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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서울 제기동 고려대박물관 선농당 영휘원 홍릉수목원

by 구석구석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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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안암동5가 고려대학교 사적 제285호 / 1981년 9월 25일 지정

고려대학교의 본관은 보성전문학교의 본관이다.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1905년 대한제국 내장원경을 지낸 이용익이 교육구국의 이념 아래 박동, 지금의 수송동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가 있던 자리에 법률과 실업교육을 목적으로 개교하였다. 1910년 천도교에서 인수하여 안국동 자리에 2동의 목조교사를 짓고 법과와 상과의 전문과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에 빠지자 김성수가 1932년에 이 학교를 인수하였고,1933년 지금의 안암동에 자리잡게 되었다. 1946년 8월에 정법,경상 및 문과의 3개 단과대학에 8개 학과로 편성된 종합대학으로 승격, 개편하여 고려대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본관건물은 도서관과 함께 안암동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세워진 대표적 건물이다. 일제 식민지시대 중앙고등학교 본관 등의 창의적인 작품을 발표했던 박동진이 설계하고, 일본인 후지따고오지로오가 시공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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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중앙도서관(사적 제286호 / 1981년 9월 25일 지정) 건물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중앙도서관이다. 본관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건축가 박동진(1899-1982)이 설계하였고, 건축의 양식과 구조는 당시 교수로 있던 오천석의 모교인 미국의 듀크대학 도서관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시공자는 미상이다. 중앙 도서관을 준공할 당시 국내외적으로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여 당시 금액으로 22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차질없이 마쳤다고 한다.

 본관 건축 다음해인 1935년 6월에 착공하여 1937년 9월에 본관의 왼쪽 언덕에 화강암 석조 고딕양식의 5층 건물로 완공하였다. 평면은 ㄴ자형으로 모서리 부분의 중앙탑부를 중심으로 본채가 양쪽에 있는데, 하나는 탑과 나란히 남쪽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하나는 탑에서 북쪽으로 꺽여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본채는 3층이고, 남서 모서리의 탑부는 고딕 성관풍 (城館風)의 5층 탑으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돌을 덧붙였다.

 도서관 준공 당시 1층에는 교수연구실 32개, 2층에는 250석의 대열람실을 배치하고, 각 책상마다 스탠드와 가죽의자를 비치하였다. 3층 에는 20만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3층 이상은 민속자료,미술품을 진열할 수 있도록 꾸몄다. 그러나 개교 70주년을 맞아 중앙 도서관 신관이 준공되면서 여유공간을 확보하게 되어 지금은 당시의 기능을 대부분 신관으로 넘기고 대학원생들의 열람실과 교수 연구실로 사용되고있다. 고대 보유 장서 170여만권 중 40여만권이 있는 서고에는 서유견문 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각종 귀중서가 주류를 이룬다. 

성북구 안암동5가 고려대학교박물관 02-3290-1514

백년사전시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고려대학교 백면의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하고, 소장 및 수집자룔르 체계적으로 전시하여 건학이념, 고대정신, 그리고 학교의 발전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백년의 역사를 되새겨 보고, 미래 천년의 비전을 세우기 위한 공간이다.

역사, 민속전시실은 조선시대의 생활이란 테마로 조선시대의 하늘, 땅, 사람 /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과 마음 / 조선시대 생활용구의 문양과 특징 / 조선시대의 사회와 제도/ 근대 두 지식인 '민영환, 유길준' 5개의 주제별 전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서 말기까지의 관습과 생활 그리고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고미술전시실은 한국의 미란 테마로 한국의 불교미술, 한국의 도자기, 한국의 회화 3개의 주제별 전시로 구성되어져 있다. 유교문화와 더불어 함께 했던 불교의 다양한 유물과 훌륭한 문화 유산인 청자와 백자 그리고 사군자와 민화 등의 회화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현대미술전시실은 한국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이란 테마로 한국화, 회화, 조각이라는 3개의 주제별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문인화, 산수화 등이 현대에 이르러 한국화로써 변모하는 과정과 새로운 서양화의 등장, 20세기 초 서양 조각작품들의 소개로 출발한 현대 조각 작품 등을 감상할 수 있다.

 

혼천시계 국보 제230호 / 1985년 8월 9일 지정 

조선 현종 10년(1669) 천문학 교수였던 송이영이 만든 천문시계로, 홍문관에 설치하여 시간 측정과 천문학 교습용으로 쓰였던 것이라 한다.

시계의 지름은 40㎝이고, 그 중심에 위치한 지구의의 지름은 약 8.9㎝이다. 2개의 추운동에 의하여 움직이는데, 하나는 시각을 위한 바퀴와 톱니바퀴들을 회전시키고, 다른 하나는 종을 치는 장치를 위한 것으로, 여러 개의 쇠구슬이 홈통 안을 굴러 내려감으로써 종을 치는 망치가 걸려 곧 종이 울리고, 회전바퀴 살에 붙은 주걱들에 의하여 쇠구슬이 들리면서 이 작동이 반복된다.  

즉, 2개의 축을 동력으로 하여 여러 가지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지구의가 설치된 혼천의 두 부분이 연결되어 있어 시간과 천체의 위치를 동시에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만든 천문시계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물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모델이었던 물레바퀴의 원리를 동력으로 삼은 시계장치와 서양식기계 시계인 자명종의 원리를 조화시켜 전혀 새로운 천문시계 모델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세계 시계 제작기술의 역사상 독창적인 천문시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설렁탕의 유래가 깃든_ 선농단

사적 제436호인 선농단은 조선시대 역대국왕이 농사신인 제신농씨와 곡식신인 후직씨에게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총 면적이 523평, 규모 4m × 4m이다.

예조에서 경칩 후 길한 해일을 골라 제일을 정하면 임금은 3일전부터 재계하고 당일 새벽에 이곳에서 여러 중신 및 백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를 올린다. 제사가 끝나고 날이 밝으면 임금이 친히 쟁기로 밭을 가는 시범을 보였는데 이를 친경례라 한다. 왕이 몸소 농사를 실천함으로써 중신들과 만백성에게 농사의 소중함을 일깨우려 했던 의식이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면 왕은 중신 및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참가자들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해 소를 잡아 국말이밥을 내렸는데 이를 선농탕이라 했으며 훗날 닿소리 이어바뀜으로 설롱타으로 읽게 됐고 오늘에 와서 설렁탕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후 선농제향과 친경례는 사라졌으며 일제는 이곳에 청량대라는 공원을 조성하여 선조들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을 영원히 말살하고자 했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이곳 주변 주민들이 선농단친목회를 조직하여 선조들이 행해오던 그 의식을 재현하면서 맥이 다시 어어졌으며 오늘날에는 농림부와 동대문구청, 동대문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4월 20일 이곳에서 선농제향을 재현하고 있다.

 

선농단 향나무(천연기념물240호)는 나무높이가 약 10m,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2m 정도로, 현재 국내에서 자라고 있는 향나무 중 크고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대개의 향나무가 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이 향나무는 위로 곧게 자라난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초기 선농단을 축조할 당시에 심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선농단 외에도 사직단, 원구단 등 10여 개소의 제단이 있었으나 오늘에 와서는 그 의미가 퇴색한 것이 사실. 정성과 간절함으로 제를 올리던 제단의 흔적을 선농단에서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별도의 관람시간이나 관람료는 없다.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제기역 1번 출구로 나와 100m 정도 걸으면 있다.
문의 02-2127-4707

 

청량리2동 205번지 영휘원(홍릉) 문화재청출장소 02-962-0556 

영휘원은 조선조 제26대 고종황제의 계비인 순헌귀비 엄비(1854-1911)의 묘이다. 엄비는 철종5년(1854)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궁중에 들어가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다가 고종황제의 후궁이 되었다. 엄비는 아관파천(1898)때는 고종황제를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생활하였으며 고종 광무원년(1897) 원자 은을 낳아 귀인으로 책봉되었고, 그후 순비, 순헌귀비로 책봉되었다. 

엄비는 1911년 7월 20일 덕수궁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위패는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에 진봉되어 있다. 엄비는 생전에 근대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고종 광무9년(1905) 양정의 숙을, 다음에는 진명여학교를 설립하고 뒤에 숙명여학교 설립에 많은 기부금을 내어 우리나라 근대 사학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기었다. 이 곳에는 문인석 1쌍, 마석 1쌍, 상석, 장명등, 망주석 1쌍이 있다. 또 이 경내에는 숭인원도 있다. 숭인원은 영친왕 이은의 원자인 이진의 묘이다.

이진은 1921년 8월 18일에 태어나 1923년 5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이곳에는 명성황후 민씨를 모신 홍릉이 있었으나 1919년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으로 이장하였다.

 

별천지 같은 도심의 숲, 청량리 홍릉수목원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으로 도심 한복판에서 삼림욕을 즐기며 산책할 수 있는 곳이다. 13만여 평의 울창한 숲 중에서 3만 평 정도를 개방하고 있는데, 나무와 야생화들이 많아 도심을 벗어난 듯한 기분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특히 본관 뒤에서 조경수원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이즈음 초록물이 잔뜩 오른 활엽수들이 빽빽하게 하늘을 가리고 있어 산책 코스로 으뜸이다. 원래는 고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능인 홍릉이 있었던 자리로 지금은 터가 남아 있다.

산림청 산하 국립산림과학원(www.kfri.go.kr)에서 연구 목적으로 조성해 관리하는 숲이다. 따라서 일반인은 평소 들어갈 수 없다. 다만 1993년 이후 일요일에 한해 개방하고 있다. 예약 같은 것은 안 해도 된다.

 

이곳에 수목원이 들어선 것은 1922년. 한국전쟁 중 나무 대부분이 불타고, 현재의 나무들은 60년대부터 국내외에서 수집해 심은 것들이라 한다. 44만㎡의 부지에 국내외 나무와 풀 2000여 종이 숨 쉬고 있다. 그만큼 낙엽도 다양하다.  잎이 어른 손바닥만 해 떡을 싸 가지고 다녔다 하는 떡갈나무. 잎몸은 계란 모양이며 잎자루가 잎몸이 비해 매우 짧다. 그래서 떡갈나무 잎은 공중에서 구르듯 떨어진다. 음나무 잎은 잎몸이 다섯 갈래로 나뉘어 있다. 잎자루가 잎몸보다 훨씬 길다. 음나무잎은 허공에서 좌우로 길을 헤치듯 지그재그를 그리다 땅에 닿는다(나무마다 명패가 밑 동 옆에 세워져 있다).

 

수목원 내에서도 특히 낙엽 좋은 구간이 있다. 수목원 본관 오른편에서 통나무집 뒤편으로 나 있는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시라. 테니스 코트 옆을 지나쳐 어정(御井)을 감싸고 돌아서 홍릉터로 오르면 사방이 낙엽이다. 수목원 중심부를 제외하면 외곽은 길이 포장돼 있기 때문에 유모차나 휠체어가 지나기에도 무리가 없다.

 

Information

홍릉수목원 개방시간은 동절기(11월∼이듬해 2월)의 경우 오전 9시∼오후 4시다. 주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야 한다. 지하철역 1호선 청량리역 또는 회기역, 6호선 고려대역에서 가깝다.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10∼20분이 소요된다.

수목원 안에는 음식물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홍릉수목원에서 사라지면 이 땅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수종들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자. 대신 산림과학관과 제2수목원 사이에 커피 및 음료수 자판기가 설치돼 있고, 벤치도 놓여 있다.

홍릉수목원이라는 이름의 유래 정도는 알고 가면 좋겠다. 1896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고 나서 2년 뒤인 897년 이곳에 묻혔다. 그때 붙여진 이름이 홍릉이다. 명성황후는 25년간 여기에 누워 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현재의 홍유릉(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겨져 고종과 합장됐다. 

/ 자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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