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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서울 내곡동 헌인릉 인릉산

by 구석구석 2009.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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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산은 326.5m로 서초구와 경기도 성남시를 경계로 동서향으로 뻗어내린 산이다. 인릉산에서 바라보면 앞으로 구룡산과 대모산이 우측으로 청계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릉산 등산로 입구에서 헌인릉이 가까이 위치해 있다.

 

인릉산(326,5m)은 서초구 내곡동과 성남시 고등동에 속해 있으며 인릉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대동여지도나 광주부읍지에는 천림산(天臨山)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나 산 북쪽에 위치한 순조의 능인 인릉의 조산(朝山)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무단왜곡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인릉산은 3개의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제1공원은 서초구 내곡동·신원동 일대 82필지1,416,900㎡를 대상으로 1971년 8월 6일 건설부고시 제465호로 미시설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3월 6일 서울특별시고시 제107호로 최종 지적고시 되었다. 이 곳에는 3개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으며 옹달샘이 하나 있고 임야면적은 1,356,500㎡이다.

 

인릉산 제2공원은 서초구 내곡동 일대 290필지 775,271㎡를 대상으로 1977년 7월 9일 건설부고시 제138호로 미시설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최종 지적고시 된 것은 제1공원과 같다. 임야면적은 556,948㎡이다.

 

인릉산 제3공원은 서초구 내곡동 일대 39필지 208,662㎡와 강남구 세곡동 산 48-1 일대 146필지 172,500㎡를 대상으로 1977년 7월 9일 건설부고시 제138호에 의해 미시설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최종 지적고시 된 것은 제1공원과 같다. 서초구 지역 임야면적은 166,300㎡이다. 강남구 지역은 세곡자연공원이라 불리며 연인원 5만명이 이용하고 있다.

 

옛골마을 삼거리는 경기도와 성남시의 경계선이며 인릉산과 청계산의 산행들머리다. 방일해장국 옆길을 따라 산행들머리를 잡고 오르면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민가 정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상적동 옛골능선 이정표가 있다.

 

이후 148 옛골능선이정표-산불감시초소-신구대학실습농장안내판-넘밑골이정표-301봉-군부대 철책능선-헬기장-정상

 

 

■ 내곡동 산 13-1 헌인릉 사적 제 194호 관리소 02-445-0347 heonin.cha.go.kr

 

조선 제3대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는 헌릉,그리고 제23대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가 합장되어 있는 인릉을 함께 헌·인릉이라 부른다.   

조선 3대 태종(1367~1422)과 원비 원경왕후(1365~1420) 민씨의 능이다. 헌릉은 동원이봉의 쌍릉으로, 앞쪽에서 보아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조선 23대 순조(1790~1834)와 비 순원왕후(1789~ 1857) 김씨의 합장릉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외척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의 문란, 매관매직 성행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사회가 혼란해졌고,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각종 민란이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 탄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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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내곡동 태종・원경왕후 민씨의 헌릉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 재위 1400~1418)은 1367년(고려 공민왕 16) 이성계와 그의 향처(鄕妻) 한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함흥에서 태어났다. 1383년(고려 우왕 9) 17세때 문과인 병과(丙科)에 7등으로 급제해 고려의 관리가 됐다. 조선의 왕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기록을 가졌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당시 방원은 개경에 있던 어머니와 동생들을 피신시켜 가족을 지켰다. 아버지와 그를 도우러 간 형들을 대신한 것이다. 또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해 중상을 입고 벽란도에 머무는 동안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 세력이 이성계와 그 지지자들을 제거하려 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생모 한씨의 3년상 시묘(侍墓) 중이던 방원은 벽란도로 달려가 아버지를 개경으로 옮겨오는 한편, 군사를 일으켜 이성계 일파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처럼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건국에 큰공을 세웠지만 1392년 4월 심복들을 시켜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이성계의 노여움을 샀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함께 왜구도 토벌하고 한때 정치적인 동지관계였으며 친분이 두터웠다. 방원이 아버지에게 정몽주가 죽었음을 알리자 이성계는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라며 대노했다. 

정몽주 살해 석달 후인 1392년 7월 17일(음) 방원을 비롯한 이성계 지지세력은 고려의 왕대비 안씨를 압박해 공양왕을 폐위시켰다.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했다. 그해 8월 태조는 왕자가 된 아들들에게 군호 (君號)를 내리면서 방원을 정안군(靖安君)에 봉했다. 아버지가 왕이 되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한 방원으로서는 내심 세자 자리를 기대했을 터였다. 맏형 진안군(鎭安君) 방우(芳雨)와 둘째 영안군(永安君) 방과(芳果)가 왕권에는 별 뜻이 없으니 어차피 적장자가 아닐 바에는 자신이 세자가 돼도 되리란 기대였다.

태조는 8월 20일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의 막내아들 방석(芳碩)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이는 강씨와 그녀를 총애한 태조, 그녀와 친밀했던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 개국공신들의 합작 결과였다. 첫 번째 부인 한씨(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다섯 아들을 모두 제치고 11세의 이복동생이 세자로 책봉되자 방원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그런 가운데 1396년 신덕왕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세자의 지지세력은 타격을 입게 됐다. 이후 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데 신덕왕후와 협력했던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했다. 수세에 몰린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은 1398년(태조 7) 8월 25일 사병을 동원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무안군(撫安 君) 방번(芳蕃)도 살해한다. 

당초 방석과 방번 형제는 먼 곳에 안치(安置)하기로 했는 데, 유배길에 방원과 방간(芳幹)의 심복들에 의해 피살됐다. 이 사건으로 크게 상심한 태조는 이미 병사한(1393년) 장남 방우 아래 둘째 아들인 방과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한달 후인 9월에는 그에게 왕위(정종)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 다. 

1400년(정종 2) 1월 방원의 넷째 형 회안군(懷安君) 방간은 1차 왕자의 난 때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와 손을 잡고 방원을 공격했다. ‘2차 왕자의 난’ 또는 ‘박포의 난’ 으로 불린다. 개경에서 시가전 끝에 방원이 승리해 박포는 사형에 처했고 동복형제인 방간은 죽이지 않고 유배로 그쳤다. 

반대 세력을 제거해 정치적 입지가 더욱 견고해진 방원은 한 달 후 형인 정종의 세자로 책봉됐다. ‘왕세자’가 아니라 ‘왕태제’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종은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로 아들을 삼겠다’며 정안공(靖安公) 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다. 처음부터 왕권에 뜻이 없었던 정종은 방원의 권유로 세자가 되고 왕위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방원이 쥐고 있었다. 

정종은 정치보다는 격구 등 오락을 즐겼는데, 이는 방원의 경계를 풀고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정종은 그 해 11월 세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1419년(세종 원 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오랫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왕(恭靖王) 또는 공정대왕으로 불리던 그는 1681년(숙종 7) 에야 비로소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의 능은 후릉(厚陵)으로 북한 개풍군에 있다. 

정종의 양위로 왕 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중앙 및 지방제도를 고쳐 고려의 잔재를 청산하고, 국방 강화를 위해 군사제도를 정비했다. 토지와 조세제도 개편으로 재정 안정을 꾀했다. 또한 노비제도 정비, 신문고 설치, ‘숭유억불(崇儒抑佛)’ 등 사회정책과 함께 한양 천도도 추진했다. 

건국 초 조선은 세 번에 걸쳐 도성을 옮겼다. 1394년(태조 3) 개경에서 한양으로, 1398년(정종 원년)에는 개경으로 돌아갔는데 태종은 1405년(태종 5) 9월 도성을 한양으로 다시 옮겼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공신과 외척세력을 철저히 견제했다. 오른팔이었던 이숙번 등을 숙청하고,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후계자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 가문을 풍비박산 냈다. 특히 조강지처이자 가장 가까운 협력자였던 원경왕후 민씨의 친정 남동생 넷을 모두 죽였다. 또 세자빈 광산김씨의 친정아버지로, 세자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도 숙청했다. 태종의 과거 급제 동기이기도 했던 김한로는 세자가 폐위되자 유배됐는데, 양녕의 세자시절 세자궁에 여자를 출입시켰 던 일이 드러나 직첩을 몰수 당하고 서인(庶人)이 됐다. 

세종 즉위 직후에는세종의 장인 심온을 사사하고 그 집안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세종의 영릉 편에서 소개했지만 태종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던 심온을 역적죄로 체포해 사약을 내리고, 그의 아들들과 아내는 변방에 관노로 보냈다. 다만, 세종비 소헌왕후는 역적의 딸이 됐지만 아들을 셋이나 낳았다는 등의 이유로 폐출을 면했다. 

헌릉 소전대(앞)와 비각 / 국가문화유산포털

태종은 정비인 원경왕후 외에 9명의 후궁을 뒀다. 원경왕후에게서 4남 4녀, 후궁들에게서 8남 13녀의 자식을 얻었다. 그는 세자였던 맏아들 양녕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1418년(태종 18) 세자를 폐하고 셋째 아들 충녕(세종)을 세자로 삼았다. 2개월 뒤에는 군권을 제외한 왕권을 세종에 게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 후 1422년(세종 4) 4월 여러날 동안 세종과 함께 사냥을 즐기고 돌아온 그는 갑자기 병이나 5월 10일(음)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세, 공교롭게도 자신보다 두 살 위로 2년 앞서 세상을 뜬 원경왕후와 같은 나이였다. 그의 묘호는 태종(太宗)으로 정해졌고, 그해 9월 6일 헌릉에 장사지냈다. 

원경왕후 민씨(1365~1420)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1365년(고려 공민왕 14)에 송경(松京) 철동(鐵洞)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2년(고려 우왕 8)에 이방원과 혼인하고, 1392년 이성계가 고려 왕위에 오르자 정녕옹주 (靖寧翁主)에 봉해졌다. 그녀는 1398년 남편 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때 친정 동생 민무구·무질 형제와 함께 거사를 성공으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1400년 2월 방원이 세자에 책봉되자 그녀는 세자빈으로 봉해졌고, 그해 11월 정종의 양위로 태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됐다. 태종 즉위 후 궁녀문제에서 출발해 후궁 간택으로 불화가 이어졌다. 태종은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 차원에서 계속 후궁들을 들였는데, 원경왕후는 이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과 투기로 태종과 맞섰다. 태종이 외척 견제를 위해 두 차례에 걸쳐 그녀 친정 동생 민무구·무질·무휼·무회 4형제를 모두 자진(自盡)하게 하면서 부부의 불화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녀는 태종에게 불손한 언행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뻔했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을 생각해 그녀를 폐출하지는 않았다. 

 

헌릉의 능침 / 국가문화유사나포털

1418년 태종의 양위로 아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가 됐으며, 2년 후인 1420년(세종 2)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은 왕대비에게는 원경왕태후(元敬 王太后)라는 시호와 헌릉(獻陵)이란 능호가 올려졌다. 태종은 당시 경기 광주시 대모산에 헌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자리도 미리 만들었는데, 2년 후 세상을 떠난 그는 원경왕후 곁에 묻혔다. 

헌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형식이다. 넓은 능역과 탁트인 전경,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이 조선 전기 왕릉의 위엄성을 드러낸다. 두 능침 모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문·무석인 각 2쌍, 석마, 석양, 석호 각 4쌍이 배치됐는데, 이는 각각의 이름을 가진 쌍릉인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노국공주의 정릉(正陵) 제도를 따른 것이다. 그 밖에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은 5개로 조선 전기의 상설제도를 보여준다. 정자각 옆에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燒錢臺)가 있는 데 이 또한 태조의 건원릉, 신덕왕후의 정릉과 더불어 조선 전기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다. 

궁궐 전각과 문루, 왕릉 정자각 등의 추녀마루 위에는 잡상(雜像)이라 부르는 토우가 있다. 서유기의 주인공 삼장법사와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등과 중국 토신(土神)들의 조각상이다. 당(唐) 태종 이세민은 이른바 ‘현무문의 변’으로 형과 동생은 물론 그 가솔들을 죽이고 황제가 됐다. 밤마다 죽은 이들의 망령이 그의 꿈에 나타나 기왓장을 던지며 괴롭히자 날아 다니는 기왓장을 누르기 위해 설치한 게 바로 잡상이라 전해진다. 

왕권을 위해 이복형제와 처남들까지 죽인 이방원도 공교롭게도 태종이란 묘호를 가졌다. 황제나 왕의 이름은 감히 쓰거나 부르지 않는 전통과 달리 두 사람은 모두 태종이란 묘호에 이세민, 이방원 이름을 뒤이어 쓰는 경우가 많다. 힘을 갖고 싶은 욕망과 냉혹함이 필부의 본성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겠냐는 냉소 때문은 아니었을까? 

출처 : 한국아파트신문 2022 유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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