 함께 세운 오층석탑, 지난해 불사한 다보탑이다. 불국사 다보탑을 그대로 본떴다. 대웅보전을 바라보고 오른편에는 종무소, 왼편에는 수각과 미륵전, 삼성각이 자리한다.

한 건물에 미륵전과 삼성각이 방 하나씩을 차지한 구조라 전각 양쪽에 두 개의 현판이 달려 있다. 이 건물 옆에 이승만 전대통령이 절에 방문했을 때 불사했다는 동자상과 칠층석탑이 있다. 쓰윽 한번 둘러보면 사찰 구경은 금세 끝난다. 가람 안에선 이곳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다.

수각 옆 돌계단을 올라야 비로소 보물 93호의 두 석조보살님을 만날 수 있다. 마애불로 향하는 계단의 양쪽 가장자리에는 둥근 모자(원형 보개)를 쓴 꼬마 좌불상과 각진 사각 모자(방형 보개)를 쓴 꼬마 좌불상이 번갈아가며 도열해 있다. 마애이불입상의 머리 부분을 모각한 작은 돌부처들이 외람되지만 참으로 귀엽다.
 

쌍미륵이라 불리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몸통은 자연암석, 머리는 따로 조각해 올린 병립형 석불상이다.


자연암석을 몸통으로 머리는 따로 올린 병립 석불

가까이 마주한 두 돌미륵은 더욱 거대하다. 마애불 앞 공간이 넉넉지 않아서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뒤로 꺾어야 하고 바깥쪽 울타리에 바짝 붙어서 바라봐도 전체가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감상은 수월하다. 조각이 복잡하거나 돌이 마멸되어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봐야할 수고로움이 없다. 풍채가 좋은 만큼 얼굴의 이목구비와 옷의 주름, 매듭 등도 큼직큼직하고 선명하다. 호방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잘 왔구만!"하고 목청 좋게 시원한 인사를 건네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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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석불입상 모두 목 아래로는 자연 암석이고 얼굴과 돌갓은 다른 데서 바위를 조각해 올린 병립상이다. 불상 뒤편에서 보면 그 경계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미륵불이 그렇듯 얼굴과 몸의 비례가 잘 맞진 않아도 토속적인 느낌과 그 나름의 조화로움이 있어 이질감이 없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으로 향하는 돌계단 양쪽에 도열한 꼬마좌불상이 인상적이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의 눈길이 두 돌미륵이 머리에 쓴 서로 다른 형태의 모자와 역시 다른 형태의 수인에 갈 것 같다. 키가 좀 더 큰 불상은 연꽃(혹은 용화수)을 들었고 다른 쪽 불상은 합장을 하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연꽃을 든 불상이 남성, 합장한 불상이 여성이라고 한다.

두 남녀 미륵불이 나란히 어깨를 대고 평온하게 마을을 내려다보는 형상이니 그간 숱한 사람들에게 ‘보기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특히 몸체가 자연암석임을 감안할 때 조각가의 솜씨에 감탄이 나온다. 바위가 자연적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꽃줄기를 잡기 위해 들어 올린 팔과 합장한 손으로 묘사한 부분은 센스가 돋보인다. 

흔히 원형 보개를 쓴 좌측 불상을 남성, 사각 보개를 쓴 우측 불상을 여성으로 칭한다.


석불이 쓴 서로 다른 스타일의 모자

불상이 갓처럼 쓰고 있는 모자는 ‘보개(寶蓋)’라고 부른다. 머리 위에 보개를 쓴 불상은 전국적으로 80여구 정도 있는데 팔공산 갓바위 불상,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보개를 쓴 불상은 고려 광종 때 집중적으로 많이 세워지는데 그 이유를 보개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광종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호족 세력을 경계하고 왕권을 강화했던 군주다. 그는 자신에게 반발할 여지가 있는 호족들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사찰과 산성을 중창 및 개축한다. 이때 다른 지역에선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양식의 미륵 불상들이 등장한다.

바로 황제가 쓰는 면류관과 비슷한 사각 형태의 보개를 쓴 불상이다. 광종은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쓴 거대 석불들을 통해 황제의 권위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선포’했던 셈이다. 일종의 황즉불 사상이라 봐야 할 것이다. 면류관형 보개 착용 불상은 고려 황제의 영향력이 유지되던 11세기까지 제작되다가 거란(요)의 간섭이 심해지고 여러 종파로 불교가 갈라지면서 점차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말 그 이후에는 단 한 구도 보개를 쓴 거불이 세워지지 않았을까?

용암사 전경. 대부분의 전각과 석탑은 1980년대 이후 세워졌다.


고려 선종이냐, 조선 세조냐

흥미롭게도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고려시대가 아니라 조선 초기 때 만들어졌다는 연구가 학계에선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키 큰 불상이 쓴 보개가 원나라 황제나 귀족이 착용하던 원정모를 닮았고, 황제가 쓰던 면류관형 보개를 키 작은 불상이 쓴 부분도 아리송하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향우측 바위에 성화칠년칠월(成化七年七月)로 시작하는 발원문이 있는데 이는 1471년 성종 2년 때를 뜻한다. 즉 한명회, 함양군, 심장기 등 세조 측근이 세조를 추도하고 성종과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마애불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마침 파주 용미리는 정희왕후의 고향이며 한명회의 딸인 예종의 비 장순왕후 한씨와 성종의 비인 공혜왕후 한 씨의 무덤이 가까운 파주 삼릉에 있다. 더구나 세조는 불교를 숭상했던 왕이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주목할 만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마애불 설화 속의 고려 선종과 원신궁주의 아들 한산후는 훗날 작은아버지 숙종에 의해 유배 보내졌다. 선종의 동생인 숙종은 조카이자 한산후의 이복형인 헌종을 내쫓고 왕위를 꿰찬 인물이다.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과 똑 닮았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으로 향하는 돌계단 양쪽기단에 도열한 꼬마좌불상이 인상적이다.


조선 초기에 조성된 불상이 맞다면 거대 미륵불은 대부분 고려 때 만들어졌다는 정설의 견고함을 깨고 예외가 생긴다. 또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다 바뀌어야 할 것이다. 추측으로 머물지 판도를 뒤집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언제 세워졌든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오가는 이방인들의 길잡이로 긴 세월 존재해왔다. 어느날 갑자기 산이 통째로 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온화한 표정으로 속세를 굽어 살펴주었으면 한다.


/ 출처 : 중부일보 2021  글·사진 유승혜 여행작가

 

 

파주 78번국지도-용미리 용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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