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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강진명소

by 구석구석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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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 
‘남도 답사 1번지’로 불리는 전남 강진은 역사 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이곳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고,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이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집필한 생가도 남아 있다.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인 고려청자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전남 강진은 강처럼 좁은 강진만이 육지 깊숙이 들어와 탐진강 하구와 맞닿는 지형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강진 어디에서나 쉽게 바다에 닿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강진 동쪽에서 강진 서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강진읍을 거쳐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 때문에 강진여행 일정은 강진만 동서로 나뉜 지형을 따라 동선을 잡아야 한다.

강진중앙에 있는 영랑 유적지와 강진 서쪽의 다산 유적지, 강진 동쪽의 고려청자 발상지, 강진 북쪽의 전라병영성과 월출산 자락을 중심으로 일정을 정리하면 일목요연하게 강진을 둘러볼 수 있다.

월출산의 여러가지 모습 예로부터 가장 먼저 달이 난다고 하여 삼국시대에는 월라산, 고려시대엔 월생산,조선시대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월출산이라고 불리워 지고 있으며,소백산맥 무등산줄기 남쪽에 위치하고, 약 6천만년전 관입된 화강암으로 형성된 기암괴석의 영산(靈山). 가장 높은 주봉 천왕봉이 주변에 구정봉,사자봉,주지봉 그리고 도갑봉<도갑산=약376m)등을 거느리고 있다.

월출산

산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 진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기암괴석은 물론 도갑사,무위사,천황사등의 사찰이 있으며 무위사대웅전극락보전(국보13호), 벽화(국보12호),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144호)이 있으며, 도갑사 해탈문(국보 50호),월출산의 명물 길이51m,너비0.6m,높이120m의 구름다리,용추폭포,구절폭포등이 있고,금릉경포대같은 계곡등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게 할 정도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월출산 자락에 있는 무위사는 617년(신라 진평왕 39년)에 원효대사가 세운 절로, 불교 벽화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성보박물관이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를 나와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길 양옆으로 녹차밭이 넓게 펼쳐진다. 월출산 바위와 어우러지는 차밭의 정경이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곳은 강진 평양다원. 방문객들이 시원한 차밭 전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전망대도 마련돼 있다. 

월출산과 녹차밭

웅장한 월출산의 골엔 아흔아홉이나 되는 절터가 있으며 그 중에서도 천황봉 정상 남쪽에 있는 삼존암(三尊庵)터와 원천수가 흐르는 샘이 있어 그 이름도 아름다운 경포대(鏡布臺)를 만들고 누구에 의해선지 몰라도 15세기 이전부터 금릉(金陵)골이라 애칭되며 온 산에는 신선들의 감로수(甘露水)인 작설차가 자라고 있다.   

  월남사지는 월출산을 뒤에 업고 남향을 하고 있는 평지가람터이다. 월남사는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소실(燒失)된 후 지금까지 복원불사가 이루어 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현재 사지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 되어 있으며 석탑 뒷 편에는 법당지로 보이는 지단부와 초석들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2m 높이의 네덜란드 건축 양식 돌담 볼 수 있는 병영마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일원은 사적 제397호 전라병영성과 병영마을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5백여 년 동안 전라도 육군의 총 지휘부가 있던 전라병영성은 1417년(태종 17년) 건립된 총 길이 1060m 규모의 성(城).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 장군이 꿈속에서 계시를 받고 눈의 자국을 따라 지었다 하여 설성(雪城)이라고도 부른다.  

17세기 우리나라 바다에서 표류하다 잡힌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압송돼 약 8년간 억류돼 있던 곳으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에 함락된 뒤 막대한 피해를 입고 이듬해 폐영됐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 방치돼오다 지난 92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며 관리가 시작됐고, 97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뒤부터 복원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찾아가는 길

강진읍에서 장흥 방향으로 이어지는 2번 국도를 따라가다 군동에서 좌회전한 뒤 병영성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병영성으로 들어가기 전 오른쪽으로 병영마을이 먼저 보인다. 마을을 둘러보고 성에 들렀다 홍교로 가면 된다.  

우리 나라 서정시인의 거묵이며 시문학파 동인이었던 영랑 김윤식이 1902년 출생 하여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 하기까지 46년을 살던 영랑생가는 영랑의 시적 소재의 산실이다.

찾아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에서 강진으로 이어지는 2번 국도를 따라 강진으로 들어간 뒤 강진군청·영랑 생가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강진군청 담장을 끼고 돌아가면 바로 영랑 생가가 나온다.
 
따스한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은 남쪽의 백련사 동백꽃은 2월 말부터 머금기 시작하여 3월 중순쯤에 빨간 동백꽃 천지를 이르는데 그 장관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3월 말쯤이면 떨어져 땅에 지천으로 깔려 있어 이 또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백련사로 올라 가는 길 양 옆엔 너도밥나무와 어우러진  백련사 동백숲은 너무나 울창해서 나무 아랫쪽은 대낮에도 어둡고 한 여름에도 서늘하다. 그 서늘한 길을 올라 가다 보면 숲이 주는 싱그러움과 상쾌하기까지 한 기분은 글로 표현 하기 힘들 정도이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 전경(경남일보)다산초당에서 또 하나 빼놓지 말고 보아야 할 곳은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간 형 손암 정약전을 그리며 시름을 달래던 정자인 천일각. 다산은 날마다 바다를 향해 있는 이 정자에 올라 흑산도 쪽을 바라보며 형을 떠올렸다고 한다. 지금은 간척사업 때문에 천일각 아래로 황금 들판이 펼쳐지지만, 한 번쯤 그 자리에 서서 다산의 외로움과 남다른 형제애를 느껴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하다. 

다산 정약용과 혜장스님이 벗을 만나기 위해 걸었다는 만덕산 숲길/오마이뉴스 이현숙

찾아가는 길

사의재 앞에서 우회전한 뒤 강진군청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 강진 읍내도로를 만나면 다시 우회전해서 18번 국도를 따라간다. 호산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다산초당 이정표를 따라가면 다산초당이 나온다.

차는 다산초당 입구 주차장에 세우고 다산초당~오솔길~백련사~오솔길~다산초당의 순서로 걸어야 한다. 1801년 강진으로 유배 온 정약용이 1808년 강진읍에서 옮겨 와 1818년 해배 될 때 까지 10여년간 살았던 곳이 다산초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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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만덕산 기슭 다산초당은 다산이 강진 유배생활 18년 가운데 10여 년을 보내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백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집필한 곳이다. 다산초당 양쪽으로 다산이 머물던 ‘동암’과 제자들이 거처했던 ‘서암’이 남아 있으며, 산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다산이 직접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연지석가산’이라는 이름의 인공 연못도 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다산은 차(茶)에 깊게 매료됐다고 하는데, 다산초당 앞에는 찻잎을 덖어 차로 만든 뒤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내는 데 쓰던 평평한 돌 ‘다조’가 그대로 남아 있어 차에 대한 다산의 사랑을 엿보게 한다. 

다산초당

 

귤동마을에서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

 

대석문

강진에서 완도쪽으로 약 12분여정도를 가다 보면 양쪽이 기암 괴석으로 이루어진 협곡 사이로 도로가 뚫려 있다.이곳이 바로 강진의 소금강이라 불리우는 두 개의 석문중 대석문(만덕산과 봉덕산 사이)이고 여기서 약 600~700m를 가다가 우회전하면 소석문(봉덕산과 덕룡산 사이)을 만날 수 있다.

만덕산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석문산은 규모는 작지만 월출산보다 빼어나다. 석문사이로 봉황천의 맑은 물이 흐르고소나무 숲의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피서지로도 좋다.

석문공원

덕룡산과 주작산 사이 완만한 경사면에는 수양관관광농원(수양리조트,061-433-3456)이 자리 하고 있다.강진읍에서 차로 약 20분거리에 있는 이 리조트는 1만 9천 평의 부지에 현대식숙소와 식당그리고 단체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야외 무대까지 마련된 조용하고 쾌적한 강진의 명소이다.

2024 주작산 진달래
2024 주작산

이 휴양소의 좋은점은 무엇보다 주변 환경과 경관이 빼어나다는거. 더구나 덕룡산과 주작산이란는 두 명산의 품안에 들어 있어 등산과 자연 생태학습을 겸할 수가 있으며  계곡에서 흘러 내리는 시원한 물은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소석문과 봉황천

대구 청자사업소에서 동쪽으로  약 500여m를 가다 보면 사당리 당전마을 앞 도로상에는 천연 기념물제 35호로 지정 된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수령 400년의 푸조 나무가 서 있다. 높이가 16m 둘레가 8.16m인 이 노거수는 한 뿌리에서 치솟아 땅으로부터 한 1m가 채 안되는 지점에서 가지가 여섯갈래로 갈라져 고르게 퍼져 있다. 

 사당리 푸조나무를 지나 계치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시멘트 도로를 타고 가면 저수지 위 용문리 항동마을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만 더 들어 가면 정수사가 나온다. 천개산 일대의 48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대웅전,나한전등 몇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정수사

다산 정약용, 영랑 김윤식과 더불어 강진을 대표 하는 수식어의 하나로서 강진 사람의 자랑거리이며 신비의 비색을  창출 해 낸 고려 청자.1977년 강진군이 고려청자 재현을 군의 특수 시책 사업으로 정하고 대구면 사당리에 청자 재현 가마솥 기공식을 가진 후 본래 모습의 청자 재현을 위해 많은 노력를 경주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웠으며 ,1986년 1월 청자 사업소를 개설하게 되었다.

마량은 에로부터 강진, 장흥, 해남, 영암으로 들어 가는 서남해안 관문이었으며,해상 무역왕 장보고가 활약 하던 시절엔 완도 청해진과 더불어 중국과 일본을 연결 하는 해로의 요충지였다.탐진과 탐라라는 지명이 제주도와 한반도를 연결 하는 통로였음을 가르쳐 준다.

지금도 마량 포구는 완도군의 고금,약산,금일,생일도등의 통로이며 신지도를 거쳐 완도로 가는 뱃길의 근원지이다.

마량방파제와 까막섬의 의몰/오마이뉴스

마량은 만호진과 만호성의 역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뒤로는 얕으막한 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에는 까막섬이 그림처럼 서 있고 더 멀게는 고금도를 비롯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와 어우려져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 시키게 할 만큼 아름다운 항구다.

 마량 앞 바다에 물이 들면 두 개로 갈라 졌다가 물이 빠지면 하나로 합쳐 지는 동그란 두 개의 섬이 있다.천연 기념물로 지정 될 만큼 울창한 숲으로 한 낮에도 숲 안은 컴컴할 정도로 까맣게 보이는 섬이 바로 까막섬(가막섬)이다. 

까막섬

/ 자료 - 강진군 그리고 월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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