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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기한강유역

고양 효경산 서오릉 경릉 인수대비 창릉 수경원 장희빈

by 구석구석 2022.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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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산은 일명 응봉·앵봉·서달산이라 하며 서울시 은평구 구파발동, 갈현동과 고양시 동산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북한산 비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향로봉과 불광사 뒷봉우리를 거쳐, 박석고개에서 통일로를 넘어 235.7m의 봉우리를 이룬다. 이 봉우리는 '대동여지도'에 효경봉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서오릉의 주산이 된다. 

 

수색 방향으로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있으며, 벌고개를 지나 봉산과 증산 봉우리를 솟구치고, 난지도 지역에서 산세가 소멸된다.,서쪽으로  서오릉이 있고,  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수국사가 있고 은평구 갈현동 대성고등학교 일대에 거주하던 박씨 문중에서 대대로 효자가 많이 태어났다 해서 효경산이라 지어졌다고 한다.

 

구파발에서 수색까지 약 6Km 가량의 긴 산줄기로 이어지며, 높이 100~200m의 얕은 산으로 인근 주민들의 쉼터와 산책로로서 이용되고 있다. 봉산과 앵봉을 연계하여 등로가 순탄하게 잘 정비되어 산행이 쉽고, MTB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서오릉은 조선왕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사적 198호로 지정된 문화재

 

고양시 용두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 세조 3년에 당시 세자였던 원자가 사망하자 아버지인 세조가 풍수지리를 참고해 답사한 후 무덤으로 정했을 정도로 산수가 수려한 곳이다. 그 후 예종의 창릉, 숙종비 인경왕후의 익릉, 숙종의 명릉, 영조비 정성왕후의 홍릉이 들어서면서 서오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오릉 외에도 명종 아들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으며 최근에는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의 대빈묘도 옮겨놓았다. 문의 02-359-0090

 

서오릉은 조선왕조 묘역 중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곳으로 어린시절 소풍장소로 이용되는 곳이다.

묘역 입구에 있는 금천교를 건너며 신선한 숲의 공기로 몸을 소독한다. 오래 전 왕과 왕비를 만나기 위해선 정갈한 몸가짐, 마음가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조임금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묻혀 있는 수경원

앵봉산의 기슭 동쪽 낮은 곳에 햇살이 조금 모자란 듯이 비추는 무덤에는 조용한 적막이 흐르고 홍살문도 없이 초라한 봉분 주변을 옹색한 석물 몇이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왠지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느껴진다.

수경원

 왕의 여자, 왕의 후궁(첩)으로 일생을 살았던 영빈 이씨의 생애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한 순간의 착각이 스쳐 지나간다. 죽어서라도 남편의 곁에 누워 잠들고 싶었을 텐데, 홀로 외로이 쓸쓸하게 잠든 고독한 왕의 여인.

 

 숙종의 정비(원비)인 인경왕후가 잠들어 있는 익릉

 

영빈 이씨의 무덤과는 달리 무덤으로 들어서는 홍살문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한눈에 보아도 명당임을 알 수 있는 배산(背山)의 자태와 양춘(陽春)을 듬뿍 받으며 자리 잡은 무덤의 용모가 돋보였다.

 

인경왕후는 열 살 때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숙종이 즉위하자 그의 첫 번째 부인이 된 왕의 여자로 그녀는 애석하게도 천연두를 앓아 발병 8일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중전이 되고서도 남편의 사랑을 제대로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녀의 한(恨)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숙종은 인경왕후의 무덤을 서오릉의 가장 높은 지대 위에 보란 듯이 마련해 주었던 모양이다.

 

스무 살의 나이에 남편을 두고 세상을 떠나간 조강지처를 위해 숙종은 그 나름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려 비교적 기품 있고, 위엄 있는 무덤을 조성케 배려를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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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과 소혜왕후가 나란히 누워 있는 사적 제198호 경릉

 

서오릉에는 세조의 두 아들·며느리 내외의 능이 있다. 하나는 후대에 덕종으로 추존된 장남 의경세자 부부의 경릉(敬陵)이고, 다른 하나는 차남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창릉(昌陵)이다.

둘 다 스물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이들 형제에게는 죽은 후 왕위 계승을 두고 예상 밖의 반전을 주고받은 사연이 있다. 동생은 죽은 형의 맏아들 대신 세자가 돼 왕위(예종)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죽은 뒤엔 자신의 아들 대신 형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성종)를 돌려준 것이다.

 

경릉, 서오릉에 가장 먼저 조성 

의경세자가 죽자 석 달 후 고양현 봉현 언덕(지금의 경릉 자리)에 장사 지내고 의묘(懿墓)라 했다. 이곳에는 원래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鄭易)의 묘가 있었으나 이장됐다. 의묘는 훗날 아들 성종에 의해 의경세자가 의경왕으로 추존되면서 경릉(敬陵)으로 격상됐다. 남편이 죽은 지 47년 뒤 소혜왕후도 경릉에 묻혔다.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경릉은 동원이강릉으로, 능 뒤에서 볼 때 우측 언덕에 소혜왕후, 좌측 언덕에 덕종의 능이 있다. 이는 임금의 능을 오른쪽에 두는 관례를 벗어난 것이다. 또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한 덕종의 능과 달리, 왕후의 능에는 난간석을 둘렀고 석물도 더 많다. 덕종은 세자일 때 죽었지만 소혜왕후는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 죽은 때문이다.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세조가 즉위한 지 3년만에 세상을 떠난 추존 왕이다. 성종이 즉위하여 추존되기 전까지 덕종의 묘는 ‘대군묘제도’를 따랐기에 그 초라함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특히나 ‘동원이강능’-하나의 무덤 영역 안에 두 개의 무덤을 조성해 놓은 능-의 형식으로 조성된 무덤을 자세히 살펴보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열아홉에 죽은 의경세자, 덕종으로 추존

1439년(세종 21)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훗날 세조)과 낙랑부대부인(훗날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세종의 첫 손자가 태어났다. 세종은 손자를 친히 안아주고 데리고 다니는 등 다른 왕손과 달리 대했다.

그는 일곱 살 때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졌고, 1455년 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가 됐다. 하지만 2년 후, 잔병치레가 잦았던 세자가 갑자기 앓아눕는다. 승려들이 경회루에서 재를 올리고 신숙주, 한명회 등 대신들까지 참석해 쾌유를 빌었으나, 세자는 병세가 악화돼 1457년(세조 3) 우리나이 열아홉으로 요절한다.

야사에는 세자의 죽음이 세조가 죽인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 원혼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에 세조가 형수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 바닷가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야사와 달리 세자는 단종보다 한 달 먼저 죽었다. 다만, 세조가 죽은 형수 현덕왕후를 폐서한 뒤 경기도 안산에 있던 그녀의 능(소릉 昭陵)을 근처 바닷가에 개장한 건 사실이다.

세조는 죽은 세자에게 의경(懿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을 세손으로 삼는 대신 세자의 동생 해양대군(海陽大君)을 새로운 세자로 세운다. 훗날의 예종이다. 이는 왕위 계승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지만,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데 앞장섰던 중신들은 이를 따질 수가 없었다. 이에 더해 1468년(세조 14) 세조는 죽기 전에 아예 세자에게 미리 왕위를 넘겨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한 잡음의 소지를 없앤다. 이렇게 선위한 세조는 바로 이튿날 세상을 떠난다.

 

훗날 예종이 죽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숙부 예종의 양자가 돼 왕위를 잇는다. 그가 곧 성종이다. 성종은 1470년(성종 1) 친부인 의경세자를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존한다. 5년 후엔 선숙공현온문이라는 시호를 더해 의경대왕으로 추숭하고, 덕종(德宗)이라는 묘호로 종묘에 신주를 모신다. 이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가 임금으로 추존된 첫 사례다.

경릉 소혜왕후의 능침 무석인 / 문화재청

인수대비 호칭이 더 익숙한 소혜왕후

인수대비(仁粹大妃)로 더 잘 알려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는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 연산군의 할머니다.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로, 1450년 의경세자의 도원군 시절 그와 혼인하여 도원군부인이 됐다.

5년 후 수양대군이 단종에게서 강제로 양위 받아 왕위에 오르면서 남편은 왕세자로, 그녀는 세자빈으로 책봉됐다. 한 살 연하 의경세자와의 짧은 결혼생활 사이에 월산대군, 명숙공주, 자을산군 등 2남 1녀를 뒀다. 세자가 죽자 세자빈 한씨는 세 자녀를 데리고 출궁했다.

세조로부터 정빈(貞嬪)이라는 빈호를 받았는데, 원경왕후(태종비)의 세자빈 시절 빈호와 같다 해1465년(세조 11)에 수빈(粹嬪)으로 바꿨다. 수빈은 한명회의 딸을 차남 자을산군의 부인으로 들이고 시어머니 정희왕후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덕인지 시동생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네 살배기 왕자 제안대군 대신 당시 왕대비였던 정희왕후와 권신 한명회의 지지를 받은 자을산군이 왕위를 잇게 된다.

자을산군이 예종의 양자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수빈은 아들의 즉위 후에도 한동안 빈으로 있었다. 그 후 남편이 의경왕으로 추존될 때 함께 인수왕비에 봉해졌고, 다시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인수대비가 됐다.

이때 인수, 인혜(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두 대비 중 서열상 누가 위인지 위차(位次) 논란이 있었다. 원상들의 논의와 대왕대비(세조비 정희왕후)의 윤허로 맏며느리인 인수대비의 서열이 위인 것으로 정리됐다. 이후 연산군이 즉위하자 그녀는 대왕대비가 됐고, 1504년(연산 10년) 68세를 일기로 죽는다.

연산군은 생모 윤씨를 쫓아내 죽이는 데 간여한 할머니의 장례를 왕세자빈의 예로 격하해 치르려 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만류에 따라 결국 왕후의 예로 장사 지낸다. 연산군은 그녀에게 소혜(昭惠)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러나 실제 왕비였던 적이 없고 대비로만 지낸 그녀는 소혜왕후보다 인수대비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다.

 

경릉을 오른쪽으로 끼고서 돌면 왼편에 있는 대빈묘

 

대빈묘에는 숙종의 네 번째 부인이었던 장희빈(장옥정)의 묘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행색으로 앉아 있다. 살아생전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어느 날 갑자기 궁녀에서 희빈으로 책봉되고, 후사가 없었던 제2계비 인현왕후를 모함하여 폐비시켰던 간계한 여인 장희빈. 

초라한 봉분 뒤로 바위를 뚫고 솟았다고 일컬어지는 소나무와 참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이성한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그것으로 무소불위의 권력과 영화를 누리려 했던 야망의 여인 ‘장옥정’ 지금 그녀의 무덤은 남편이었던 숙종의 무덤(명릉)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외진 구석 한 곳에 쓸쓸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정성왕후가 잠들어 있는 홍릉

 

대빈묘를 지나 북쪽의 작은 등성이 하나를 넘어 내리막길을 가면 오른쪽으로 웅장하게 커 보이는 무덤의 언덕(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미공개 지역으로 남아 있던 ‘홍릉’이다.

 영조는 살아생전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정성왕후를 지금의 홍릉 자리에 묻었다. 그리고 자신도 죽은 후 이 곳 자신의 첫 번째 부인 옆에 묻힐 것을 원해서 홍릉에는 쌍릉의 무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정성왕후의 왼쪽(서쪽) 옆 자리에는 영조의 봉분자리도 미리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은자의 소망은 산자의 행동을 막을 수 없는 법, 영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손자 정조는 할아버지의 무덤을 동구릉의 ‘원릉’으로 옮겨 조성토록 하였고, 따라서 지금 홍릉의 정성왕후 옆 자리는 덩그러니 비어 있게 되었다고 한다. 

 

숙종과 그의 제1계비 인현왕후가 쌍릉으로 잠들어 있는 명릉

 

서오릉의 가운데 주차장을 지나면 조그만 협문이 나오고, 협문을 들어서니 저만치 앞에 숙종과 그의 여인네들이 함께 잠들어 있는 ‘명릉’이 보인다. 홍살문을 지나 참도를 찬찬히 걸으며 숙종과 그의 곁에 누워 있는 왕의 여인들에 대해 생각한다.  

숙종이 잠든 무덤 바로 곁에는 그가 장희빈의 간계에 놀아나 폐위시켰다 복위한 인현왕후가 누워 있다.  아마도 예의바르고 덕성이 높아 자상한 국모로 추앙받았던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미안함이 반영된 모양새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쌍릉의 봉분에는 난간석이 마치 왕과 왕비가 두 손을 맞잡은 모양새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 느낌은 더욱 다가온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왼쪽, 어림잡아 약 백 여 미터 뒤쪽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에 목마르고,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제2계비(셋째 부인) 인원왕후의 무덤이 애틋하게 자리 잡고 있다. 죽어서라도 남편의 곁에 누워 잠들고 싶었던 인원왕후의 간절한 사랑이 오롯이 배어나와 안타깝다.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는 죽어서도 남편의 곁에 누워 잠들고 싶다했다는데, 숙종과 인현왕후가 나란히 손잡고 누워있는 쌍릉 뒤에서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정비인 인경왕후, 제1계비인 인현왕후 다음으로 서열에서 하위인 셋째부인 인원왕후는 죽어서도 차지할 수 없는 남편의 옆자리가 그리워 멀찍이 뒤에서라도 영원토록 바라보며 마음으로 ‘외사랑’을 하려 했었나 보다.

[ⓒ 2008 OhmyNews 이성한]

 

 

사적 제198호인 창릉은 조선조 제8대 예종과 그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


서오릉의 여러 능 중에서 가장 서북쪽 끝에 위치하며 일반인은 관람하기 어려운 비공개 지역 내에 포함되어 있다.
5개 능 가운데 가장 외진 곳에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데, 홍릉 북쪽의 오륙교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돌면 나무숲 사이로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인다.

창릉의 두 능침 / 문화재청

왕릉과 왕비릉은 동원이강식을 이루고 있다. 창릉의 석물 배치는 국조오례의의 전통적인 예를 따르고 있으며 석물의 양식상 특징이 있다면, 고석의 문양과 돌난간 대석주 주두양식이다. 석상의 족석을 고석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북모양을 한데서 연유된 것이었겠는데 다른 능의 나어두를 문고리 모양으로 새겨내서 정말 북과 똑같이 만들어 내고 있음은 창릉의 특이한 특징이다.

 
또 대석주에 죽석이 닿는 아랫부분은 조선식 석주(돌기둥) 모양을 따르고 있으면서 그 주두(기둥머리)는 둥그런 원수 아래 환상 받침을 마련했다. 이러한 난간석은 사각석주로 이행하는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세조의 차남이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睿宗)은 1450년(세종 32)에 태어났다. 1455년 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해양대군에 봉해진 그는 1457년 형 의경세자가 급서하자 여덟 살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예종은 15개월의 짧은 재위기간(1468. 9~1469. 11) 탓에 이렇다 할 치적이 없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이 예종 치세에 완성됐으나 반포 전에 예종이 죽어 그 업적은 조카 성종에게 넘어갔다.

예종은 어린 조카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 부왕의 묘호를 정할 때 대신들이 올린 후보 ‘신종, 예종, 성종’을 퇴짜놓고 세조(世祖)로 고쳤다. 고려조부터 나라를 세운 임금(태조)에게나 올리던 ‘조(祖)’를 아버지 묘호에 붙인 것이다. 이는 훗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의 수모를 겪은 선조와 인조 등의 묘호에도 ‘조(祖)’를 붙이는 선례가 됐다.

즉위 초인 1468년(예종 즉위년)에 일어난 ‘남이(南怡)의 옥사’는 예종 치세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예종은 즉위 첫날, 부왕 세조 때 병조판서에 임명된 남이를 유임시켰다가 곧바로 번복해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으로 강등한다. 한 달여 후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하자 예종은 남이와 측근들을 국문한다. 모진 매질을 견디지 못한 남이, 강순 등으로부터 역모를 인정하는 자백을 받아낸 예종은 이들을 환열(사지를 찢어 죽임)하고 7일간 효수(목을 베어 매달아 놓음)하게 한다.

‘남이의 옥사’로 숱한 처형

이 사건으로 서른 명이 넘는 사람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연좌로 유배됐다. 또 남이의 어머니도 국상 중에 아들에게 고기를 먹이고, 아들과 간음했다는 죄까지 더해져 환열됐다. 세간의 소문에 따른 것이었다. 그로부터 350년이 지난 1818년(순조 18) 남이의 방계 후손으로 당시 우의정이던 남공철이 남이의 옥사는 유자광의 무고였다며 신원을 청함에 따라 남이와 강순은 관작과 명예를 회복한다.

1469년 11월 예종은 즉위 1년 3개월 만에 족질(足疾·발 병)이 악화돼 급사한다. ‘어릴 적부터 발에 조금 헌 데가 있었는데, 추위가 심해지면서부터 아프기 시작했다’며 본인이 직접 얘기한 고질병이었다. 우리 나이 스물에 세상을 뜬 그는 자연사한 가장 단명한 왕이었다. 단종은 열일곱에 타살됐다. 예종이 죽자 그의 아들 제안대군 대신, 죽은 형 의경세자의 차남인 자을산군이 왕위를 잇는다.

안순왕후는 예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제안대군과 현숙공주의 어머니다. 예종은 세자 때인 1460년(세조 6)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이듬해, 열일곱 살 세자빈은 원손(후에 인성대군으로 추봉)을 낳고 며칠 만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원손 또한 세 살 때 죽었다.

세조는 죽은 세자빈에게 장순(章順)의 시호를 내리고 파주, 지금의 공릉(恭陵)에 장사 지냈다. 장순빈의 3년 상 후 1463년 새로 세자빈을 들이는 대신에 청천부원군 한백륜(韓伯倫)의 딸이 세자의 후궁인 소훈(昭訓)으로 간택된다.

소훈 한씨는 1468년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로 책봉된다. 남편 예종이 죽은 뒤 성종 때는 왕대비, 연산군 때는 대왕대비가 됐다. 평생 손위 동서인 인수대비에 치어 살았던 그녀는 1498년(연산 4) 54세의 나이로 인수대왕대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녀에게는 안순(安順)의 시호가 올려졌다. 

예종은 죽은 이듬해인 1470년(성종 1) 2월 형 의경세자의 의묘 북쪽 창릉(昌陵)에 묻혔다. 28년 후 안순왕후도 창릉에 남편과 함께 잠들었다. 창릉도 경릉처럼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왕과 왕비의 두 능침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창릉은 유난히 화재를 많이 겪었는데, 인조 때 두 번이나 능침이 타는 화재가 있었고 영조 때는 정자각이 불타 재건하기도 했다. 고종 때도 두 차례나 능침에 불이 났다.

/ 한국아파트신문 2022 유병갑

 

서오릉걷기

변은숙 걷기 모임 유유자적(cafe.daum.net/freewalking) 회원 

 

①버스 정류장~매표소~명릉~매표소(1.5㎞/20분)

 

‘서오릉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서오릉’ 푯말을 따라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뒤쪽에 있는 명릉부터 들른다. 출입구에서 숲길을 조금 걸으면 명릉이 보인다. 명릉은 숙종과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이번에 새로 단장을 한 정자각이 파란 겨울 하늘 아래 더욱 선명하고, 능은 전체를 돌아볼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매표소에서 구입한 관람권은 잘 챙기자. 나중에 익릉, 창릉을 들를 때 필요하다.

 

※서오릉 입장 시간

동절기(11~2월) 6:30~16:30 / 하절기(3~10월) 6:00~17:30
매주 월요일 정기휴무 / 문의 (02)359-0090

 

관람요금

대인(19~64세) 1000원, 소인(7~18세) 500원, 6세 이하와 65세 이상은 무료.

 

②매표소-수경원-익릉(0.5㎞/10분)

 

명릉을 다 보고 난 후, 다시 매표소로 돌아와 출입구로 들어간다. 출입구 앞 작은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갈림길에서 오른쪽 수경원, 익릉 방향으로 간다. 걷다 보면 수경원과 익릉이 차례로 나온다. 수경원은 영조의 후궁이며 우리가 흔히 사도세자로 알고 있는 장헌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무덤이고, 익릉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창릉 근처의 숲길.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③익릉-숲 산책로-창릉(3.0㎞/60분)

 

익릉을 보고 나와, 홍살문 오른쪽으로 나있는 길로 접어든다. 잠시 후 나오는 갈림길 앞 산책길 안내판에서 오른쪽 숲길로 들어간다. 소나무길이다. 15분 정도 걸으면 소나무길과 서어나무길로 나뉘는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서어나무길로 간다. 야트막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이어지며 겨울 숲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호젓하고 한가한 나무 사이를 걸으며 찬 공기 속에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향긋한 나무 향을 맡아보자. 느린 걸음으로 40분 남짓한 거리를 걷는 동안 몇 군데 갈림길이 나오는데 정식 산책로만 따라가자. 안내판이 곳곳에 있어 길을 헤맬 염려는 없다.

 

④창릉-홍릉-대빈묘-경릉-순창원-매표소-버스정류장(1.5㎞/30분)

 

숲길이 끝나면서 오른쪽에 창릉(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무덤)이 보이고, 왼쪽에는 간이화장실이 있다. 창릉부터 매표소까지는 단풍나무길이다. 단단하게 겨울을 견디고 있는 단풍나무의 겨우살이를 엿볼 수 있다. 곧 왼쪽에 홍릉(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무덤)이 나온다. 홍릉을 지나 조그만 언덕을 넘어가면 유명한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의 묘소 대빈묘가 오른쪽에 나온다. 살았던 시절의 파란만장함에 견주면 초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묘소가 길가에 비껴 자리하고 있다. 경릉(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무덤)과 순창원(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무덤)을 지나면 다시 정문 매표소에 도착하게 된다.

 

● 총 걷는 거리: 6.5㎞

● 총 걷는 시간: 2시간

 

용두동432-71 서오릉메카 다슬기 02-357-4779

구산역에서 서오릉방면으로 3키로못미쳐 우측에 위치

 

우리나라는 이상하게도 도심 외각으로 나가면 장어, 삼계탕, 오리, 갈비집이 많다. 어디를 가나 이런 집들이 없는 곳이 없고, 또 보면 다 몰려있다. 서오릉 앞쪽 대로에도 이런 모습은 매한가지인데, 여기는 또 다슬기집이 몇 곳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이 바로 서오릉메카다슬기다.

 

다슬기 요리라는 것이 아무데서나 쉽게 만날 수 없는 것인데, 서오릉메카다슬기의 요리에는 모두 다슬기가 들어간다.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면 일단 다슬기를 작은 접시에 내주는데 이 작은 다슬기는 약간 짭쪼름한 맛에 특유의 끝맛이 있는데 그 맛이 이상하게도 계속 손이 가게 만든다.

 

다슬기 칼국수나 수제비를 보면 면과 수제비가 초록빛깔인데, 이것은 녹차를 이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슬기가 내는 색이다. 토장탕이나 다른 것들을 봐도 국물이 모두 초록빛이 도는 이유가 다슬기 때문이다. 메뉴들은 모두 맛이 있는 편이다. 다슬기가 외형상 우렁보다는 작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음식들을 꺼려하는 여성들에게도 괜찮은 편이다.

 

내부는 천장이 높아 그리 시끄럽지는 않다. 하지만 고급스럽거나 그런 분위기는 못되고 그냥 큰 대형음식점의 평범한 내부 인테리어를 생각하면 적당하다. 좌석은 온돌좌석과 홀로 나뉘어 있다. 주차장이나 다른 시설들도 대형음식점이라 여유가 있는 편이다. 서오릉을 지날 일이 있다면 한번 들러 다슬기 맛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용두동395번지  화동갈비(구황가네설등심) 02-386-5775

 

10년간 황가네설등심상호를 사용하다 2012년에 화동갈비로 바꾼 곳으로 돼지갈비로 유명하다. 불판은 얇은 특수합금 철사로 만든 '실실이석쇠'를 사용하는데 일명 피아노줄 석쇠라 불리며 숯의 향기가 고스란히 올라와 고기에 배고 눌러붙지 않아 양념갈비에 제격이다.

 

류경선 사장은 부드러운 고기맛을 내는 비결로 한돈 1등급 암퇘지만 쓰고 양념에 설탕대신 배를 갈아 넣어 은근한 단맛을 낸 것이 인기비결이란다. 음식맛은 좋으나 주차관리 홀서비스는 음식맛보다는 못하고 후식으로 메밀물막국수도 개운하다.

 

고양 용두동 서오릉 (tistory.com)

 

고양 용두동 서오릉

총면적 55만 3,616평으로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의 왕실 족분군인 서오릉은 서울 구산동사거리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데다,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인

chooga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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