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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도

파주 78번국지도-용미리 용암사

by 구석구석 2008.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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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찰 제 87호(1988.10.25) 용암사

장지산 기슭에 있는 용암사는 쌍석불사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절 위에 있는 천연 바위에 새겨진 두개의 석불입상(보물 제 93호)이 있기 때문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선종(1084-1094년)의 후궁인 원신궁주가 아들을 낳기 위해 지금의 용암사 자리에 석불입상 2구를 만들었다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가람이 형성된 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보물 제93호로 지정된 용미리석불입상이 11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 시기부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그에 관한 기록이나 유구 및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가람의 오른쪽으로 대웅전이 비교적 넓은 터에 남향해 있는데 199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최근 중수 되었다. 석불이 있는 기슭으로 미륵전이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봉덕사 종을 본딴 범종(높이 187cm, 鐘口 115cm)을 안치한 범종각이 위치하고 있다.

  

  보물 제93호 용미리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 광탄면 용미리 산8)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자락에 위치한 용암사 경내 좌측 상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불입상은 전체높이 17.4m로 천연 바위벽을 이용해 그 위에 목, 머리,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놓은 2구(軀) 의 거대한 불상으로 토속적인 맛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위압감은 있으나 신체 비율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서투른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의 둥근갓을 쓴 불상은 사각형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 안동마애석불과 비슷하다.


목은 원통형이며 당당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지만 바위의 제약으로 목과 가슴이 혼연일체 되지 못하고 있다. 몸체는 법의(法衣)로 감싸고 있으며 양쪽으로 내려진 옷자락은 세로선 길이로 무늬를 나타냈으며 가운데를 V자형 선으로 조각하였다. 법의 윗부분은 상당히 유연하여 가슴의 띠매듭이 장식적인 효과를 주고 있으나 아랫부분은 옷자락을 나타내는 선만 조각했을 뿐이어서 바위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다.


양손은 가슴께에 들어올려 연꽃을 잡고 있는데 관촉사 미륵보살상, 대조사 미륵보살상처럼 미륵보살상이 아닌가 추측케 해준다. 오른쪽 사각형의 갓을 쓴 불상(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만 다를 뿐 신체 다른 부위의 조각수법은 왼쪽 불상과 비슷하다.

 
구전에 의하면 원립불은 남상, 방립불은 여상으로 전하는데 고려시대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까지 맞이했으나 여전히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를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밤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하고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고하자, 왕은 곧 사람을 장 지산에 보냈는데 장지산에 다녀온 사람이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다. 그러자 그 해에 왕자 한산후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설은 도처에 남아있는 기자전설에 불과하지만 구체적인 왕명이 나와 있어 불상의 조성연대를 짐작케 해준다.


불상의 옆쪽 벽면에는 200여 자의 명문이 희미하게 조각돼 있는데 마멸이 심해 판독은 어려우나 이러한 구전 내용일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도 이곳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많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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