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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강원도

영월 38번국도-고진하가옥 선암마을 서강 우구정가옥 원시마을 금몽암 장릉 보덕사

by 구석구석 2007.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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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역을 지나 영월경찰서 남면지구대 못미쳐 우측으로 원골다리를 지나 기차길을 건너면 도동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을 지나 원골마을(창원리) 내에 강원문화재자료72호 고진하가옥이 있다.

 

가옥의 형태는 영서·중부 지방의 민가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평면구조는 외형상 서로 붙어 있는 안채와 사랑채가 ‘ㄷ’자집 형태를 이루고, 헛간채가 ‘ㅡ’자형으로 배치된 이른바 트인 ‘口’자형이다.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세운 안채는 툇마루로 된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윗방, 안방, 부엌이 직각으로, 왼쪽으로는 건넌방이 배치되어 ‘ㄱ’자집 형태를 이룬다. 툇마루 뒷면에는 문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사랑채는 안채와 달리 높은 기단 위에 세우고, 지붕은 직각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였는데 합각면 일변의 내림마루는 없어졌다. 

 

지난 2001년 남면 창원리의 창령사터에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쯤 만들어진 나한상이 나왔다. 그냥 불상이 아니다. 돌을 깎아 만든 나한상은 마치 먹을 찍어 그린 한국화 같은 느낌이다. 차가운 돌덩이에서 붓의 선과 농담이 느껴지는 듯하다. 하나같이 때 묻지 않은 얼굴. 나한상에는 규칙이나 기법을 뛰어넘는, 마음을 흔드는 미감이 있다. 전국을 돌며 순회 전시를 했던 나한상은 지금 춘천국립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있으니 영월 여행 앞뒤로 다녀오길 권한다.

나한상이 나온 창령사터에는 자그마한 법당이 세워졌고, 법당 앞에는 처음 나한상을 발견했다는 김병호(73) 씨가 기거하는 가건물이 있다. 옛 절터에서 며칠이고 기도를 다녀오는 아내를 위해 비라도 피할 거처를 만들어주다가 배수로에서 나한상을 찾은 그는 운명이라 생각하고 일대 땅을 사들였다고 했다. 그 땅에서 그는 밭을 만들고 염소를 기른다. 문화재 도록을 펼쳐놓고 나한상 발견 당시 얘기를 하던 그가 감정이 북받쳐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의 이유를 자신도 설명하지 못했지만, 분명한 건 그에게 나한상은 ‘유물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법당에는 문화재청이 만들어 가져다줬다는 17기의 나한상 복제본이 있다. 크기며 형태를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박물관에서 만나는 진품의 감동에는 어림도 없다. 법당의 주불 앞에는 수석처럼 생긴 돌이 하나 놓여 있다. 두드리면 목탁 소리가 나는 돌이란다. 김 씨가 진짜 목탁 소리와 돌 두드리는 소리를 번갈아 들려줬다. 어떻게 된 게 진짜 목탁보다 돌을 두드리는 게 더 목탁 소리 같았다. 돌 목탁을 치던 김 씨가 복제본 나한상을 향해 깊게, 그리고 오래 절을 했다.

 

영월군, 1995,《영월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옹정리 산 180번지 선암마을

 

선암마을 땟목체험

맑고 청명한 서강의 물줄기는 서면 선암마을변에 우리땅을 그대로 복원하듯 한반도 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마을 사람들이 옛날부터 한반도를 닮았다 하여 찾아간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은 삼면이 바다인 우리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으로 서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서해바다와 남해바다 그리고 동해바다까지 온통 작고 이름없는 아담한 선암마을에 모여든게 신기하다. 남북한간에 평화와 공존을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처럼 하루빨리 통일이되어 아름다운 금수 강산 곳곳을 자유롭게 구경할 날을 기대해 본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한반도 지형의 전경. 사진/ 민다엽 기자

영월군 서면 옹정리 선암마을 앞에 위치한 옹정리 산 180번지는 한반도의 모형과 흡사하여 이 곳을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늘고 있다. 동해안과 서해, 남해안에는 서강물이 감싸고 돌아 한반도의 형상과 똑같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반도뗏목마을 추진위원장 박봉천 011-470-4494 / 사무국장 서현석 016-9224-0102

 

선암 마을의 평창강에 뗏목 체험장이 마련되었다. 선암마을 뗏목은 평창강 물줄기가 만들어 놓은 한반도 지형의 동해안을 출발해 서해안까지 1km구간을 왕복한다.

 

뗏목 및 뗏꾼(의상대여)체험 1인 5,000원 (60분기준)
서강탐사선 1인 5,000원(60분기준)
한반도지형 백두대간답사를 위한 줄배왕복체험 1인 1,000원
독도주막 운영(메밀부침 및 동동주 등)

 

흐르는 물결따라 풍경도 흐르는 서강

서강은 평창강과 주천강이 만나는 영월군 서면 옹정리부터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영월읍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속칭일 뿐 공식적인 하천명은 평창강이다. 평창강에 주천강이 유입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 강은 평창강 하류에 해당된다. 이 강은 동강과는 달리 유속이 느리고 하천 폭이 넓으며 강변을 끼고 많은 마을들이 위치해 있다.

 

서강은 영월군 서면 옹정리 선암마을에서 시작하여 단종의 첫 유배지인 청령포를 감싸안으며 영월읍 합수머리에서 동강과 만나 남한강으로 흐른다. 동강을 물길이 험한 남성적 상징의 수강이라고 한다면 서강은 물길이 순한 여성적 상징의 암강 으로 표현되며 사람의 발길이 잦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오밀조밀한 산세와 더불어 들판을 감싸안으며 흐르는 서강의 깊고 잔잔한 물줄기는 병풍처럼 펼쳐진 신선 바위를 휘돌아 아름다운 선암마을을 지나 청령포로 흘러든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이 지역 사람들은 ' 서강물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대단한 자부심까지 간직 하고 있다.  

/ 영월군청 문화관광과 

 

미개방동굴인 괴동굴/영월군청

서면사무소에서 88번 지방도를 따라 북쌍리 방향으로 약 3km 지점의 광전대교에서 괴골마을로 1km 정도 진행하면 마을뒷산(동쪽)에 괴동굴이 있다. 동굴의 발달방향은 북동에서 남동방향이며, 입구의 크기는 폭 9m, 높이 12m이고 총연장은 260m이다.


옹정리 괴골 산104-1 괴골굴은 입구가 큰 동굴로서 입구부분에는 동굴수가 계속 유출되고 있으며, 휴석소가 발달해 있다. 이 동굴은 좌·우측 두 갈래로, 좌측 통로는 경사면을 따라 휴석, 유석, 종유석, 석주 등이 있고, 우측 통로에는 천장 부분의 절리면을 따라 유석, 종유석, 석순 등이 소규모로 성장한다.

 

방절리산122번지 자연이 그린 동양화 선돌 

 날골과 남애마을 사이에 높이 70m 정도의 큰바위가 서있는데 이 바위를 선돌이라 한다. 선돌은 일명 신선암이라고도 하는데 선돌은 푸른 강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방절리 서강 안에 절벽을 이룬 곳에 위치해 있는데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개 내리다 그친 듯한 형상을 이룬 입석을 말한다. 이 입석의 바로 앞에 우뚝선 거암은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절벽과 입석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강물은 마치 한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풍이 들면 마치 금강산의 일부를 보는 듯한 절경을 이루는데 더욱이 이곳 선돌은 영월관문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와서 선돌의 절경을 구경한다. 

 

전망시설 아래로 펼쳐진 장엄한 두갈래의 우뚝솟아있는 바위(높이70m)를 선돌(立石)이라 불리어 오고 있으며 서강의 푸른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국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하여 신선암(神仙岩)이라고도 한다.

 

들골교를 지나서 북서쪽인 윗들골마을 안 민속촌 바로 북쪽에 우구정가옥이 있다.
이 가옥은 정확한 건축년대는 알 수 없으나 100년 이상 되었다고 전하며 안채, 사랑채, 헛간채로 구성된 ‘口’자형의 집이다. 안채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과 부엌을 직각으로 배치하고, 우측으로는 건너방을 두어 ‘ㄱ’자형을 이루었다. 지붕에는 고식기와를 얹었으며, 마루 중앙기둥으로 원주(圓柱)를 쓴 것이 특이하다. 사랑채는 정면 3間 측면 1間인 ‘一’자형이다. 1間의 대문과 그 좌측에 2間의 사랑방을 배치하고 방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여 사랑채를 구성하고 있다. 

 

기단의 높이는 90cm 정도로 자연석으로 쌓았고, 덤벙주초에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하고 지붕은 홑처마에 고식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다. 헛간채는 후에 증축된 건물로써 전체적인 가옥의 구성형식으로 보아 이 가옥은 영서지방의 전형적인 전통민가라 볼 수 있다.
 

연당리 원시마을은 서강변에 자리 잡고있으며 옛생활 모습과 여러종류의 동물 (당나귀,백마,염소, 닭, 토끼,등등) 들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동물들은 사람과 아주 친숙하여 동물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아진다. 9년 전부터 사육과 교육을 받은 당나귀로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이 당나귀를 탈수있으며 산악처험을 통해 스릴과 스트레스를 한방에 풀어버릴 수 있는 곳이다.산속의 풍경도 느낄수있으며 아주예전 당나귀 타고 장에가고 당나귀 타고 장원급제하러가던때를 생각나게도 해준다  당나귀는 사람과 친숙하고 영리하여 모두가 좋아할수있는동물이어서 .아주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며, 특히 어린이들에게 좋은 체험과 학습이 될 수 있다.

 

원시마을에 들어서면 맨처음보이는곳이 임금님바위이다.

이 바위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와룡골주민이 꿈을꾸었는데 임금님이 신하들을 불러모아 어전회의를 하던중 이주민을불러 이르기에 뒷산봉우리밑에  조그마한 연못을 파보라고 현몽하여 파보니, 괴이한 바위하나가 나와 현위치에 옮기니 신기할정도로 단번에 자리를 잡았다. 한고승이 이소문을 듣고 찾아와 바위를 좌우 양 측면이 임금님모습을 한 바위라고 감탄하며 임금님바위라고하고 그바위에 지성을드리면 좋을일만 생길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최초 산악으로 당나귀를 타는 스릴과 재미를 느낄수있는곳이다. 코스는 산악 기본A코스와  산길의 장점을 그대로 살린 스릴만점 B코스 까지있으며 이후로는 산길의 경사 그대로살린 최대 70도 까지 각이있는 산길을 만들예정이다 당나귀를 타고 산악처험을 하면 다이어트는물론 스트레스, 더위 모든게 한방에 날라갈정도로 스릴이 있는 레포츠이다.

 

당나귀 타는 원시마을의 A코스 쪽의 산정상의 봉우리는 대왕봉이다.
이봉우리는 일제침략기 때 큰인물이 난다고 하여 일본인이 조선인의 혈맥을 끊을 목적으로 쇠말뚝을 박은 곳이다,  30~40년전 까지만해도 쇠막뚝이 박혀있었으나 현재는 쇠말뚝을 뽑아내고 큰 웅덩이만 남아있다.

 

요금은 산악 기본 A코스는 10000원, 산악 B코스는 15000원, 산악 C 코스는 20000원/033-372-8952 ,  010-3997-1669

동베이 팬션에서 단체손님들을 맞고 있다. 1세대당 (45평형) 15인 기준 250,000원(1인 추가시 10,000원 추가) < 예약문의 : 010-6314-1092  >   

맛자랑 음식점에서는 자연산 민물매운탕과 여름 별미 둘이먹다 둘다죽어도 모를만큼 맛있는콩국수가 있다. 각지방에서 매운탕 먹으러 손님들이 올정도니 말이필요없는것이고 콩국수또한 하루에 300그릇이 팔릴만큼 맛있다고 한다.

 

/ 영월군청 문화관광과

 

영흥12리 1117 도문화재자료25호(1984.6.2) 금몽암 

금몽암은 보덕사에 소속된 암자로 신라 문무왕 20년(680)에 의상조사가 지덕암(旨德庵)로 창건하여, 조선 세조3년(1457)에 금몽암(禁夢庵)이라 개칭하였으며, 광해군 2年(1610)에 군수 김택룡이 증축하면서 노릉사(魯陵寺)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영조 46년(1770)에 금몽암이라 개칭되어 보덕사에 예속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이 영월로 유배된 후 이 암자가 궁에 있을 때, 꿈속에서 유람하던 곳과 흡사하다고 하여 금몽암이라고 하였다 한다. 평면형태는 ‘ㄱ’자형으로 동편의 높이 150cm가량의 석축기단 위에 있는 정면 5間, 측면 2間의 건물과 북편의 정면 3間, 측면 1間의 누각식 2층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임란때 불타고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영조 21年(1745)에 지금의 모습과 같이 사찰건물과는 다른 민가형태로 재건하여, 일반가옥의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이 건물 뒤쪽에 정면 2間, 측면 4間의 누각식 마루가 있는 금당 성격의 산운각(山雲閣)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근처에 장릉이 있어 단종의 원당(願堂)으로 여겨진다. 

 

영흥리1086 조선제6대왕 단종묘 장릉  033-370-2619 

조선 6대 왕인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은 그 규모와 양식에서 다른 왕릉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일단 능 주위에 세워진 석물의 수가 참 적다. 보통 왕릉 주위로는 다양한 종류의 석물이 두 쌍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 장릉에선 봉분 앞 상석과 장명등을 중심으로 망주석과 문인석 그리고 석마만이 각각 한 쌍씩 자리해 있을 뿐이다. 또 무인석이 보이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 문인석은 세우고 무인석을 세우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의 칼에 의해 왕위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봉분의 모습도 참 소박하다. 아마도 화려한 문양을 새긴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기 때문인 듯싶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 대신해 석양 한 쌍과 석호 한 쌍을 봉분의 네 귀퉁이에 세워놓았다. 하지만 장릉이 이처럼 간소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추복위된 왕릉이기 때문은 아니다.

 

장릉은 단종이 복위되던 숙종 24년(1698)에 조성되었는데, 당시 숙종은 후릉(厚陵)의 예에 따라 장릉을 조성하라는 교지를 내렸다고 한다. 후릉은 조선 2대 왕인 정종과 그의 정비 정안왕후를 모신 능이다. 그런데 왜 하필 후릉이었을까. 여기서 잠시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종과 단종의 삶이 조금은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왕은 모두 동생과 삼촌에게 왕위를 넘겨준 비운의 왕이었다. 정종은 2년 만에, 단종은 3년 만에 각각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 뒤 정종은 20년 넘게 상왕으로 지내면서 한양의 궁보다는 개성의 백령산 기슭 인덕궁에서 유유자적하며 생을 보냈고, 단종은 두 번의 복위운동으로 인해 2년 만에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그리고 다시 서인으로 폐해진 뒤 결국 유배지였던 영월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아마도 이런 사연 때문에 숙종은 장릉을 후릉의 예로 조성하라고 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능의 닮은 점은 또 있다. 모두 도성 100리 밖에 자리해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왕릉은 서대문 밖 10리에서 100리 사이에 쓰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후릉은 북한 땅인 황해북도 개풍군에, 그리고 장릉은 한양에서 500리나 떨어진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장릉은 남한에 남아있는 왕릉 40기 중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왕릉이다.

 

왕릉을 이루는 능역의 배치에서도 장릉은 조금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모든 왕릉이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능침을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것과 달리 장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 그리고 능침으로 이어지는 동선이 ‘ㄱ’자 형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정자각과는 능침의 방향이 일치하지도 않는다. 정자각과 능침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남향으로 지어진 정자각과 달리 능침이 ‘신좌을향(辛坐乙向)’, 즉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도록 조성되어 있어 그리 된 것이다.

 

그럼 장릉은 왜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왕릉의 기본에서 벗어서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는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장릉이 이처럼 조금은 독특한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도 무관치 않다.

 

 단종의 능이 지금처럼 동을지산에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영월 호장(戶長·지방 관아의 우두머리) 엄흥도의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조는 당시 단종의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흥도는 동강에 떠다니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자리에 암장했던 것이다. 목숨뿐 아니라 자신의 가문을 담보로 한 일이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풍수까지 따져가면서 묘를 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장릉이 다른 왕릉과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다. 영조는 엄흥도의 충절은 기리기 위해 영조 2년(1726) 장릉 내에 정려각을 세웠다.

 

장릉에는 정려각 외에도 다른 왕릉에선 찾아볼 수 없는 건물이 몇 채 있는데,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 여인위 등 268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이들의 제사를 위해 조성한 배식단 등이 그것이다.

 

/ 한국관광공사 2009.10월 추천여행지

 

배식단사는 정조 15년(1791)에 건립된 곳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98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28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4인의 위패(位牌)를 모셔놓은 곳이다. 매년 한식날 단종제향후 제사를 지낸다. 

 

영천은 정조때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 부사 박기정이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보통때는 조금씩 샘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날 제사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솟아 올랐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정려각은 1726년(영조 2년)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여문이다. 비석은 1833년(순조 33년)에 가필하여 같은 해에 또 다시 증축하였으며, 1876년 (고종 13년)에 고종이 증시하기를 '충의'라 하여 1879년 (고종 16년) 비석에 있는 것을 다시 고쳤다. 

 

경내 입구의 낙촌기적비각, 영월군수이던 낙촌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

장릉에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남하하던 거북이가 머리를 번쩍 들고 맑은 하늘을 바라 보는 것같은 형상을 한 언덕위에 네모진 아담한 정자가 있으니 배견정이라 한다. 배견정은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녀들의 넋이 단종묘소를 찾아와 죽어서 두견이 되었다는 단종대왕 영혼 앞에서 울며 절하던 곳이라 하여 배견정이라 이름 지은 것으로서 이 정자는 1792년 사육신의 유일한 혈손인 박팽년의 현손인 박기정 부사(朴基正 府使)가 창건하였다. 단종을 두견새에 견주어 말하 것은 여기서 연유된다.

배견정/영월군청

옛적에 중국 촉나라의 망제가 그 신하인 “요령”에게 임금의 자리를 빼앗기고 궁궐을 �겨나서 서선에 숨어 살면서 복권되기를 기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객사하였다. 이에 촉나라에 돌아가지 못한 그 원귀가 새가 되어 “촉혼귀” “촉혼귀”하며 울었으므로 그 새를 두견새라 하였다고 한다.
이 새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리워지는데 두우, 두혼, 촉혼, 촉백, 자규 등이다. 왕위를 빼앗기고 객지에서 죽은 왕의 영혼을 비유하는 말이다.

 

단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단종역사관 033-370-2619 

 

단종 관련 유적 및 유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단종역사관이 2002년 4월 5일 영월읍 영흥12리 장릉 경내에 개관되었다. 이 공사에는 총사업비 18억원이 투입되어 2001년 7월 6일 기공. 9개월만에 완공되었는데 총면적 535㎡규모에 지하 1층 지상 1층의 □자모양 맞배지붕 건물로 지어졌다.

지하1층 문화예술관에는 사육신과 생육신 위패 관련자료와 조선시대 행렬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단종유물관에는 단종유배 재연과 정순왕후실, 모형도, 조선궁중 복식도등이 정리되어 있다. 아울러 지상1층에는 단종의 탄생과 영월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르고 그 후 복권되기까지의 단종 일대기가 모형으로 제작 전시되어 있다.  

 

1층은 휴게실을 가운데 두고 크게 단종의 시대, 단종의 승하, 단종의 복권, 이렇게 세부분으로 구분된다. 이코너들을 통해 단종의 세자 즉위에서 단종대왕으로 복권되기까지 단종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며, 단종왕릉이나 단종제, 민간 신앙에 대한 세부적인 지식도 얻을 수 있다.

 

지하 전시실은 단종 및 사육신, 생육신에 대한 자료와 함께 단종의 정비였던 정순왕후에 대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더불어 조선시대의 궁중 의복이나 형벌기구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끔 기획되어 있다.

 

/ 영월군청

 

곤드레밥 전문 영월 청산회관 374-2141

해발 700m 이상에서만 자생하는 나물에다 각종 재료들이 들어가 독특한 맛을 내는 「곤드레밥」이 미식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영월읍 중앙로 농협군지부 맞은 편에 자리잡은 청산회관(대표:崔香子)은 모녀가 대를 이어가며 운영하고 있는 한정식집으로 지난 97년부터 곤드레밥을 특색 음식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입소문을 타고 최근 널리 알려진 곤드레밥은 태백과 정선, 평창의 고지대에서 생산된 곤드레 나물을 현지에서 엄선해 구입, 들기름과 콩, 표고버섯을 함께 섞어 밥으로 만들기 때문에 독특한 나물 향과 함께 담백한 맛을 낸다. 때문에 건강식으로 알려지면서 남녀노소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음식점을 찾고 있으며 외부에서 관광객이나 손님들이 올 경우 곤드레밥에 다양한 향토 음식들이 함께 나오는 「곤드레 정식」도 인기이다.

 

곤드레밥을 먹기위해 일부러 영월을 찾는 미식가들도 있을 정도이며 개그맨 전유성씨를 포함, 연예인들도 자주 방문하고 있다. 깔끔한 한정식과 불고기 백반, 버섯전골 등도 일품. 가격은 1인분 기준으로 곤드레밥 6,000원, 곤드레 정식 1만2,000원이며 한정식은 1만5,000~2만원, 불고기 백반 1만원, 버섯전골 6,000원이다. 

/ 강원뉴스 유병욱

 

영월 영흥리 승리식당 373-5551

김치와 해물의 절묘한 조화로 맛을 낸 김치해물탕이 영월의 한 음식점에서 선보여 미식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장릉에서 우회도로를 타고 신동강대교 쪽으로 가는 방향에 위치한 승리식당(대표:丁美子)은 지난 93년 문을 연 이후 해물탕과 아구찜, 복지리 등 세가지 요리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음식점. 특히 김치해물탕은 이 식당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특색있는 음식이다.

 

그러나 이 업소에서 김치해물탕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지금도 메뉴판에는 이 음식 이름이 없기 때문. 다른 음식을 먹기에는 인원인 적은 한두명의 손님을 위해 특별히 만들었던 김치해물탕이 최근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김치해물탕은 동해바다에서 잡아 온 해삼과 멍게 홍합 등 싱싱한 해물에다 묵은 김치를 썰어 넣어 얼큰하면서도 단백한 맛을 내 미식가들은 아예 이 음식만을 먹기위해 승리식당을 찾아오고 있다. 일반 해물탕과 아구찜, 복지리 등도 별미.

 
가격은 김치해물탕 5,000원(1인분), 해물탕·아구찜 2만~3만원, 복지리 2만5,000~3만5,000원. 
 
/ 강원뉴스 유병욱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한 '김인순할머지 순두부집'은 30년을 넘게 순두부로 찌게를 만들어 15가지 반찬과 함께 손님들의 입맛을 돋우고 있다. 이곳에서 재료로 쓰이는 순두부는 영월 관내의 재배 농가들과 직접 계약을 맺어 생산되는 최상질의 콩만을 엄선해 김 할머니가 직접 만든다는 것이 특징.

이 순두부집은 지난 70년대 초 김 할머니의 모친이 차린 이후 지금까지 다른 음식은 농촌의 향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깔끔한 밑반찬들과 일체 취급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순두부 백반만을 만든 전통 순두부 집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식사시간때마다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0년간 항상 지금의 음식점 크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오직 순두부의 맛을 살리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순두부 백반의 가격은 1인분에 4,000원. 연락처=374-3698.  

 

영월읍 영흥4리에 위치하고 있는 장릉의 능사로 알려진 보덕사

경내의 극락보전은 1975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보덕사는 영월읍 북방 3km 떨어진 능동에 있는 고찰이다. 686년 의상조사가 창건하고 발본산 지덕사라 하였다.(일설에 의하면 714년 혜각선사(蕙覺禪師)가 창건하였다고도 함) 그 후 1161년 즉 고려 17대 인종 32년에 설허선사와 원경국사가 극락보전 사성전 염불암 고법당 침운루 등을 증축하였다.

1456년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이곳 영월로 유배되자 사찰명은 노릉사라 개칭하게 되었다.
1905년 숙종 31년에 한선선사와 천밀선사가 대종을 만들어 설치하게 되자 사찰명도 장릉 보덕사로 고쳤다. 그 후 1726년(영조 2년) 6월에 태백산 보덕사라고 개칭하게 되었다.

지금은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 월정사에 속한 제일 거찰로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원형대로 복원되어 가고 있다. 영월 북방 발본산밑 바른편에 위치하고, 앞으로는 동을지산과 장릉이 한눈에 보인다. 

 

영월읍 방절리 241 영월최고의 음식점 리버가든 033-375-8804 www.rivertel.co.kr

단체행사 및 돌,회갑연 행사로 최적지, 야외예식장 보유, 영월 최고의 시설로 고급스런 분위기와 최고의 한식주방장 항시 대기하며  영월소방서 맞은편도로로 청령포초교방향에 있다.

 바로 장릉 옆의 「장릉 보리밥집」이 40년의 명성을 이어오며 고향집과 같은 음식 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밥이 위풍당당하게 된 이유는 건강식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는 쌀과 밀에 비해 지방의 함량은 떨어지지만 칼슘·철분 등과 같은 무기질과 비타민 B군은 월등히 앞선다. 

 

이 집의 주 메뉴는 '보리밥'(5,000원)을 주문하면 감자를 섞은 보리밥에 콩가루에 무친 나물, 호박, 배추, 겉절이 등 10여가지 나물 반찬과 쌈, 된장찌개 등이 한 상 가득 차려진다.
큼지막한 그릇에 각종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으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직접 만든 만두와 재배한 배추 쌈도 고소하다. 특히 고추장과는 별도로 특별히 조제한 검은 색을 띈 쌈 된장 맛은 특이하다.

 

꽁보리밥 위에 감자가 한 두 알 올려져 있고 여러 가지 산나물에 약간 거친 막장 맛의 맑은 된장국이 나온다. 묵을 썰어 나물을 넣고 식초로 무친 묵무침, 백김치도 곁들려 진다. 입맛이 없고 식욕이 떨어졌을 때도 큰그릇에 보리밥과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비다 보면 입안에 벌써 침이 고인다. 풋고추까지 된장에 찍어 아삭아삭 씹으면서 먹다보면 더할 나위 없는 고향의 맛이다. 

 

장릉 보리밥집은 내력이 무려 40년이나 된다. 주인 신용이(75) 할머니의 손맛으로 이어지는 보리밥 한 가지로 만 고집하면서도 고객의 80~90%는 서울을 비롯한 외지에서 몰려오는 손님들이다. 강원도의 향기 진한 된장찌개에 비벼 먹는 보리밥도 맛있지만 초간장에 띄운 생두부, 무엇보다 찬으로 나오는 신선한 야채와 산나물이 손님을 불러모은다.


033-374-3986 / 신용카드가능 / 20대 / 11:30~20:00 / 설날 추석은 쉼 /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진입, 신림 IC로 나가 영월 방향으로 가는 88번 지방도로를 탄다. 이 국도를 따라 주천에 이르러 군등치, 신천리, 배일재를 넘으면 연당교에 닿게 되는데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38번 국도로 진입하게 된다. 이어 문곡교, 소나기재를 넘어 내려서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장릉이고 바로 옆으로 대문이 없는 장릉보리밥 집이 보인다.

/ 한지호 자동차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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