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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김제 청도리 강증산

by 구석구석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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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사(歸信寺)는 김제 금산사에서 전주로 가는 고갯길에 있는 청도리 마을에 있다. 양귀자는 소설 <숨은 꽃>에서 "지난 가을에 귀신사는 우선 이름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고 썼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63호 귀신사부도

청도리 마을에 닿기 직전, 길 왼쪽 논 가운데 자리 잡은 "지친 신이 쉬"고 있는 부도에 들른다. 부도는 고승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무덤이다.

하대석에 비해 상대석이 지나치게 크다. 사람으로 치면 상체 비만인 셈이다. 그나마 가운데 받침돌에 여러 겹 연꽃을 새긴 것이 밋밋함을 겨우 피했다. 절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에 부도가 서 있다는 것은 이곳까지 절의 경내였던 때가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청도리 마을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서 귀신사로 올라간다. 앙상한 모습으로 마을을 감싸는 감나무들이 마치 부도 같다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친다.

절 마당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올라간다. 바야흐로 장중한 맞배지붕 건물인 대적광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 귀신사는 쓸쓸하다. 한여름 석 달 동안 쉴 새 없이 붉은 꽃을 피워내 이 소박한 절집을 장엄하던 배롱나무는 대적광전 옆에 조용히 머리를 조아린 채 서 있다.

 대적광전은 보수공사를 완전히 끝마쳐 주변까지 말끔히 정리돼 있다. 양귀자가 소설 <숨은 꽃>을 썼던 1992년부터 시작한 공사이니 십 년도 넘는 공사였다. 하도 말끔하게 정리해버린 탓인지 도무지 17세기에 지은 건물 같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귀신사전경, 보물 제826호 대적광전/안병기

 법당 안에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첫째 마디 쪽으로 뻗은 지권인 수인을 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셨다. 모두 흙으로 제작한 소조상에다 금물을 입힌 것이다.

삼불좌상의 몸집이 어찌나 커다란지 바라보는 내 눈과 마음을 옴짝달싹 못하게 압도한다. 대적광전이 앞면 5칸·옆면 3칸이나 되는 작지 않은 크기의 건물인데도 비좁게 느껴질 정도다. 길고 큰 불상 비례는 명나라 초에 유행하던 형식이다. 이곳의 삼불좌상은 명대 조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불상의 상호는 인자하고 부드럽게 생겼다. 크기에서 느끼는 중압감을 상쇄시켜주는 듯하다.

명부전/안병기

절 왼쪽 마당에는 탑재, 배례석과 장대석과 주초석, 기단석 등을 모아놓은 곳이 있다. 그 옆에는 석탑, 석등 부재 등을 모아서 쌓은 삼층석탑 형태의 탑 1기가 서 있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8)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라고 하며 전성기 때는 8개나 되는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대적광전 뒤에 있는 명부전 역시 대적광전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이 건물도 1993년에 보수를 했는데, 아직 단청이 칠하지 않은 채로 있다. 너무 깨끗해서 정이 가지 않는 게 흠이다.

문 옆에 금방이라도 무엇인가를 내리칠듯한 자세로 버티고 선 장군상 한 쌍이 인상적이다. 불단에는 육환장을 든 지장보살좌상을 모셨으며 지장보살의 좌우로는 도명존자와 시왕이 세워져 있다.

구순혈(狗脣穴) 누르기 위해 세운 삼층석탑과 조형물

계단 옆에는 드문드문 차나무가 심어져 있다. 내가 귀신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탑과 석수를 호위하는 신장처럼 수령 30, 40년 가량 된 느티나무 세 그루가 버티고 선 이 언덕이다. 이 언덕 앞에는 모악산 줄기가 굽이치듯 뻗어가고 뒤로는 푸른 대밭이 멋진 배경을 이루고 있다.

3층석탑과 석수가 있는 언덕으로 오르는 길/안병기

3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여러 장의 돌을 짜맞추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간단한 구조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거의 평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 이르러 처마만 살짝 들어 올렸다. 3층석탑 앞쪽에는 서쪽을 보고 엎드린 사자상이 있다. 그 위에는 남근석이 올려져 있다. 불교사상과 남근숭배사상이 결합한 구조물이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62호 3층석탑과 전북 유형문화재 제64호 고려시대 석수/안병기

 귀신사는 국신사(國神寺)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고려시대인 12세기 초에 이르러 구순사(狗脣寺), 귀신사 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름이 바뀐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런 구조물을 세운 것은 지형이 구순혈(狗脣穴)이어서 풍수지리설에 따라 터를 누르기 위하여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귀신사는 철따라 자목련, 수국, 라일락, 모란꽃, 영산홍, 매화, 배롱나무 꽃 등 많은 꽃이 피어나 쉴 새 없이 도량을 장엄한다. 그것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눈에 띈다.

그러나 애써 찾지 않으면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진짜 '숨은 꽃'도 있다. 귀신사 대밭, 대나무 사이 사이에 심어진 야생 차나무들이 그것이다.

/ ⓒ 2008 OhmyNews 안병기 

 

차나무

금산면 청도리 일대 증산교 교주 강증산 유적 

미륵신앙은 삼국시대 이래 민중의 가슴에 소리없이 자리 잡은 뿌리깊은 신앙이었다. 현재까지도 미륵신앙에 뿌리를 둔 종교들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증산도 역시 그 뿌리를 미륵신앙에 두고 있다.

증산교 교조 강일순은 모악산 자락 대원사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금산사에서 멀지 않은 구릿골에서 천하광구의 뜻을 펼쳤으며 죽기 전에는 "나를 보려면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므로 금산사에서 구릿골에 이르는 공간은 증산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겐 가장 성스러운 땅이다.

증산 강일순은 1871년 9월 19일 전라북도 고부군 서산리,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던 몰락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증산이라는 그의 호는 집 뒤에 있는 시루봉(甑山)에서 따온 것이다.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남의집살이와 나무꾼 생활을 하기도 했다.

1897년에는 처남 정남기의 집에 글방을 차려 학동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유·불·도교에 관한 서적과 전래의 비결서 등을 두루 읽었다. 그러나 서당은 이웃 고을에서 발생한 동학혁명으로 말미암아 1년여 만에 문을 닫는다.

동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이후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해 홀연히 천하유력의 길을 떠났다. 동학혁명의 과정을 몸소 겪으면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고 '광구천하'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샛말로 한다면 민족모순에 눈떴다고나 할까.

금산사 경내를 걸어 나오다 보면 견훤이 쌓았다는 견훤성문과 애국지사 김형렬(1862 ~ 1932) 선생비가 서 있다.

1903년, 강증산은 모악산 아래 구릿골에 '모든 병든 중생을 치유하겠다'라는 광제국이란 이름의 약방을 열고 천지공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제자 차경석의 이종누나인 고판례를 맞아 재혼하여 수부로 삼았다. 수부란 ‘뭇 여성의 머리’라는 의미다.

증산은 그녀를 후천 남녀동등의 세계를 열어 가는 존재로 내세웠다. "이 여인이 굶으면 온 천하 사람이 굶을 것이며, 이 여인이 먹으면 천하 사람들이 다 먹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스레트 지붕 건물을 헐고 '복원'한 구릿골 약방.

한편, 김형렬은 구릿골에서 성장했지만 환평으로 이사해서 살았다. 금구 내주평에서 살 적에 갑오동학혁명에 참가했다. 청주전투에서 죽게 된 것을 강증산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귀향한 뒤로는 동학과 인연을 끊고 가업에만 종사했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살던 김형렬이 강증산과 다시 만난 것은 1901년 7월이었다. 금산사 돌무지개문 위에 앉은 증산이 "김형렬을 부르고 계시더라"라고 증산도 도전은 서술하고있다. 모악산 대원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강증산이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고 '중통인의(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봄)'의 깨달음을 얻고 구릿골로 내려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형렬은 증산의 수제자가 되었다.

김형렬은 1909년 강증산이 죽은 뒤 강일순의 부인 고판례가 교단을 창립할 때 거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차경석의 전횡에 반발해 교단을 탈퇴했다. 그리고 1915년에는 직접 교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서울로 가서 불교진흥회를 조직하고, 곧이어 교단 명칭을 미륵불교로 바꾸었다.

김제 금산사에 본부를 두고 교세를 확장해나가다 그의 죽음과 함께 교단이 해산되었다.

김형렬은 일본 배척운동을 하던 중 1919년 치안을 위협한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일제 강점기 태동했던 종교들은 그렇게 은연중 항일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다 - "민중이 곧 한울님"

금산사 주차장에서 원평 쪽으로 오다 보면 용화동이 나오는데 그 마을엔 증산교 본부가 있다. 이상호·이정립 형제가 세운 것이다. 모악산 자락만 이런 증산교 교파가 50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증산교 본부

거기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관희교 못 미쳐 금평저수지가 시작되기 직전에 삼거리가 나타난다. 오른쪽 저수지가를 펼쳐진 길을 따라 서쪽으로 900여 m가량 들어가면 청도리 동곡마을이 나온다. 이곳엔 강증산이 광제국이라는 약방을 열었던 집이 있다. 이 집은 원래 김준상이라는 사람의 집이었다고 한다. 집 뒤엔 강증산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 대나무밭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금평저수지를 돌아가면 제비산 아래 구릿골이 있다. 하얀 건물은 예전 구릿골 약방 터에 살던 이가 운영하는 종이학 레스토랑.

이곳에서 8년 동안 머무르면서 강증산은 방 한 칸을 수리해서 조그마한 약방을 차렸다. 구릿골약방에서 사람들을 고치기도 하고 농악 장단에 맞춰 ""민중이 곧 한울님"이라고 천명하며 천지굿을 벌이기도 했다. 모든 물질과 생명체는 하나로 통일돼 있으며, 만물 사이의 원한을 푸는 해원을 통해 생명의 뿌리와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증산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약방에 불러모으고 나서 "천지공사를 끝마쳤다"라고 선언했다. 한 달여 동안 곡기를 끊은 그는 마침내 수제자였던 김형렬의 집에서 40여 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1909년 6월 24일의 일이었다.

구릿골약방 터는 오늘날 민족종교의 원류를 찾는 많은 사람의 참배 대상이 되고 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강증산의 유해

 

구릿골을 나와 관희교를 건너 원평 쪽으로 가다 보면 저수지의 초입에 닿기 전 좌측 언덕에 절 비슷한 건축물이 밀집된 곳이 나온다. 강증산의 딸 강순임과 사위가 창시한 증산법종교가 있는 곳이다.

이곳 영대에는 강증산 내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서로 차지하려고 추종자들이 법정싸움까지 벌였던 강증산의 유해는 이곳저곳 옮겨다니다 팔 하나가 없어져 버렸다. 법종교 경내엔 미륵불을 모신 삼청전, 단군을 모신 태평전, 각 성씨의 시조를 모신 승도묘 등이 있다.

증산이 살았던 시기(1871~1909년)는 조선의 국운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서양세력의 침입에 따른 민족모순과 봉건 질서라는 계급모순을 동시에 겪고 있었다.

강증산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는 반상의 차별, 적서의 차별, 노비에 대한 차별, 직업의 귀천 등 조선의 봉건적 굴레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천시대는 양의 시대였으나 후천시대는 음의 세계가 올 것을 예견했다.

나중에 강증산은 자신의 법통을 그의 제자였던 차경석의 이종 누이 고판례라는 여자에게로 넘긴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이랄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차경석은 나중에 보천교를 세웠다. 해방되고 나서 보천교가 망하자 보천교 건축 중 일부는 뜯겨져 서울 조계사와 전주 경기전 건축에 쓰이게 된다.

강증산은 짧지만 치열한 삶을 살았다. 조선사회가 안으로부터 붕괴해 가고, 밖으로는 승냥이 같은 외세가 몰려들던 19세기 후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해법으로 증산교를 세웠다. 한 세기가 지나가고, 세상은 엄청나게 변모했지만 그의 사상은 아직도 용도폐기될 줄 모른다.

증산의 사상은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지하 시인이 쓴 <남조선 뱃노래>라는 책만 해도 "이 길은 남조선의 배질이라"라는 증산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증산도 진리의 핵심개념인 '해원상생'은 이 극심한 갈등의 시대에 전보다 훨씬 유효한 슬로건이 돼 있다. 문제는 '해원'의 주체가 원한을 맺게 한 사회적 강자여야 한다는 점일 테지만.

/ ⓒ 2008 OhmyNews 안병기

 

천년고찰 귀신사와 금만평야를 켜 안은 금구의 진산 / 구성산

금구의 진산이자 모악기맥의 서쪽 끝자락에 올망졸망 빚어진 구성산(九城山·487.6m)의 참모습은 금만평야에서 바라봐야 하고, 금만평야는 구성산에 올라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산의 유래도 흥미로워서 아홉 개 봉우리에 성을 쌓아 적의 침입을 막았다는 의미의 구성산, 또는 굴성산, 앉은뱅이가 이 산을 아홉 번 올라 소원을 빌고 병이 나았다는 속설들을 간직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언양김씨들이 산기슭에 많이 살았으며, 정상 서편 상봉(헬기장)은 기우제를 지낸 무제터(無際-)가 있던 곳으로, 최근까지 상봉에 묘를 쓰게 되면 가뭄이 들어 인근 주민들이 묘를 파내면 비가 왔다고 한다. 상봉과  봉두산 주위에는 성을 쌓고 적의 침입을 막았던 곳으로, 봉두산 주위에는 지금도 성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금평저수지 옆에는 증산법종교의 교당이 있고, 영대라는 건물에 교주인 강 증산과 고 부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그 맞은편 구리골 약방터는 강 증산이 득도한 후 광제국이란 한약방을 차려놓고 9년 동안 구민활동과 포교활동을 했다.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의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가르침으로 한때 그를 따르는 신도가 6백만 명에 이르렀고, 전라도보다 경상도에 그 신도가 많았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삼계 대권을 쥐고 조화로서 천지를 개벽하고 선경을 열어 고통 속에 헤매는 백성을 구하던 곳이 바로 구성산 자락이었다. 모악산과 구성산 자락의 금평저수지 주변에는 신흥종교가 번창했다.

구성산의 높이가 487.6m에 불과하지만 해발이 낮은 금만평야에 위치하고 있어 산간지역의 1,000m에 육박한다. 금구 방향에서 보면 평범한 육산인 듯 보이지만, 정상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너덜과 바위지대도 있고, 산줄기가 상당히 출렁거리며 산행인들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코스도 있다.

남쪽 기슭에는 학선암(鶴仙庵), 동쪽에는 유서 깊은 귀신사(歸信寺)가 있다. 가을철이면 천년고찰 귀신사의 주변의 감나무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이 빨갛게 익어 가는 가을정취는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는다.

정상에서 조망은 사방이 탁 트여서 좋다. 동쪽으로 귀신사와 모악기맥, 북으로 삼례와 익산 시가지, 서쪽은 평야지를 뚫고 달리는 호남고속도로와 전주와 김제를 잇는 국도, 바둑판처럼 넓은 들녘의 젖줄인 만경강과 동진강의 물줄기가 눈요기감이다.

산줄기는 금남호남정맥 상의 완주 주화산(모래재 위)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온 호남정맥이 만덕산과 오봉산을 지나 운암 초당골(막근댐) 서쪽 1.2km지점에서  모악기맥을 분기한다. 이곳은 삼분수(三分水)로서 남쪽은 섬진강, 동쪽은 섬진강, 서쪽은 만경강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모악기맥은 만경강과 동진강을 가르며 국사봉과 화율봉을 지나 모악산을 빚어놓고, 매봉(620m), 연불암 뒤의 칼바위 능선, 유각치를 지나 모고산(402.4m)에서 서쪽에 구성산 줄기를 내려놓고 김제 망해사 옆 국사봉까지 뻗어간다.



구성산 줄기는 귀신사 뒷산, 싸리재, 삿갓1, 2봉을 지나 구성산을 일궈 놓고 1번 국도와 호남고속도로가 마주보고 달리는 금만평야로 잦아든다. 모고산에서 북쪽으로 갈래 친 산줄기 하나는 선암저수지 뒷산으로 뻗어가며 박바위, 벼락바위, 봉두산과 금구면 월전리 부근에서 끝을 맺는다. 구성산의 물줄기는 모두 원평천을 통하여 동진강을 이루다가 서해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전북 김제시 금구면 선암리, 금산면 용산리, 청도리를 경계한다.

청도리 마을과 주차장을 지나 귀신사에 들어서니 주위가 고요하다. 불사 중인 사찰을 돌아보고 서쪽으로 가면 고려시대에 세운 손상된 삼층석탑이 장구한 세월의 무게를 말해준다.

새 생명이 약동하는 경칩을 증명하듯 개구리가 목청을 돋우고, 버들가지는 푸른 빛이 돌고, 매화나무는 곧장 꽃망울을 터트릴 기세다. 싸리재에 닿으면(귀신사에서 15분 거리) 송전탑이 제일 먼저 마중나오고, 북쪽은 축령 마을, 동쪽은 모악기맥 사거리다. 서쪽의 넓은 길을 지나면 솔가루가 양탄자처럼 노랗게 뿌려진 소나무숲에 부천 한동수-정동순 부부의 리본이 무척 금슬 좋게 인사한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씨 탓인지 땀에 흠뻑 젖는다. 귀신사 계곡의 하산로가 있는 오름길에 서면 동쪽은 귀신사와 청도리 마을이 정겹게 다가오고, 서쪽에 삿갓봉이 우뚝 솟았다. 낙엽 쌓인 산봉우리를 힘겹게 올라서니 부안에 사는 김기웅, 신형문씨가 백두산 등반을 손전화로 약속했다.

삿갓1봉(귀신사에서 50분 거리)에 올라서니 조망이 훌륭해서 가슴이 탁 트인다. 미끄러운 급경사를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인적 없는 비포장 임도가. 북쪽 축령, 남쪽 구릿골을 잇고 있다. 삿갓2봉이 머리를 압도할 듯이 눈앞을 막아서며 산꾼의 기를 죽인다. 솔향기 그윽한 송림을 지나 급경사를 오르는 중간지점의 전망바위에 서니 동남쪽으로 너울너울 춤추는 모악산 능선, 동쪽은 전주 시가지, 남쪽은 금평저수지, 금만평야가 한눈에 잡힌다.



삿갓2봉에서 전북산사랑회에서 설치한 이정표와 삼각점(갈담 802)이 있는 정상은 10분 거리다(귀신사에서 1시간30분 소요). 정상에서 옛적에 기우제를 지냈던 헬기장은 지척이고, 남쪽으로 학선암  하산로가 있다.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훌륭하고 특히 모악산 능선 확연하다.

하산길은 주변을 간벌하고 등산로가 잘 정비해서 실크로드인 반면 북쪽 산자락은 수목갱신의 미명 아래 실시한 벌목으로 벌거벗겨진 모습이 황량하기 짝이 없다. 벤치와 운무정 현판이 걸린 멋진 모정을 만난 뒤, 운동기구가 있는 갈림길에서 서쪽의 목우촌 방향 길을 버리고, 북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밤나무단지를 지나면 영천 마을 주차장이다(정상에서 1시간 소요).슬레이트 지붕의 원두막과 철탑을 지나면 넓은 길이 시작된다.

선암제와 키 큰 시누대 군락을 지나 묘소 앞 갈림길에서 북쪽 임도는 금구 가는 지름길이고, 남산은 서쪽 송림으로 올라야 한다. 잰걸음으로 남산에 올라서면 산불감시초소와 이름 없는 삼각점이 마중나온다. 금선사에서는 이 산을 신선봉이라 부른다. 조망을 즐기고 금선사에서 시멘트 길을 내려가다 항아리가 많이 있는 집 앞에서 북쪽으로 내려서서 전답과 금구교회를 지나면 버스정류소에 닿는다(정상에서 1시간30분 소요).

/ 월간산 김정길 전북산사랑회 회장

 

#산행길잡이

귀신사~싸리재~제1 삿갓봉~임도~제2 삿갓봉~정상~상봉(헬기장)~영천 마을~선암제~남산~금구교회~버스정류소 <7.5km, 3시간 소요>

 

#교통

전주→금구  시내버스가 15분 간격 운행. 전주→청도리  금산사행 시내버스 30분 간격 운행.드라이브 코스  전주~1번 국도~구 도로~금구(금구농협에 대형, 소형 주차 가능) / 전주~712번 지방도~중인리 삼거리~독배~청도리 * 귀신사 주차장 승합 및 소형 주차 가능, 대형은 712번 도로변 주차.

 

김제 금평저수지 모악산 금산사 청룡사 (daum.net)

 

 

김제 금평저수지 모악산 금산사 청룡사

잔잔하게 흐르는 금평저수지에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는 흔들리고, 싱그러운 꽃향기가 덤으로 찾아온다. 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연녹색의 물결이 한층 시야를 밝게 한다. 유난히

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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