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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도

화성 매향리 사격장

by 구석구석 2022.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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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아픔의 흔적 지우려 가을은 들꽃을 피워 냈다.

전투기가 낮게 굉음을 울리며 날았다. 1년 중 280일, 하루에 11시간씩, 30분마다. 바다의 작은 섬은 수만 발 포탄의 파편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가축들도 놀라고 사람들도 놀랐다.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50년간 그 바다에는 화약 냄새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광활한 갯벌에서 망둥이가 펄떡이고 철새들이 무리 지어 가던 풍경은 옛일이 돼 버렸다. 

매향리의 옛 이름은 고온리(koon-ni)다. 미군들은 이것을 ‘쿠니’라고 불렀고 매향리 앞바다 농섬이 있는 곳을 ‘쿠니사격장’으로 불렀다. 일본 오키나와와 아시아 주둔 비행편대들이 오산 비행장에서 출발해 사격하는 실전 경험을 할 수 있는 적격지로 꼽혔다. 조종사들이 긴장감 속에 연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격장인 농섬과 매향리마을이 1.5km밖에 되지 않았기에.

주민들은 매일 전쟁터 같은 곳에서 생활용품을 조달해서 썼다. 조명탄 낙하산은 곡식 담는 자루나 모기장으로, 미군 헬멧은 두레박으로, 포탄 잔해의 오목한 부분은 등잔 받침이나 대야로, 모든 것이 재활용됐다.

바다에 의지해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둘 고향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계속되는 폭격 소리에 한목소리를 냈다. “사격장을 철수하라.” 2000년 5월 비행기 오폭사건으로 매향리는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마침내 반세기 만에 사격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매화 향기가 난다’해 붙인 마을 이름 매향리.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편도 2차선 도로 옆에 포탄이 산처럼 쌓여 있다. 주민들이 환경정화운동으로 포탄 3만여 발을 수거하고 전시한 매향리 ‘평화 역사관’이다. 

그곳을 찾은 날은 평일이었다. 몇몇 외국인 노동자들은 쉬는 날이었나 보다. 신기한 듯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전쟁기념관에서조차 보기 드문 포탄들이 돌무더기처럼 쌓여 있고, 갈고리에 걸린 거대한 포탄들 사이로 바람만이 지나간다. 포탄들이 가을 하늘을 날아가는 듯이 서 있다. 포탄의 잔해에서 다육식물들이 자란다. 매향리로 가는 골목은 포탄 담이 둘러있다. 

임옥상 작가의 포탄 설치물(2007)이 마치 푸줏간에 걸린 고기처럼 걸려있다. 기념관 문은 현재 닫혀 있어 실내를 볼 수 없다. 주변에는 포탄이나 탄피 등 매향리에서 발견된 것들을 이용해 만든 평화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다.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포탄 밑에는 들꽃이 피어 있다. 가을의 뜨락처럼. 포탄이 돌담처럼 쌓인 골목을 들어가다 낡은 매향교회를 만난다. 검붉게 녹이 슨 종각 위에는 어느 교회에나 있는 십자가가 없다. 표적과 헷갈린다는 이유로 십자가를 철수시켰단다.

골목을 나와 야구장이 있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잘 다듬어진 공원을 만난다. 옛 미군 육상 사격장 자리가 있던 곳이다. 최근 ‘평화생태공원’ 조성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상처와 고통을 준 공간이 치유와 회복의 공간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미군의 폭탄투하 훈련을 통제했던 사격통제소는 독특한 전망대로 바뀌었다. 그곳에서는 서쪽 바다와 함께 충남 당진까지 보인다.


매향리평화생태공원과 논을 경계로 나 있는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철조망 너머로 농섬을 만난다. 바닷물이 빠지면 웃섬과 농섬은 마치 긴 열도 같이 이어진다. 굉음과 화약 냄새가 사라진 농섬은 천연기념물 검은머리물떼새와 괭이갈매기, 흰뺨검둥오리 등 물새들의 산란지가 됐다. 생태가 다시 복원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공원의 끝 매향리캠핑장을 지나면 고온항, 석천항, 남양호를 지나 아산·평택으로 연결된다.



최근 매향리 갯벌과 화성호 습지는 세계적으로 보호가 필요한 람사르 습지 등록도 추진하고 있다. 언젠가 들었던 호소력 짙은 안치환의 ‘매향리의 봄’이 생각난다.

“향기 없다. 꽃향기는 없다. 미제 화약 냄새 코를 찌른다.

되찾으리라 매향리의 봄 되찾으리라. 매화꽃 향기 가득 퍼지는 날에, 너를 안고 춤을 추리라.”  

가수의 고향이 매향리란다. 매향리에는 지금 7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심어졌다. 봄 매화향 가득한 매향리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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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평항 가는 길

매향리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간척사업으로 생긴 화옹지구다. 우정읍 매향리와 서신면 궁평항 9.8km를 연결하는 화성방조제가 여의도 면적 2배 크기의 화성호를 만들었다.

화성호 주변으로 광활한 갈대 습지와 초원이 펼쳐져 있다.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 노릇을 한다. 청둥오리, 기러기, 쇠기러기 등 다양한 철새를 탐조할 수 있고 멸종 위기 조류인 알락꼬리 마도요도 만날 수 있다.

넓은 도로를 드라이브하면서 철새들의 군무를 만날 수 있다. 서해의 바다와 화성호의 아름다운 풍광도 볼 수 있다.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들이 간혹 찾는 곳이다. 호수 근처의 칠면초 군락지 작은 웅덩이에는 철새들이 유유히 헤엄친다. 탁 트인 시야는 마치 바다 끝을 향해 달리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이 서해의 또 다른 볼거리다.

궁평항낙조

그 끝에 궁평항이 있다. 국가항만답게 평일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늘 주말 같은 분위기다. 수산물직판장으로 들어가면 뻘낙지, 갑오징어, 조개류, 대게, 횟감 등 온갖 수산물들이 풍성하다. 활기가 도는 시장이다. 상차림비를 받는 ‘양념집’ 식당들은 손님이 직판장에서 사간 해산물을 척척 요리해준다.

식사를 끝내고 항구 옆 나무데크를 따라 발밑으로 바다를 내려보며 낙조길을 걸어본다. 배를 타지 않아도 바다낚시를 할 수 있어 가족 단위나 초보 낚시꾼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해가 떨어지는 바다 풍경은 여행의 마무리로 딱 좋다. 갈매기 한두 마리가 어둠 속을 날면 가을 붉은 노을은 푸르스름한 바다와 섞인다.

/ 한국아파트신문 이성영 여행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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