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팔경 / 관촉사, 탑정호,대둔산, 계백장군유적지, 쌍계사, 개태사, 옥녀봉, 노성산성
제1경 관촉사
관촉사 경내에는 은진미륵으로 더 알려진 고려시대의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조성되어 있다.
고대의 것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로 알려진 보살입상의 조성에 대해서는 조선 영조 19년(1743)에 세워진 사적비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 의하면 고려 광종(태조 왕건 세 번째 부인의 아들) 20년(969)에 승(僧) 혜명(慧明)이 조정의 명을 받아 21년(970)에 기공하였으며, 목종 9년(1006)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불상의 조성에 2대 왕조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무려 37년간이란 세월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또 보물9호인 석등을 비롯하여 오층석탑과 배례석이 미륵불을 위시하여 일렬로 불당과 함께 배치되어 있다.
제2경 탑정호
논산시 부적면, 가야곡, 양촌면일원에 위치한 탑정호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잉어,쏘가리,메기등 담수어족이 풍부하고, 논산8경 중 제2경에 속하며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탑정호와 주변 농경지가 제공하는 풍부한 먹이로 철새들의 충분한 서식조건을 갖추고 있어 겨울 철새들의 낙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201호 흰 큰고니, 천연기념물 327호 원앙이, 구제보호조인 가창오리, 고방오리, 알락오리, 쇠오리등 4만여마리가 점점이 호수를 채색하고 있다.
수문을 지나 약 200m 호수를 따라 나있는 차로를 따라가다 보면, 음식점과 카페가 자리 잡고 있어 찾는이로 하여금 여행의 즐거움을 더하게 한다.
또 이곳은 수면이 도로 가까이 올라 올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계곡을 이루던 주변 산세가 호수면으로 뻗어 다도해 같은 자연스러움이 있어 더욱 좋은 곳이다.
제3경 대둔산
대둔산은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우며 기암절벽등의 웅장한 형태는 옛부터 시인 묵객의 절찬을 받을 만큼 아름다우며, 군지계곡, 수락폭포, 마천대 선녀폭포, 낙조대, 수락계곡 등 다양한볼거리와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논산시 벌곡면쪽의 수락계곡은 삼복더위에도 냉기가 감도는 계곡으로 1km정도의 깍아지른 절벽과 저녁햇살에 비쳐지는 기암괴석의 절경은 한폭의 산수화로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논산시 벌곡면 수락리의 관리사무소를 지나 오르는 대둔산 산행길은 입구부터 절경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 수락폭포와 군지계곡은 초입 산행길에 등산객들에게 산행의 즐거움을 한층더 안겨준다.
군지계곡을 지나면 절벽부에 철 다리로 220계단을 만들어 놓아 등산로로 이어 질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곳을 오르내리는 길은 경사가 급해 스릴마저 느낄 수 있다.
수락계곡에서 대둔산 정상인 마천대까지는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제4경 계백장군유적지
계백(階伯 ; ?-660)은 백제의 장군이다. 554년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641년 의자왕(義慈王)의 즉위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더욱이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내가 혼란해지고,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정변 등 국내 문제로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으로 되자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되었다. 결국 660년(의자왕 20)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의자왕은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여 1당 10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번을 사워 이겼으나 백제군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했다. 이 황산벌전투로 백제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했으며, 계백장군은 통한을 품고 이곳에 묻혀 있다.
제5경 쌍계사
쌍계사는 논산의 남방 대둔산의 북록 산곡간에 위치한 큰 사찰이다. 이 사찰은 불명산이란 산록의 동쪽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보물 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이 있다.
이 대웅전의 꽃무늬창살은 그 기교가 신비에 가깝다. 쌍계사의 중건 시기는 자세하지 않으나 현재 남아 있는 중건비에 의하면 이 사찰이 고려말에 중건되고 있는 내용을 전하면서 그 이전에 백암(白庵)이란명칭의 절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찰은 암자형의 불사로 고려시대에 존속되다가 말기에 크게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찰에는 보물 408호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웅전의 좌측에 나한전과 칠성각이 있으며 대웅전의 전면 좌측에 명부전과 우측에 요사가 배치되어 있다. 사찰 입구에는 부도군과 중건비가 위치하고 있다. 한편 이 사찰에 유존된 유물로는 직경 1.82cm의 대형 법고와 전패 2개가 있으며, 공주의 갑사에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가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제6경 개태사
개태사는 전성기엔 천 여명의 승려가 상주하여 화엄법회를 갖는 등 승려 양성도량 역할을 담당하였고, 한때에는 8만9암자(八萬九庵子)를 소속시켰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장경불사(藏經佛事 :校正)도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한다. 국가의 변고(變故)가 있을 때마다 중신(重臣)들이 호국기도(護國祈禱)를 드리던 고려시대 최대의 호국수호사찰(護國守護寺刹)이다.
그 후 우왕(遇王) 2년부터 14년까지 3차례에 걸친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방화 약탈되고,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이곳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개태사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빛을 잃은 개태사는 이후 5백 여 년 동안 폐사된 채 내려오다가 1934년 김광영불자(金光榮佛子:大成華菩薩)에 의해 재건되었고 매몰되었던 미륵삼존석불(彌勒三尊佛)과 5층탑을 세우고 일시 개태도광사(開泰道光寺)라 칭하였다.
개태사 석불입상은 보물 제219호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고려시대의 석불로서 체구가 우람하고, 다른 불상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이 아닌, 조금 굳어 있어서 돌과 잘 어울리는 조금 딱딱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소발이 단조로운 느낌을 주고, 편단우견(偏袒右肩 : 법의를 오른쪽에 걸치고, 왼쪽 어깨를 드러낸 모습)을 한 모습이 인상적인데, 이는 좌우 협시보살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에 대한 공경의 예법이라고는 하나, 도리어 상대방에 대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제7경 옥녀봉
강경읍 북옥리에 강경산이 있는데 이 산을 옥녀봉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아주 맑았고,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이 있어 경치가 더없이 좋았다. 그래서 달 밝은 보름날 하늘나라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며 놀았다.
한번 다녀간 선녀들은 영광으로 알고 자랑을 하였지만 옥황상제의 딸은 한번도 내려오지를 못했다. 선녀들이 어찌나 자랑하는지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해 팔월 보름날 옥황상제의 딸은 허락을 받아 이곳에 내려오게 되었으나 그 선녀는 다시 못올 길을 떠나고 마는데 끝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고 말았다.
지금도 이 산 위에는 봉우리진 곳이 있는데 이 곳을 옥녀가 죽은 자리라 하여 옥녀봉이라 부르고 그녀가 들여다보던 거울은 바위로 변하여 용영대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곳에는 강경읍내와 멀리 논산시내, 드넓게 펼쳐진 논강평야와 금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제8경 노성산성
노성산성은 노성면 소재지에서 서쪽에 있는 노성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자연적인 지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둘레 약1km를 석축으로 거의 완벽하게 쌓은 성지이다.
동면, 북면, 서면을 활석을 다듬어 네모지게 하여 쌓았고, 봉우리 정상에는 장대지로 추정되는 곳과 동벽으로 약간 내려온 곳에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우물지가 4개소 있고, 건물지로 보이는 여러 개의 유지가 있으며 백제시대의 기와편과 토기편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이 성은 동쪽으로 계룡산이 막아서고 남쪽으로는 논산평야가 바라다 보이며 북쪽으로는 공주, 서쪽으로는 부여방면이 한눈에 조망되는 요지로, 연산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대치했던 방어선에 위치한 산성이다.
그 중요성 때문에 노성산성은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자료 - tour.nonsan.go.kr 사진겔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