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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서울 도봉동 도봉서원 천축사 자운봉 오봉 여성봉 만월암 석굴암

by 구석구석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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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로를 따라 의정부 쪽으로 가다가 도봉산역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그런 다음 200m 정도 가면 오른쪽에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매표소까지 걸어서 5분정도 소요된다. 매표소를 통과해서 100m 정도 가면 광륜사에 이른다. 여기서 왼쪽으로 포장된 길을 따라 600m(15분 정도) 걸어가면 도봉서원에 이른다.

포장된 길은 여기서 끝나고 문사동계곡 초입에서 오른쪽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 산을 오르다 보면 도봉대피소 앞 갈림길에 이른다. 왼쪽(서쪽)은 천축사와 마당바위로 오르는 길이고, 오른쪽(북쪽)은 만월암과 자운봉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길을 따라 다시 산을 오르다 보면 석굴암을 지나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으로 이어진 길과 만월암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도봉동 도봉서원 

청학길 신도봉사거리에서 도봉구청,도봉중교 방면으로 우회전 0.31km -도봉서원  

1573년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창건 때 도봉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1696년에는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이어 선현의 배향과 교육에 힘쓰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고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에 단이 설치되어 향사를 봉행해 오다가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으며,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매년 음력 월10일(춘향제) 9월10일(추향제)에 전국 유림 및 지역유지가 모여 전통향사를 지내고 있다.

 

천축(天竺)의 난야(蘭若)가 꽃을 피운 영험기도도량, 천축사(天竺寺) 02-954-1474

만장봉 다락능선 반대편에 위치 

천축사(天竺寺)는 서울시민이면 한번쯤 들러본 명산 중의 명산 도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 누구나 한번쯤 서울의 정경을 보기 원하는 사람이면, 산중에 산, 아름다운 산, 영험있는 산 도봉산을 찾아 갈것이다. 천축사는 일찍이 의상이 창건한 천년고찰로서 알려졌으며, 고려 때 지공이 그의 제자 나옹에게 영축산의 난야(蘭若)와 같은 곳이라 하여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함흥에서 서울로 귀환하며, 절을 중창하고, 명종 때 문정왕후가 화류용상을 헌납할 정도로 왕실과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근대에는 부대부인 민씨가 상궁들과 합심하여 삼신탱과 신중탱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관음의 기도도량으로써 부녀자들에게 인기 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천축사는 천년고찰의 명성답게 수많은 역사를 가지며, 누구나 한번쯤 영축산의 난야에서 관음에게 기도드리러 찾는 기도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천축사는 옛 사명을 이어 가며, 수많은 참배객들이 현세의 기복과 관음의 자비를 바라며 축원드리러 찾아 가는데, 산길을 오르는 곳곳, 그리고 발길을 옯기는 자취마다, 옛 선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먼 옛날 동대문을 지나 도봉산을 찾아 가는 길은 지금의 길처럼 평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왕비가 직접 기도를 드렸던, 그의 종속이 기도를 드리러 길을 떠났던 천축사를 찾아 가는 길은 그 자체가 수행의 길이었을 것이다. 궁전에서 출발하여 발길을 옯기는 곳곳마다 마음속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관음보살을 외치며 발길을 옮겼을 것이며, 궁전에서 하사한 시주물에 흠집이라도 생길까 조마조마하던 마음은 오죽했을까?

이처럼 도봉산을 오르는 길마다 그녀들의 정성과 기복을 바라는 흔적들이 돌계단 구석구석마다 남아 있는 듯하다. 깍아 지른듯한 절벽을 올라 천축사 가람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 한숨을 쉬며, 또 한번 읊조린 말 관음보살..... 지금도 그렇듯 언제나 힘들고 지칠때 누구나 찾는 그 한마디가 관음보살. 관세음보살일 것이다. 한발 한발 어렵게 내딛을때, 그리고 힘들고 지친 어깨를 따스히 감싸주는 자비의 손길을 느끼고 싶을 때 천축의 계단을 올라가 보자.

지금은 평탄한 등산로가 정돈되어 있어 힘들게 오르진 않지만, 입구에서 천축사의 기와와 모래를 짊어지고 오르는 보살들의 굽은 허리를 보면, 그 옛날 상궁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들이 바라는 마음은 예전의 상궁들의 마음과 다르겠지만, 현세의 기복 즉 우리가장, 우리가족,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관음의 자비를 입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동일한 것일것이다.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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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00대명산 '도봉산'

도봉산 오르는 초입은 장터였다. 돈 내지 않는 매표소를 거쳐 광륜사를 지나 도봉서원 가는 길로 접어들어도 길은 내내 장터였다. 산에 올 때마다 느끼게 되는 바지만 요즈음 서울 근교의 산은 산이 아니라 유원지고 놀이터였다. 사람들은 곳곳에 둘러앉아 이미 취하여 흔들거렸고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로 길은 장터보다 더 소란스럽고 붐비었다.

도봉산장을 지나 다락능선 가는 길로 우회전 하자 산은 가팔라지고 사람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제서야 산 맛이 났다. 나무들은 손을 들어 하늘을 받치고 섰으나 아직 봄의 편지를 못 받았는지 물 오르기에만 바쁘고, 진달래 몇 그루가 꽃을 피웠으나 제대로 된 화신이라 부르기는 일러 보였다. 봄은 아래 마을의 꽃 잔치에 빠져 여기까지 올라올 여념이 없는 듯 하였고, 나무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자운봉은 추운듯 돌아앉아 있었다.

만월암을 옆으로 비껴 다락능선으로 올라서자 도봉은 그의 위엄있는 성채를 건너편에 드러내었다. 바위로 만들어진 거대한 성채는 그곳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진입을 막으려는 듯이 곳곳에 해자의 덫을 놓고 냉냉하게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해자의 덫은 위험스럽고 험난하고 길었다. 쇠파일에 연결된 쇠줄에 의지하여 가파른 바위를 타고 넘어야하는 고행에 가까운 노정이었다. 그나마도 한 번에 한 사람밖에 지나갈 수 없어 등산객들은 밀렸다.

바위절벽과 쇠줄을 잡고 오르내리는 길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막상 포대능선에 이르자 길은 대부분 아슬아슬한 바위절벽 길이었다. 간신히 해자를 빠져나와 신선대에 올라섰다. 자일 없이 오를 수 있는 도봉의 최고 높은 곳이었다. 바람이 세찼고 쇠난간에 의지하여 등산객들이 매화처럼 피어있었다.

자운봉의 바로 뒤편에 있는 신선대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기가 막혔다. 멀리 왼편으로는 수락산이, 오른편으로는 북한산 백운대가 아스라이 보이고, 곁에서는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이 그 위용을 당당하게 곧추 세웠다.

신선대에서 오봉가는 길은 다시 호젓하였다. 몇 곳의 오르막 내리막이 있었으나 비교적 수월하였고 그나마 나무 계단으로 만들어진 데가 많아 안전하기까지 하였다.

오봉에 닿았다. 다섯 개의 기막히게 잘 생긴 바위들, 그러나 사람 아무도 없어 약간 적적해 보였다. 고파 오는 배를 물 한 모금으로 달래며 행진을 계속했다. 솔나무 숲길이 아늑하고 정감스러웠다.

 신선대에서 우이암 방향으로 가면 칼바위능선을 돌아서자 저 앞으로 인수봉과 백운대가 위용을 드러낸다. 능선 길의 바위 위에는 예의 소나무들이 단단한 바위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꿋꿋한 기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위 능선 길을 벗어나 내려오는 길은 평탄하여 쉬운 길이다. 길도 평탄하고 완만한 경사의 내리막길로 우이암이 저만큼 바라보이는 곳에서 왼편 보문능선길로 하산하면 된다.

바위능선에서 바라보는 오봉 /이승철

이코스는 도봉산에서 가장 좋은 능선길로 산행하기가 편하다. 능선길에서 내려와 근처의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넓은 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가의 도봉사 담장에는 기다랗게 그려놓은 벽화가 눈길을 끈다.

신선대 - 오봉을 거쳐 드디어 여성봉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3년 만에 다시 보는 그녀는 그동안 조금 늙어 보였다. 하나 있는 음모는 잎이 떨어지고 변색되어 '매가리'가 없어졌고, 음순 가에는 누가 제 멋에 흘리고 간 정염의 흔적인지 찌꺼기가 지저분하였다. 3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났다.

/ 오마이뉴스 2007 이승철

2023.4월 여성봉에서 바라보는 오봉

 도봉1동 산 29-1 만월암  02-955-3719 / 다락능선에 위치 

도봉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인 조계사의 직할사찰이다. 도봉산 만장봉 아래 커다란 바위를 지붕삼아 지은 작은 암자가 하나 자리한다.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 어디에도 절의 역사가 전하지 않는 작은 토굴이다. 그렇지만 만월(滿月)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만월암은 약사유리광여래의 맑고 깨끗한 현실에서의 만월세계라 할 수 있다.

이곳 만월보전에 조선시대 모든 중생의 아픔과 괴로움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조성한 약사유리광여래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이름 모를 수 사람들은 이곳 깊은 산 속 바위틈에 나투신 약사여래의 불신에 의지하며 힘든 나날을 이겨 나갔고, 오늘날도 그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만월암에는 육신의 병은 물론이고 마음의 병까지도 온화하게 어루만져 주셨던 약사여래의 숨결이 가득함을 느낄 수 있다.

 

만월암에서 마당바위방향으로 위치한 석굴암

도봉산 선인봉 아래 자연적으로 생긴 바위 동굴에 불상을 모신 암자이다. 비탈진 절벽에 있어서 석굴암 암자와 만월보전, 종각과 종무소오 나한전의 건물만이 있다. 석굴 안에 암자가 있다는 점과 도봉산 바로 아래 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주변 전망이 좋은 편이다. 

북한산과 도봉산이 위치한 북한산국립공원은 보기 드문 도심 속 자연공원으로 그 산세가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공원은 우이령을 경계로 북쪽으로는 도봉산, 남쪽으로는 북한산으로 나뉘는데 화강암 지반이 침식되고 오랜 세월 풍화되면서 곳곳에 깎아지르듯 자리한 도봉산의 바위 봉우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낸다. 도봉산의 주봉인 자운봉에서 남쪽으로 만장봉, 선인봉이 있고, 서남쪽으로 관음봉이 있는데 이 곳 중턱에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은 ‘석굴암중수기(石窟庵重修記)’ 에 이르기를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 자락이 빙 둘러 모여 있어 마치 많은 별들이 북극성을 껴안아 감싸고 있는 것 같다’라는 내용으로 암자의 비경을 자랑하고 있는데 과연 사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 설명이 과장이 아님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석굴암에 오르려면 우이령길이라고 불리는 국립공원 내 산책길을 따라야 한다. 우이령길은 서울 우이동과 양주 교현리를 연결하는 작은 길로, 1968년 무장공비의 청와대 침투사건으로 인해 민간인의 출입이 전면 금지되었었다. 2009년 7월 이후 탐방 예약제로 개방되어 우이령 계곡과 숲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며 맨발 체험이 가능하여 현재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석굴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석굴암의 창건 및 연혁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신라 문무왕 대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처음 세워졌으며 고려시대 공민왕 시절 왕사를 지냈던 나옹화상(懶翁和尙)이 3년간 수행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석굴암’이라는 절 이름은 법당 옆에 거대한 석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여러사찰이 그러하듯 석굴암의 창건과 관련한 정확한 기록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봉선사본말사지(奉先寺本末寺誌)’ 제2편 ‘석굴암중수기’의 내용으로 보아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원당으로 늦어도 15세기 중엽 경에는 건립되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석굴암은 수차례 폐사와 중창을 반복하다가 한국전쟁으로 전각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법당은 완전히 전소되고,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석굴안에는 전화로 인해 아미타불, 지장보살, 나한과 수구다라니 목판만 남아 있고 모두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후 1954년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주지로 부임하신 초안스님에 의해 중창 복원되었다. 1975년 대웅전 중수를 시작으로 신성각, 칠성각, 칠성탱화, 양사탱화 등을 조성·봉안함으로써 오늘날의 석굴암 기틀이 마련되었다.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박지연 양주시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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