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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제주시

제주 상귀리 항몽유적지

by 구석구석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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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지정사적396호 항목유적지

제주시 애월읍 상귀리 일대에 위치한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고려시대 때 몽고(蒙古)와의 굴욕적인 강화에 반발해 주권회복을 부르짖으며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했던 삼별초(三別抄)의 최후의 격전장이다.

 고려원종 11년(1270년) 고려조정이 몽골의 침입으로 굴욕적이 강화를 맺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맞서 김통정을 총수로 한 삼별초가 끝까지 몽골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며 강화도에 남아있던 왕족 승화 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항몽정부를 수립한 후 진도로 남하하여 용장 산성을 쌓고 항거 하였다. 

▲삼별초의 최후의 격전장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그러나 1271년(고려원종12년) 진도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 해오던 삼별초는 고려.몽골연합군에게 밀려 마지막 항전지로 제주도를 선택해 항파두리에 진지를 마련하고 내.외성을 쌓았다.

내성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성곽을 이중으로 구축하였으며, 고려.몽골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갖가지 방어시설은 물론 광아와 궁궐까지 갖춘 전전후 요새였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외성은 흙과 돌멩이를 섞어서 쌓은 토성으로 그 길이가 6km에 달하며 오름과 하천을 연계한 천연적 방어선과 넓은 조망권을 갖춘 전투진지로서 최상의 지리적 지형적 환경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몽골과 고려조정에 회유에도 불구하고 삼별초군이 굴복하지 않자 고려.몽골연합군 1만2000여명이 1273년(고려원종 14년) 4월 함덕포와 비양도로 상륙하여 공격하였다. 삼별초군은 이에 맞서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김통정 장군은 붉은 오름으로 퇴각한 뒤 자결함으로서 몽골 침입이후 40여년에 걸친 삼별초군의 항쟁은 끝이 났으며 제주에서는 2년 6개월을 항쟁하였다. 이후 몽골에 점령당한 제주도는 이후 목장을 경영하는 방식이나 언어와 생활습득 등에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또 삼별초군과 이들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들어옴으로서 토목과 건축기술, 새로운 농경법이 보급되었으며 중앙의 문물과 제도, 불교문화가 제주에 전래되었다. 

▲ 사진 한국관광공사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1976년 9월 9일 제주도 기념물 28호로 지정되었다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항쟁하다 순의한 삼별초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성역화 사업지시로 1977년 7월 21일 부로 토성의 일부 복원과 석성 축조, 순의비와 순의문을 건립하고 1978년 6월 완공하여 1997년 4월 8일 사적 39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7백여 년 전 이 땅을 짓밟은 몽고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피맺힌 항전을 벌인 삼별초와 견고 했던 항파두리성. 돌쩌귀, 기와, 자기, 연못터 등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순의비, 순의문, 항몽유적기록화 7폭이 있는 전시관은 역사교육 시설로 활용되고있다. 

자료 - 제주관광신문 박상언기자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에서 장수물, 안오름, 극락봉 등 많은 유적이 발견되어 전시 및 관리되고 있다.

장수물은 움푹패인 암석의 모양이 오른발 엄지발 가락 위치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김통정 장군이 깔고 앉아 있던 방석을 바다로 던지고 발을 여기에 디뎌 탈출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와요지는 장수물 북동쪽 200m에 농업시험장 진입로로 들어가다 왼쪽 밭으로 들어가면 큰 길쪽에 도랑이 있고 화구 부분만이 도랑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을 따라 가마가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노출된 부분을 보면 넓적한 현무암 잡석과 진흙을 빚어서 만든 것으로 보이고 가마의 좌우측 토층에는 많은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으며 어골문 복합문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토성내부에서 출토되는 것과 흡사하고 구전으로도 삼별초 군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항파두리 남쪽 1km지점에 위치한 극락봉. 삼별초군의 무술연마장이었고 정상의 분화구는 활터로 이용했으며 산의 정상은 오르내리는 훈련코스로 삼았다고 한다.

살맞은 돌은 극락봉 북쪽에 있는 자연입석인데 여기화살이 박혀있어 살맞은 돌이라고 한다.

장털못은 항파두리성 동북쪽 성안에 지형이 낮은 지대로 성안의 물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게 되어 자연적으로 연못이 형성되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밭과 과수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물이 고였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돌쩌귀는 항파두리성을 쌓고 동,서,남,북 4대문을 내면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의 성문의 규모가 확실치 않아 건축물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며 항파두리성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 10개를 모아 전시하고 있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삼별초의 최고 지휘관인 김통정 장군. 김통정 장군은 지혜와 덕, 용맹성을 두루 갖춘 장수로 부하들로 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당시 원나라(몽고)세조는 개성에 있던 김통정의 일가 친촉인 김찬과 이소등을 비롯해 5명의 지인을 골라 제주로 보내 김통정을 회유하려고 했다.

그러자 김통정은 결사항쟁이라는 자신과 삼별초의 굳은 의지를 원나라 세조에게 전달하기 위해 김찬 만을 만을 살려두고 나머지 4명은 모두 죽여버린다. 

그 어떤 협박으로도 김통정을 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여.몽 연합군은 제주로 내려가 삼별초를 제압하도록 한다. 삼별초 공격준비를 마친 여.몽 연합군은 1273년 4월 제주에 상륙하고 곳곳에서 삼별초와 일전을 벌인 끝에 항파두리성 까지 함락시킨다.

당시 성밖에 나가있던 김통정은 항파두리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탈출한  부하들로부터 듣게 되고 울분을 삼키며 최후의 1명까지 항쟁할 것을 다짐한다.

이에 김통정은 부하장수 이문경에게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항파두리성 남동쪽에 있는 오름에 집결해 진을 치도록 한다. 

결국 수적열세에 몰린 삼별초는 여.명 연합군에 의해 죽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자며 김통정 장군을 비롯해 군사 모두 자결한다. 이들에 한이 서린 핏물은 오름에 흙을 붉게 물들였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오름을 가리켜 ‘붉은 오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 자료 - 제주관광신문 박상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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