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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대구광역시

달성 도평동-천연기념물1호 달성측백수림 불로동고분군

by 구석구석 2009.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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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종의 균형이 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위적으로 가속화될 때는 심각한 재앙이 초래될 수 있다. 이른바 ‘나비효과’처럼 지금 한 개의 종이 사라진다면 나중에는 수많은 종이 한꺼번에 멸종될 수 있다. 인류의 생존도 위협당할 수 있다. 종의 다양성과 균형은 자연계를 유지시켜온 가장 안정적인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계에서 절대 지배종이 되면서 사람들은 종의 균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은 희귀한 동식물 및 천연물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유네스코는 1972년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기 시작했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자연유산·복합유산으로 나뉜다. 이 중 우리나라의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2007년 6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국제기구의 노력에 앞서 우리나라는 1962년부터 자체적으로 천연기념물을 지정하여 보호해오고 있다.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1호는 어떻게 지정되었는가?

대구 도평동 측백나무숲은 향산 서면 절벽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사진=김지훈 문화해설사>

‘천연기념물(natural monument)’이란 말은 1800년 독일의 A.V. 훔볼트가 남아메리카 여행기인 <신대륙의 열대지방기행>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1906년 발족한 프로이센 천연기념물 보호관리 국립연구소는 ‘천연기념물이란 특색 있는 향토의 자연물로서 지역의 풍경·지질·동물 등 무엇이든 그 본래의 장소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가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호령’을 공포하면서 천연기념물을 지정하기 시작했다. 이 법은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될 때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이 법에 따라 문화재위원회는 1963년까지 116점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천연기념물은 크게 식물, 동물, 광물, 천연보호구역 등으로 나뉘어 있다.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대구의 도동 측백나무 숲. 기이한 바위벼랑에 측백나무들이 아슬아슬하게 뿌리 내려 자란다. 문화재청의 허락을 받고 숲 안을 살펴봤다. 무덤덤투어는 숲 밖에서 측백나무 숲을 본다.

국가적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무엇을 제1호로 지정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국가적 자긍심에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익히 아는 대로 우리나라 국보 제1호는 숭례문이고, 보물 제1호는 흥인지문이다. 숭례문은 미친 자의 방화로 불타버려 국제적인 망신을 샀음은 물론 우리는 선조들에게 석고대죄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1호는 무엇일까? 이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극소수라 생각한다. 실제로 필자가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여러 사람에게 물었더니 단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다.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1호는 바로 ‘달성 측백수림’이다. 법에 의해 천연기념물을 지정하면서 무엇을 제1호로 정할 것인가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각종 자료를 보면 1962년 12월 3일 달성 측백나무를 천연기념물 제1호로 정했다고 나와 있다. 제정 이유는 측백나무는 중국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자라고 있어 식물 분포학상 학술적 가치가 높고, 이 군락지가 남방한계선이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만으로 천연기념물 제1호가 되었을까? 그런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자연물이 달성 측백나무뿐일까? 그런 자연물은 수십 가지가 넘을 것이다. 솟아나는 의문을 금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알아보았으나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필자가 직접 조사에 나섰다.

 

본래 1962년 제정된 우리나라의 문화재보호법은 일제의 보호령을 계승한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일제는 1933년 보호령을 공포했고, 이 규정은 해방 후까지 효력이 유지되었다. 1947년 7월 제헌헌법이 제정될 당시, 제헌의회는 모든 법령을 일일이 제정할 수 없어 제헌헌법 제100조로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여 일부 기존 법령의 승계를 합법화했다. 이에 따라 일제의 천연기념물 보호령이 자동 승계되었던 것이다.

 

이후 문교부 문화국은 1955년 6월 국보 367건과 함께 천연기념물 116건을 재지정하면서 제헌헌법 제100조 규정에 따라 기존 지정 문화재 역시 승계했다. 이때 국보 제1호 숭례문도 자동 승계되었다. 또한 1962년 제정 공포된 문화재보호법도 부칙 제3조(지정문화재 등에 관한 경과조치)에서 ‘이 법 시행 당시 종전의 규정에 의한 지정문화재는 이 법에 의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본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기존의 지정물을 그대로 승계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1호는 일제의 지정번호를 그대로 승계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1933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일람’에 그대로 나와 있다. 일람에 의하면 천연기념물 제1호는 ‘달성의 측백수림 -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 도동 임야 180번지 - 소유자 대구 배문환씨’로 되어 있다. 제2호는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과 청덕면의 ‘합천 백조 도래지’로 지정돼 있다.

 

이 자료를 보면 현재의 천연기념물 제1호 지정 사유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 일제는 왜 달성 측백수림을 제1호로 지정했을까? 이는 한국식물조사에 많은 시간을 보낸 일본동대(日本東大) 나카이(中井) 박사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도동 측백수림을 집중 연구했고, 1919년 그곳에서 구와꼬리풀을 채집하여 변종으로 명명했다. 구와꼬리풀은 현삼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잎 모양이 국화를 닮았다.
‘구와’는 ‘국화’라는 뜻이다.   

 

이렇게 추적해보니 천연기념물 제1호 지정 유래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필자가 천연기념물 제1호의 제정 경위를 애써 밝히려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재 속에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을 비난하려 함이 절대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혼란한 상황에서는 천연기념물에 대해 많은 연구가 축적되지 않았고, 서둘러 법을 제정 공포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지정자료를 승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경위로 지정이 되었건 달성 측백수림은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1호로서의 지위를 당당히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일제가 지정한 것을 그대로 승계했다는 점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또 얼마나 잘 보존하느냐에 있다. 국보 제1호 숭례문처럼 홀라당 태워 먹어버리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깎아지른 절벽에 청정한 측백숲

필자가 이에 대해 꼬치꼬치 적은 이유는 앞으로 천연기념물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므로(知則爲眞看), 미리 아는 것은 힘이다.

 

이제 달성 측백수림을 살펴볼까 한다. 이 숲은 동대구역에서 대구공항을 지나 경부고속도로와 익산포항고속도로가 만나는 도동 분기점 부근에 있다. 숲이 있는 산 이름은 향산(香山)이다. 측백나무에 향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향산은 측백숲 쪽에서 보면 영락없는 코끼리 형상이다. 바위가 움푹 꺼진 눈 형상도 있다. 숲 앞에는 동쪽 환성산에서 흘러내리는 불로천이 금호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불로천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측백나무 길이라 부른다. 

 

▲ 일제가 1933년에 발간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일람>.

 

이 군락지는 2008년 5월 ‘대구 도동 측백나무숲’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과거 달성군이었던 이 지역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래 전에 대구시로 편입되었고, 대구시가 끊임없이 명칭 변경을 요구하여 이루어진 일이다. 또한 대구시 도동은 2008년 하반기 행정구역 통합으로 도동과 평광동을 합쳐 도평동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는 ‘대구 도평동 측백나무숲’으로 불러야 한다.

 

측백나무 숲의 형성에 대해서는 달성 서(徐)씨의 무덤에 심은 측백이 기후 조건이 맞아 번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는 측백을 흔히 볼 수 있다. 주나라 때부터 천자의 능에는 소나무를, 제후의 능에는 측백을 심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왕의 능에는 소나무를 심어서 최고의 대접을 한다. 그 다음이 측백이다. 사가에서도 무덤에 측백을 널리 심었다. 이는 측백나무를 묘지 옆에 심으면 시신에 벌레가 생기지 않는 효능 때문이다.

 

이 숲은 1934년 처음 지정될 당시에는 둘레 20m, 높이 40m의 100여 년 묵은 측백나무 수천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한다. 지금은 10여m의 측백 1,000그루가 자라고 있다. 수령은 대개 100여 년이다. 문화해설사이자 측백숲 맞은편에 자리한 백림정 사장인 김지훈씨에 따르면 500여 년 된 것도 있다 한다. 그는 산악인으로 측백나무숲 보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측백숲은 본래 향산 등성이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나 사람들이 제사용 분향 재료로, 공예품을 만들기 위해 많이 베어가 규모가 줄어들었다.

 

향산의 측백은 절벽에서 자라기 때문에 성장이 무척 더디다. 바위 틈에 뿌리를 박고 수평으로 자라는 나무가 많다. 가까이 가서 보면 옹이진 뿌리들이 바위를 억세게 붙잡거나 바위 틈에 파고들고 있다. 절벽에 있는 측백들은 사람의 손을 피할 수 있어 보존이 되었다. 거친 환경이 오히려 종을 보존하게 한 셈이다. 측백 숲에는 쇠물푸레나무, 회화나무, 골람초, 난티나무 등이 함께 자라고 있지만 측백이 절대 우세종이다.

 

측백숲 절벽에는 여러 개의 굴이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파놓은 방공호라 한다. 절벽 중턱에는 19세기 초엽 인근 아홉 노인이 시를 짓고 놀았던 구로정(九老亭)이 자리하고 있지만 지금은 보호구역이어서 올라갈 수 없다.

 

우측 사면에는 동화사의 말사인 관음사(觀音寺)가 있다. 신라 신무왕(670년)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이 조그만 절에는 아주 소박하게 생긴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달성 서씨인 조선시대 거유 서거정이 이곳을 대구10경 중 제6경으로 꼽을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먹으면 선인이 되는 생명의 나무

측백은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 바늘잎나무로서 떨기나무, 큰키나무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원산지로 한다. 측백은 잎이 옆(側)으로 납작하기 때문에 측백(側柏)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납작하게 마디진 잎이 산호처럼 뻗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부채꼴이다.

 

꽃은 암수가 한 그루에 달리며 4월에 핀다. 열매는 둥근 알꼴의 구과(毬果·cone : 소나무·삼나무 등 열매 둘레에 목질의 비늘조각이 뭉쳐 있다가 성숙하면 벌어지는 열매를 말한다. 솔방울을 떠올리면 된다)이며 크기는 15~20㎜ 가량이다. 종자는 한 개의 구과 편린 속에 2개씩 들어 있다. 껍질은 다갈색이며 작은 비늘처럼 뚝뚝 떨어진다. 측백의 목질은 매우 단단하며, 방향성 정유(精油)를 품고 있어 특유의 향이 있다.

 

측백나무는 동서양에서 약재로 쓰였다. 측백 잎을 아홉 번 쪄서 말리고 가루를 만들어 먹으면 몸에서 나쁜 냄새가 없어지고 향내가 나며 머리칼이 희어지지 않고 이와 뼈가 튼튼해진다. 여자들의 하혈이나 피오줌, 대장이나 직장의 출혈에도 효과가 있다. 간암이나 간경화 등으로 복수가 찰 때 구증구포(九蒸九曝·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것)한 측백 잎을 달여 오소리 쓸개와 함께 복용하면 복수가 빠진다. 고혈압, 중풍, 불면증, 신경쇠약 등에도 효과가 있다.

 

측백나무 씨앗은 백자인(柏子仁)이라 하여 자양강장제로 이름이 높다. 측백나무 씨앗으로 만든 술인 백자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과실주의 하나로 고려 명종 때에 만들어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문헌에는 측백나무 잎이나 열매를 먹고 선인이 되었다거나 몇 백 년을 살았다는 얘기가 많이 전한다. 16세기 초 프랑스의 탐험가는 북아메리카의 세인트 로렌스 강을 발견했을 때 인디언이 측백나무를 달여 만들어 준 약을 마시고 괴혈병을 치료했다 한다. 그래서 ‘생명의 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측백과 비슷한 나무로는 편백을 들 수 있다. 편백나무는 일본이 자생지인 측백나무과의 식물이다. 온천 등에서 볼 수 있는 히노끼탕의 ‘히노끼’가 바로 편백이다. 편백은 피톤치드 분사량이 많기 때문에 삼림욕과 아토피 치료에 효과가 크다.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측백의 자생지는 충북 단양군 냉천리(제62호), 경북 영양군 감천동(제114호), 안동군 남후면 구리(제250호), 경북 울진 성류굴(제155호) 등이다. 이곳의 측백수림은 모두 깎아지른 낭떠러지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오래된 측백나무는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있는 수령 약 340년의 측백나무다. 조선 현종9년(1668)에 임천군수 여효증이 이임기념으로 만연당 뜰에 유목을 이식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도 수령 300살로 추정되는 측백나무(천연기념물 제255호)가 있다.

 

금실 좋게 어우러진 회화나무(왼쪽)와 느티나무(오른쪽).

도평동 측백숲 앞에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다. 금실 좋은 나무로 알려져 있어 아이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한다.

 

/ 월간산 2009.3 / 김규 - 중앙대에서 문학과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으며, 문화일보 신춘문예(시)에 당선하였다. 중앙대와 한서대에서 강의하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불로동 산 1-17 212기의 불로동 고분군

도동 측백나무 숲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로동 고분군이 있다. 대구 불로동 일대 야산 능선을 따라 고분이 늘어선 곳이다. 고분에 누가 묻혔는지 자료나 기록은 없다. 그저 삼국시대에 대구 일대를 지배하던 세력의 무덤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고분군에는 크고 작은 고분 214기가 있다. 지름 20m가 넘는 거대한 고분부터 보통 묘지만 한 것까지 크고 작은 고분이 구릉을 따라 이어진다. 도시 변두리에서 이렇듯 죽은 자의 거대한 공간이 어떻게 섬처럼 여태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도동 측백나무 숲과 불로동 고분군은 그곳이 가진 진짜 매력을 여행자 스스로 발견하기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심한 여행자의 눈으로는 측백나무 숲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해 보이는 숲으로, 불로동 고분군은 도무지 거기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공간으로만 보인다. 공간의 가치와 깃들어 있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들춰보고, 그곳이 가장 특별해 보이는 시간을 겨눠서 찾아가야 비로소 그곳의 매력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도동 측백나무 숲과 불로동 고분군 여행을 돕는 여행상품이 있다. 관광두레가 지원하는 대구의 주민여행사 ‘더 휴앤’이 진행하는 ‘무덤덤투어’다. 더 휴앤은 지역의 주민여행사다. 대구대에서 관광교육론 등을 강의하는 겸임교수 장영화(49) 씨가 대표를 맡고 전직 태권도장을 운영하던 산림치유지도사, 평범한 주부 등 주민 4명이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이들은 스스로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을 기치로 직접 코스를 짜서 여행상품을 만들었다. 습지여행, 갓바위 여행, 야간여행 등 다양한 상품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여행상품이 바로 ‘무덤덤투어’다. ‘무덤덤’이란 이름은 불로동 고분군을 의미하는 ‘무덤’에, ‘덤’을 보태는 여행이란 뜻에서 붙였단다.

무덤덤투어는 반나절 일정의 투어다. 오후 서너 시쯤 시작해 도동 측백나무 숲과 불로동 고분군을 방문하는데, 그 사이에 나무를 깎아 목기 소품을 만드는 장인과 함께하는 편백나무 주걱 만들기 체험도 진행한다. 투어를 마친 뒤에 불로시장의 명물인 푸짐한 무침회로 저녁 식사를 하는 일정도 있다.

 

지역 주민이 의기투합해 만든 여행사 더 휴앤의 여행상품 무덤덤투어에 참가한 여행자들이 대구 불로동 고분군의 초지에 앉아 지등(紙燈)을 만들며 지는 해를 감상하고 있다. 무덤덤이란 투어의 이름은 고분을 의미하는 무덤에다 덤을 더 얹어 보여준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문화일보 2021

무덤덤투어는 여행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보아야 하는지에 집중한다. 가이드로 나선 장 대표는 불로동 고분군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여행자에게 주는 이중의 의미를 설명했다. 고분에서 느낄 수 있는 1000년 전의 역사와 시간의 깊이, 그리고 고분의 유연한 선들이 그려내는 독특한 미감에 대한 얘기다. 주민여행사의 안내로 고분군을 함께 걸으며 펼쳐지는 경관과 감상을 이렇게 하나하나 쪼개서 설명해주니 여행자의 감각이 스펀지처럼 살아난다.

무덤덤투어의 하이라이트는 저물녘 불로동 고분군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주민들과 함께 커피를 나누고 지등(紙燈)을 만들며 마주하는 노을이다. 늦은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부드럽게 고대인의 주검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1000년 동안 무덤 위로 지나갔던 저무는 시간을 헤아려보면 자못 아득하다. 이런 감상에 젖어있노라면, 여기까지 여행을 안내해준 좋은 안내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212기가 모여 있는 불로동 고분군.

 

/ 문화일보 2021 김경일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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