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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서초 염곡동 구룡산 헌인릉

by 구석구석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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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산九龍山은 서울 서초구 염곡동에 있는 306m산.

산의 이름은 옛날 임신한 여인이 용 열 마리가 승천하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한 마리가 떨어져 죽고 아홉 마리만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붙여졌다.

신갈나무, 리기다소나무, 아카시아, 현사시나무 등이 산재해 있으며 희귀한'물박달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껍질이 종잇장처럼 너덜너덜 벗겨지는 특징이 있으며 한국 전역에서 자랄 수는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높거나 험하지 않아 부담없는 산행이나 아침운동을 즐기기에 적당한 산이다. 양재 사거리에서 성남 방향으로 1.5km 떨어진 염곡 사거리 동쪽 능선 끝에서 올라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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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는 서초동과 도곡동 일대가 내려다 보이며 산행은 2시간이면 마칠 수 있다.

포이와 양재 지역에서 가깝게 갈 수 있는 부담없는 산이다. 산 높이가 약 300m 정도의 야산에 불과할지 모르나 친지 가족과 함께 부담없이 하는 산행 코스로는 제격이며 아침 일찍 운동을 즐기기에도 제격인 산이라 할 수 있다.

 

국수봉이라고도 불렸던 구룡산은 옛날 임신한 여인이 용 10마리가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 에 한 마리가 떨어져 죽고 9마리만 하늘로 올라가 구룡산이라 불리웠다는 전설이 있다. 구룡산은 서울시의 남쪽 경계에서 약간 동쪽에 치우쳐져 있고 특히, 희귀한 "물박달나무"가 자라고 있어 도시림의 높은 잠재성을 보이고 있다.

 

산행은 양재 사거리에서 남쪽으로(성남 방향) 1.5km쯤 더 나간 염곡 사거리의 동쪽 능선 끝에서 바로 올라가야 한다.

굳이 오름길을 찾을 필요없이, 능선을 향해 오르면 오솔길이 능선과 이어진다. 능선길은 만만찮게 경사를 높여주고 10분쯤 후부터는 한 키 정도의 소나무들이 들어찬 길이 나오며 마고 앞에 암봉이 나타난다.

한 차례 급경사를 오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이곳이 283봉이라 하며, 내려다 보면 약 10m쯤의 절벽이 있고 그 뒤로 서초동과 도곡동이 마치 남산에서 시가지를 내려다 보던 옛 기분을 재현시켜 준다.

계속하여 약간 내려가는 듯 하다가 편편한 능선길로 비스듬히 올라서게 되고 비슷한 높이의 등성이가 두세 개 연결된다. 그 중 높은 봉우리로 올라서면 300봉에 다다르게 된다.

하산길은 약간 오른쪽으로 내려가다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서야 하며 10분 쯤 내려가면 헌인능 입구에 이르고, 왼쪽(북) 아래로 내려가면 개포동이다.

1코스
3호선수서역⇒대모산동쪽끝능선⇒뱀골마을(토속마을)능선⇒일원동 뒷산능선⇒대모산 정상⇒태종왕릉(헌인릉)⇒구룡산⇒구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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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릉
조선 3대 태종(1367~1422)과 원비 원경왕후(1365~1420) 민씨의 능이다.

 

헌릉은 동원이봉의 쌍릉으로, 앞쪽에서 보아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 인릉
조선 23대 순조(1790~1834)와 비 순원왕후(1789~ 1857) 김씨의 합장릉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외척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의 문란, 매관매직 성행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사회가 혼란해졌고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각종 민란이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 탄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인릉

태종과 원경왕후의 쌍릉인 헌릉 서쪽 언덕에는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의 합장릉인 인릉이 자리 잡고 있다. 헌릉과 마찬가지로 인릉은 우회 관람로를 통해 능침 근처까지 올라갈 수 있다. 부분적으로나마 석물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선왕릉 중 하나다.

인릉

순조의 아버지 정조는 세손 시절 세손빈으로 맞아들인 정비 효의왕후 김씨 외에 의빈 성씨,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 등 네 명의 후궁을 뒀다.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홍국영의 누이동생으로 첫 번째 간택 후궁이었던 원빈 홍씨는 자식 없이 일찍 죽었다. 두 번째 간택 후궁 화빈 윤씨도 딸을 하나 낳았으나 어려서 죽었다.

정조가 가장 총애했던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를 낳았다. 지난해 겨울 인기리에 방영된 ‘옷소매 붉은 끝동’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정조와 후궁 의빈 성씨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었다. 드라마의 여주인공 ‘성가(成哥) 덕임’은 ‘궁인 성씨’로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1782년(정조 6) 궁인 성씨가 정조의 첫아들(문효세자)을 낳았다는 기록이다. 

정조는 성씨가 낳은 아들을 두 달여 만에 원자로 삼고, 2년도 채 안 돼 1784년(정조 8)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세자는 1786년(정조 10) 홍역에 걸려 겨우 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자의 시호는 온효(溫孝)로 정했으나 며칠 뒤 문효(文孝)로 고쳤다. 문효세자는 그해 윤7월 효창묘(현 효창공원 자리)에 장사지냈다. 

아들 문효세자를 떠나보내고 두 달 만에 의빈 성씨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서른네 살이었고, 셋째 아이를 임신한 만삭의 몸이었다. 의빈 성씨는 아들 문효세자의 효창묘 왼쪽 산등성이에 묻혔다. 효창묘는 1870년(고종 7) 효창원으로 승격됐고, 1944년 지금의 고양 서삼릉 내로 옮겨졌다. 그에 앞서 1940년 의빈 성씨의 묘도 서삼릉 내 후궁 묘역으로 옮겨져 아들과 가까이 잠들어 있다.

첫아들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를 잇달아 잃은 정조는 이듬해 반남 박씨 박준원의 셋째딸을 세 번째 간택 후궁으로 맞아 가례를 올리고 수빈(綏嬪)으로 책봉했다. 수빈 박씨는 1790년(정조 14) 정조의 두 번째 아들을 낳으니, 곧 훗날의 순조(純祖)다.

순조(1790~1834, 재위:1800~1834)는 열한 살 때인 1800년(정조 24) 2월 왕세자로 책봉되고, 같은 해 6월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세자가 된 지 겨우 넉 달 만이었다. 그는 조선 왕으로는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가장 어려서 왕위에 오른 왕은 훗날 순조의 손자인 헌종으로, 여덟 살이었다.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로 대왕대비가 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했다. 이에 따라 순조 즉위 초에는 정순왕후의 친정 경주 김씨 가문이 득세했다. 정순왕후는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비롯해 노론 벽파를 대거 기용하는 한편,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던 천주교를 탄압함으로써 정적들을 제거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라 불리는 대규모 탄압으로 정약용 등이 유배당하고 수많은 천주교인이 학살당했다. 아들 상계군의 역모 연루로 이미 강화도에 유배 중이던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훗날 철종의 할아버지인 은언군도 이때 사사됐다. 그의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인으로 사사됐는데, 사교에 빠진 가족을 단속하지 못했다는 죄목이었다.

순조 나이 열다섯 살을 앞둔 1803년(순조 3) 12월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에서 물러났다. 순조가 친정(親政)하면서 경주 김씨의 세도는 약화하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 등 안동 김씨가 조정을 장악하게 됐다. 노론 시파였던 김조순은 그때까지 정순왕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주무르던 김관주 등 경주 김씨 벽파를 대거 숙청하고 김이익, 김이도 등 안동 김씨 시파를 등용했다. 이로써 안동 김씨에 의한 60년 세도정치의 막이 올랐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탐관오리가 횡행하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극심했다. 수해와 전염병까지 겹쳐 민심이 피폐해지자 농민층을 중심으로 항거가 일어났다. 세도정권 초부터 시작된 농민들에 의한 민란이 전국 각지로 번졌고, 마침내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 안동 김씨 세도를 견제해보려 했으나 세자가 청정 중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 순원왕후에게서 태어났는데, 왕비에게서 원자가 탄생한 것은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을 낳은 이래 거의 150년 만의 일이었다. 순조는 1812년(순조 12) 네 살 때 세자로 책봉한 효명세자를 무척 아꼈다. 순조는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819년(순조 19) 풍양 조씨인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는데, 훗날의 신정왕후(흔히 조대비로 알려짐)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순조는 1827년(순조 27년)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하게 했다. 

그러나 세자는 1830년(순조 30) 대리청정 4년 만에 갑작스럽게 병이나 스물두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순조는 세자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효명(孝明)’이라 시호를 내렸다. 효명세자는 아들 헌종 때 익종(翼宗)으로 추존되고, 고종 때 다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숭됐다.

효명세자가 죽고 2년 후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와 차녀 복온공주도 각각 20대, 10대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이 악화한 순조는 자녀들을 잇달아 잃고 상심이 깊어진 탓인지 1834년(순조 34)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호는 처음에는 순종(純宗)으로 정했으나 1857년(철종 8)에 순조(純祖)로 고쳤다. 순조는 1899년(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 때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로 추존됐다. 한편 죽은 순조의 왕위는 효명세자의 아들로 세손이던 헌종이 잇게 됐다.

인릉의 석물



순원왕후 김씨(1789~1857)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로 1789년(정조 13)에 태어났다. 그녀는 1800년(정조 24) 왕세자빈 간택에서 정조에 의해 사실상 세자빈으로 내정됐다. 그러나 그해 6월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세자와 가례를 치르지 못하고 세자빈에도 책봉되지 못했다. 순조가 즉위하자 세자가 이미 왕위에 올랐으니 세자빈이 아닌 왕비를 새로 간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가 선왕의 직접 간택이었다며 대혼(大婚)을 밀어붙임으로써 이듬해 왕비로 책봉됐다.

순원왕후는 친정아버지 김조순과 오빠 김좌근으로 이어진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34년(순조 34) 남편 순조가 세상을 떠나 세손(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7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자신의 인척 영흥부원근 김조근의 딸을 왕비(효현왕후)로 책봉하게 했다. 이후 1849년(헌종 15)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사도세자의 서손자(庶孫子)인 전계대원군 이광의 아들 이원범을 양자로 삼아 왕위(철종)를 잇게 했다. 

철종이 즉위하자 다시 수렴청정하는 동안, 인척인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 왕비(철인왕후)로 책봉되는 등 안동 김씨 세도정권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녀는 32년 동안 왕비로 있었으며, 두 차례나 수렴청정했다. 이는 예종과 성종 때 수렴청정했던 세조비 정희왕후에 이어 두 번째 사례다. 순원왕후는 철종이 즉위한 1849년부터 3년간의 수렴을 거둔 후 1857년(철종 8)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남편 순조가 순조숙황제로 추존되면서 그녀도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함께 추존됐다.

인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가 함께 잠든 합장릉이다. 인릉은 순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835년 파주 교하,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장릉(長陵) 근처에 조성됐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해 1856년(철종 7) 헌릉 서쪽 언덕 현재의 자리로 천장했다. 이때 1469년(예종 1) 세종의 영릉(英陵)을 천장하고 땅에 묻은 석물과 1537년(중종 32)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을 천장하고 파묻은 석물을 재활용했다. 

이에 따라 인릉의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 대부분은 구 영릉과 희릉의 석물들이고, 일부 석물만 새로 제작된 것이다. 이는 천장에 따르는 왕실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 후 1857년 순원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 인릉에 합장했다.

태종과 원경왕후가 잠든 헌릉과 이웃한 인릉 일대는 조선 시대 여러 왕이나 왕후의 능 후보지였다. 먼저 태종의 아들 세종의 영릉이 처음으로 들어섰다. 능자리가 좋지 않다고 해 영릉이 여주로 옮겨간 후에는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이 조성됐다. 정적 제거를 노린 김안로의 정치적 의도로 희릉이 지금의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간 후에는 오랜 세월 비어있었다. 

그 후 파주 장릉 곁에 있던 순조의 인릉이 이곳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릉과 희릉의 초장지가 정확히 현재의 인릉 자리였는지는 확인이 안 되지만 인릉을 옮기면서 옛 영릉과 희릉의 석물을 다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인릉 근처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10여 년 전 발굴조사 결과 희릉의 초장지는 지금의 인릉 옆이었음이 드러났다. 세월에 따라 명당이 흉당으로 바뀌어 능을 옮기고, 그 흉당이 다시 명당이 돼 다른 능자리로 쓰이기도 했던 조선왕릉 천장 역사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출처 : 한국아파트신문 2022 유병갑

 

 

 

서울 내곡동 헌인릉 인릉산

인릉산은 326.5m로 서초구와 경기도 성남시를 경계로 동서향으로 뻗어내린 산이다. 인릉산에서 바라보면 앞으로 구룡산과 대모산이 우측으로 청계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릉산 등산로 입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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