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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남도

거창 황산리 수승대 정온선생고택 거창국제연극제

by 구석구석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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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경남의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 거창군은 소백산맥의 준령을 경계로 경상북도와 전라북도가 접경하고 있는 진안고원에 이어져 있는 산악지대다.

군민의 소득증대를 목표로 새마을사업이 진행되던 1972년부터 거창군의 근대화는 시작되었으며, 거창-대구간 도로가 포장되면서 2시간 30분의 거리로 단축되었고, 특히 88고속도로의 건설과 얼마 전 국토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의 개통은 거창과 주변 도시들과의 간격을 더욱 좁혀 찾아가는 길은 한결 쉬워졌다.

거창에서 서북으로 16km 떨어진 곳. 덕유산 줄기 호음산과 금원산, 성령 등에 에워싸여 있는 「수승대」는 단연 거창지역 제일의 명소로 계곡의 입구는 노송이 그득하고 맑은 물과 회색빛 암반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황산리 원학계곡의 수승대는 명승53호이다.

옛날 삼국시대 백제에 속해 있을 때 사신들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라 하였다. 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먹구름이 하늘에 무겁게 걸려 있고, 살짝 열린 구름 사이로 바쁘게 햇빛이 쏟아진다. 백두대간의 길목인 남덕유산 고갯마루에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조화를 부리며 산자락을 이리저리 나는 모습은 산풍경을 신비롭게 그리고 있다.

10여년 만에 다시 찾은 수승대는 잘 정리된 넓은 주차장과 함께, 깨끗한 모습으로 산뜻하게 변해 있었다. 예전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며 고택에서 연극을 보았던 곳이기에 감회가 새롭다.

전에 있던 수승대호텔이 지금도 공원의 중심에서 등대처럼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큰 은행나무 아래로 민박집들이 시골 마을처럼 옹기종기 모여 손님 맞을 준비가 한창이다.

이곳 수승대는 70미터 정도의 넓은 하천에 맑은 물이 상시 흐르며, 하천 주변에는 잘 갖추어진 야영장과 나무 숲길이 하천을 따라 길게 나 있다. 하천을 따라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가 냇물을 건너려는 듯 목을 길게 빼고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경남 거창의 으뜸 명소로 꼽히는 수승대. 물 위에 떠 있는 바위가 거북바위다. 바위는 옛사람들의 시문과 이름으로 뒤덮여 있다. 거북바위 뒤쪽에 굽은 나무로 문루의 기둥을 삼은 구연서원이 있다. 문화일보

거북바위 위에는 작은 소나무들이 병정처럼 버티고 서 있고, 그 밑으로는 맑은 물이 바위 주변으로 휘감고 시원스레 흐르고 있다. 언뜻 보면 거북이가 수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바로 이곳이 거북바위가 있다 하여 구연대 또는 암구대라 불리는 수승대의 명소다.

이 암구대 주변에는 넓적한 바위와 계곡을 건너는 예쁜 구연교 다리가 있고, 요수 신씨 선비가 노닐던 정자로 알려진 요수정(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23호)이 있다. 넓은 바위와 암구대 사이로 푸른 빛의 맑은 물이 흐르고, 암구대 앞에는 소나무 섬이 있는데 그 풍경이 신선대에 앉아 있는 착각이 든다.

암구대에는 퇴계 이황이 쓴 시를 비롯하여 많은 한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 한 자 한 자에 정성이 깃들어 있는 글씨다. 어떻게 큰 바위에 저토록 글씨를 새겨넣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곳 수승대의 원래 이름은 수송대였다.

거북바위에 퇴계선생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연유를 살펴보면 백제가 멸망할 무렵 신라로 사신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서 송별회를 하였는데 거의 돌아오는 사신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사신을 보낼 때마다 근심걱정을 하며 보내게 되었다 하여 근심 '수(愁)', 보낼 '송(送)' 자를 써서 수송대라 하였다. 이후 퇴계 이황이 주변에서 머무르며 명승지를 찾는다는 뜻의 수승대로 이름을 새롭게 지었다 한다.

요수신씨 고택의 모습

수승대 암구연에서 물에 발을 담그고 북쪽을 바라보면 멀리 높이 솟아 있는 덕유산자락이 보인다. 30분 정도 북쪽으로 차를 달려가면 월송 계곡과 송계사가 있고, 주변에 1000여미터의 높은 금원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등산하기에 아주 적당하다.

이곳 수승대는 넓은 바위와 기암괴석, 소나무숲 그리고 푸르고 맑은 물로 가족들과 휴양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는 사계절 썰매장이 있고 뱀사골 못지않게 맑고 푸른 계곡이 있으며, 거창의 국제 연극제가 항시 열리기 때문에 가족휴양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그리고 옛날 요수신씨가 머문 고택이 고풍스럽게 잘 보존되어 있고, 원각사라는 조그마한 절이 있어 산책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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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휴가철 7월 말에서 8월 말까지 매일 열리는데, 노천극장이 새롭게 지어져 멋진 공간에서 연극관람을 하며 즐거운 저녁 시간을 풍성하게 보낼 수 있다.

이곳에서의 숙박은 주로 민박이며 호텔과 펜션이 있는데 아직은 규모가 작은 편이다. 이곳은 야영장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텐트를 치고 물가 주변에서 음식을 직접 해먹으며 야영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맑고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수승대

저녁이 되면 주변에서 야영하는 이들의 구수한 찌개와 맛있는 불고기 냄새로 수승대에서 음식축제를 여는 듯 맛과 멋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이른 아침이면 까치들이 큰 은행나무에 올라앉아 떠들어대며 야영객들의 아침잠을 깨우는데, 꼬마들이 물로 제일 먼저 뛰어들며 물장구치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낮에 시원한 물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영을 하며 마음껏 놀고 저녁에는 연극을 감상하며 즐겁고 풍성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곳 거창군 위천면에 있는 수승대는 우리나라 어느 곳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새로운 휴식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나라 각 지방에도 이와 같이 볼거리 즐길 거리로 내용 있고 감동을 주는 휴양지가 많았으면 좋겠다.

수승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위치한 수승대는 경관이 빼어나고 퇴계 이황 선생의 개명시와 갈천 임훈 선생의 화답시가 있을뿐만 아니라 양쪽에 관수루(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와 요수정(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23호) 등 유적이 잘 보존돼 있다.

문화재청은 2006년 전국의 경관 좋은 곳에 대해 정밀 학술조사를 실시하면서 거창의 수승대와 사선대를 명승 후보지로 선정한뒤 이번에 수승대를 명승으로 지정했다.

수승대에서 위천의 물 건너편에는 신권이 세운 정자 요수정이 있다. 요수정 뒤편에는 요수정의 유래를 적은 돌비석이 있다. 1966년에 신권의 제자와 후손이 세운 기념비다. 이 비석이 세워진 지 46년이 지난 뒤에 요수정을 지켰다. 2012년 9월 한반도를 관통한 초강력 태풍;산바가 지나가면서 뿌리째 뽑힌 200년생 소나무 거목이 요수정을 덮쳤는데, 비석이 넘어지는 소나무를 막아서 정자는 털끝만큼도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 제자와 후손의 정성이 재앙을 막았다;는 주민들의 해석이 견강부회처럼 느껴지지만, 넘어진 소나무를 비석이 막아선 사진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정자 옆에 소나무가 쓰러진 장면의 사진을 세워두었는데, 가만히 보면 아닌 게 아니라 어떤 영험함이 정자를 지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문화일보

■ 수승대가 있는 월성계곡

월성계곡은 남덕유산(1507m) 동쪽 삿갓샘에 뿌리를 둔 물줄기가 황점마을에서 출발해 월성천을 지나 용암정까지 흐른다. 13㎞를 흐르는 물길은 폭은 그렇게 넓지 않지만 산이 깊어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 땅속에 숨은 화강암이 하얀 잇몸을 드러낸 듯한 너럭바위가 곳곳에 장관이다.

높은 지대와 아름다운 산세 덕분에 일명 '하늘 마을'로 통하는 월성계곡 주변은 수많은 방갈로와 펜션, 캠핑장들이 여행객의 편의를 제공한다. MBC 예능프로 '아빠 어디가'에 방영된 후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인근에 있는 월성우주창의과학관은 가족 여행객의 체험 학습에 안성맞춤이다. 

ㅁ 거창국제연극제 www.kift.or.kr 

경남 거창의 수승대 일대에서 열리는 거창국제연극제 중 무지개극장 앞 풍경. 한쪽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공연을 볼 수 있다./거창국제연극제

퇴계 이황이 풍광을 보고 근심을 잊었다는 수승대는 거창국제연극제의 자랑이다. 2009년 21회째인 이 축제는 물과 숲, 밤하늘의 별빛까지 재료로 쓴다. 수승대 주변에 세운 8개의 야외무대 중 무지개극장은 찬 계곡물이 객석이다. 물에 몸 담그고 무료 공연을 보는 재미가 그만이다. 서원(書院) 안에 지은 돌담극장도 운치가 있다.

거창국제연극제 사무국은 "낮에는 물놀이나 관광을 하고, 밤에는 공연을 볼 수 있는 자연 속 축제"라고 했다. 거창은 덕유산·지리산·가야산에 둘러싸여 있고 해인사·월성계곡 등이 가깝다. 055)943-4152~3

ㅁ 황산마을 돌담길

수승대 매표소 맞은편 황산전통가옥 민박마을 내에 위치. 거창읍에서 20분 소요

거창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에 황고(黃皐) 신수이가 입향하면서 번성한 거창신씨 씨족마을로, 마을의 생성은 1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 영조 이후 인물이 연이어 배출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폭 5m 이상, 높이 15m 이상의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이 고목을 안정좌(安亭座)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은 대체로 평탄하며 마을 동측에 흐르는 호음천을 중심으로 큰땀과 동촌으로 구분되어 있다. 마을 내 주택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한말과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며 규모와 형식면에서 월등함을 보여주는 시도민속자료 제17호 ‘거창 황산마을 신씨고가’ 등의 지정문화재는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을 전체는 약 50여호로 거의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으며 이렇게 한 마을 전체가 모두 기와집으로 무리지어 있는 것은 이른바 씨족부농촌으로 소작마을을 별도로 두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개 토석담으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진흙을 사춤하지 않고 대부분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雨水)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석으로 메쌓기 한 위에는 하부의 자연석보다 작은 20㎝ 내외의 돌을 담 안팎에 사용하여 진흙과 교대로 쌓아 올렸고 대부분 담장 상부에는 한식기와를 이었으며 또한 근년에 쌓은 담장은 기존 담장과 달리 엇쌓기를 하였다.

마을의 시한당 앞 연못은 일반적인 한국 전통의 연못양식인 방지원도형이 아닌 원지방도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특하다. 전반적으로 전통고가와 어우러진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ㅁ 황산고가 민박마을

덕유산과 금원산 자락을 타고 내려앉아 100여년의 세월을 간직한채 이어져 내려오는 거창 신씨 집성촌인 황산마을은 수승대관광지를 발 아래두고 고향의 향기와 체취를 느끼며, 문화와 자연이 살아숨쉬는 곳으로, 시원하게 트인 고색창연한 대청마루, 높직한 솟을대문위에서 우는 까치소리에 새벽잠을 깨면, 각별한 추억을 한아름 담아올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황산마을은 100여년 이상된 고택들로 이루어진 전통민박촌으로 조용한 사색이나 작품활동을 하시는분, 대학교 M.T 동아리모임에 그만이며, 가족과 함께라면 더욱 좋다. 황산마을은 훈훈 한 시골의 인심과 아름다운 자연을 접할수 있는 곳이다.

ㅁ 황산리 487번지 신씨고가 민속자료 제 17호 / 1994년 7월 4일 지정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요수 신권이 이곳에 들어와 산 이 후, 이 마을은 거창 신씨의 집성촌으로 번창해 왔다.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이 집은 1927년에 지어졌다. 당시 이 집의 주인은 큰 지주였다고 하는데,이 집은 그러한 집주인의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경남 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양식인 홑집 대신에 겹집의 팔작지붕으로 지어 집주인의 부와 권위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사랑채는 궁궐이나 절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런 장식물로 꾸몄다. 잘 다듬은 커다란 돌로 쌓은 받침돌과 기둥을 받친 주춧돌 위에 설치한 기둥자리 등은 조선 중기 이전에는 벼슬이 높은 양반 집안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 밖에 안채와 그 건물을 둘러싼 크고 화려하게 지은 부속건물들도 집주인의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안채의 늘어난 방 수, 좁아진 대청, 집안에 들어선 화장실 등은 전통의 격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20세기 초 실용성을 중시 하던 가옥의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에 지어진 이 가옥은 격식의 해체, 실용성의 증가, 심화된 경제적 계층화 등 복합적인 사회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겠다.

ㅁ 위천면 강천리 50-1 정온선생고택 민속자료 제 205호 / 1984년 12월 24일 지정

위천면 소재지 면사무소를 지나서 200m 지점, 수승대 가는 다리직전 좌측편 강동마을입구

이 집은 정온(1569~1632)선생의 생가로 그의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 채를 들어서면 남향한 사랑채가 있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 나온 내루(內樓)부분이 간반(間半) 규모이다.

이 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 줄로 된 겹집이며 전퇴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에 눈섭지붕이 따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안채도 남향인데,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전·후퇴 있는 두 줄의 겹집으로 사랑채의 평면구성과 함께 주목된다.

거창은 남쪽지방인데도 북쪽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안채나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남쪽지방의 특색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 좌측의 중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중문채는 3칸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네모의 안뜰인데,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내정 좌우로 각각 부속건물이 있다. 서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큼직한 곡간이 있다. 곡간 뒤편에는 화장실이 있다.

마당 동쪽에는 서향한 뜰 아래채가 있는데 4칸 집이다. 사당은 안채의 향원에 삼문을 짓고 그안에 있는데, 전퇴가 있는 3칸 집이다. 규모가 큰 기와집들이 부재도 넉넉하면서 장대하고 훤칠해 보인다. 학술적 가치는 집 전체의 평면구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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