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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북도

김제 금평저수지

by 구석구석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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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게 흐르는 금평저수지에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는 흔들리고, 싱그러운 꽃향기가 덤으로 찾아온다. 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연녹색의 물결이 한층 시야를 밝게 한다. 유난히 햇살이 따사로운 날에 만난 금평저수지는 마을 주민들에게도, 모악산 주변의 종교 시설을 찾은 여행자에게도 기분 좋은 꽃길이 된다.

금산교회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양반 조덕삼과 마부 이자익의 이야기 때문이다. 미국인 선교사 테이트가 전라도 지역을 선교활동하면서 조덕삼이 운영하는 마방에 말을 쉬게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조덕삼이 신앙을 받아들였고, 마부로 일하던 머슴 이자익도 함께 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1908년 조덕삼이 내놓은 땅에 교회를 짓어지면서 장로를 선출하는 선거가 열리게 된다. 100여 명의 교인이 투표를 한 결과, 장로로 선출된 자는 바로 머슴 이자익이었다. 에 대해 조덕삼은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이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다라고 말했다. 그 후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기까지 조덕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자익도 1924년 예수교장로 총회장에 당선되고 나서 나는 마부였다라며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설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출처 : 여행스케치

금평저수지의 시작은 주차가 편안한 증산법종교 본부에서 시작된다. 철쭉과 조팝나무, 벚나무, 원추리 등이 금평저수지를 찾는 여행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수지를 한바퀴 돌아보고 싶지만, 금평저수지 수리시설 개보수사업으로 인해 2023년 12월까지는 금평저수지 제방구간 순례길의 통행이 불가하다. 하지만, 왕복으로 트레킹하는 금평저수지는 오히려 새롭고, 지나친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재미를 준다.

연초록의 물결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 가로수길을 따라 걸어가면, 아름다운 한 편의 시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시되어 있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선이 다르겠지만, 푸르른 자연 속에서 시를 읽으니 전해지는 느낌이 더욱 특별해진다. 출발한 지 10여 분도 지나지 않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가 보인다. 그늘진 정자 안에는 잠시 쉬어가는 여행자들이 보인다. 모악산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물길 덕분인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수변데크는 구름다리 같은 느낌이다. 발 아래로는 모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다.

저수지 옆으로 대순진리회가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식당과 카페, 그리고 잠시 쉴 수 있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을 지나 다리에 서면 한옥이 보이는데, 바로 동곡약방이다. 동곡약방은 한국 민족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강증산이 세운 곳이다. 동학혁명에 실패한 강증산은 인간의 힘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고 보고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 인간세상을 구원하려고 했다. 그는 혼란한 세상, 병약한 민중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1908년 동곡약방을 열고, 자신의 믿음도 전했다.

금평저수지 수변테크와 대순진리회. 사진/ 조용식 기자

태을교, 훔치교, 선도교, 미륵불교, 보화교, 보천교, 태극도, 동화교 등 그 뒤를 따라는 수많은 종파들이 탄생했으며, 소멸하기를 반복하면서 현재는 증산교, 대순진리회 등 수십 개의 종파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동곡약방을 세운 강증산의 묘가 있는 증산법종교 본부는 강증산의 외동딸 강순임이 설립했다. 증산미륵불을 봉안한 삼청전과 증산부부가 잠들어 있는 묘각인 영대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송남진 김제시 문화관광해설사는 “김제 사람들은 금평저수지를 ‘오리알 터’라고 부른다. 장차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메시아가 오는 곳이라는 뜻의 ‘올 터’가 변해서 된 지명”이라며 “1961년 조성된 금평저수지에는 마을 하나가 물밑에 들어가 있는데, 사상가이자 혁명가인 정여립이 39세에 이곳으로 내려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없는 모두의 것이다’라는 ‘천하공물설’을 주장한 곳”이라고 설명한다.


출처 : 여행스케치(http://www.ktsketch.co.kr)

모악산은 높이 793.5m로 김제평야의 동쪽에 우뚝 솟아있어 호남평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호남 4경의 하나로 경관이 빼어 나고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가 많다. 특히 이곳에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세워지고 10여 점의 각종 주요문화재를 갖고 있는 금산사가 자리하고 있어, 찬란한 불교예술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모악산을 넘으면 동남쪽 중턱에 대원사, 수왕사 등 사찰이 있고 서쪽으로 귀신사가 있으며, 금산사 입구 금평저수지는 낚시터로도 적당하다.

특히 모악산은 예로부터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여겨져, 증산교의 본부와 더불어 30~40년대 각종 신흥종교 집단지로도 관심을 끌어 기록에 의하면 모악산 기슭에는 대원사, 귀신사, 수왕사 등 사찰을 비롯 무려 80여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등산을 하려면 금산사를 벗어나 심원암 뒤쪽의 능선을 따라 오른다. 봄철이면 정상까지 진달래가 만발해 꽃구경을 하면서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서는 김제평야와 만경강이 시야에 들어오고 전주시와 운장산도 보인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에 이르기까지 벚꽃터널도 장관이다.

2020.9 모악산정상의 조망

* 주차장 - 금산사 - 정상 - 수왕사 - 대원사 - 구이 (10km, 3시간 30분)
* 주차장 - 금산사 - 헬기장 - 염불암 - 금선암 - 중인리 (11km, 4시간)
* 주차장 - 금산사 - 청룡사 - 배재 - 장근재 - 헬기장 - 정상 - 금산사 - 주차장 (12km, 4시간 30분)

 

벚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는 모악산을 배경으로 모악산 벚꽃잔치가 금산사 상가 옆 특설무대에서 4월초순에 개최된다.

벚꽃 드라이브코스로 유명한 전주시 중인리-김제 금산사로 이어지는 7㎞구간의 벚꽃길이 장관을 이루면서 상춘객들로 크게 붐비는 곳이다.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이나 벚꽃 터널의 화려함은 아니지만, 수백 년은 됨직한 고목의 가지 사이로 보석처럼 박힌 벚꽃의 자태가 우아하고 미끈하다. 해탈교를 건너 경내로 들어서면 최고의 벚나무 군락이 자리한다. 10여 그루의 벚나무가 도열한 모습은 장엄하기 그지없다.

봄꽃이 만개할 것으로 예상되는 행사기간에는 수많은 상춘객이 몰릴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금산사 인근 금구명품길, 모악산 마실길, 금평저수지 부근 '생태탐방로' 등 벚꽃잔치와 연계한 탐방 및 등산코스 또한 인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며 또한 변함없는 사랑의 전설 '연리지탐방로' 청도리길 일원에 만개할 벚꽃이 이 행사에 맞물려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를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룰 전망이다.

 

금산리112번지 모악산도립공원 내 모악산야영장 063-540-3539  

김제 금산사는 모악 혹은 무악이라고도 부르는 엄뫼 아래 있다. 어머니 산의 품 안에 안겨 어린아이와 같이 곤히 잠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금산사라는 어린 아이는 깊이 잠들지 못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느라 잠을 뒤척이는 것이다. 

모악산계곡/김강임

김제역에서 출발해 30∼40분을 달리면 금산사에 도착한다. 모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금산사는 미륵 신앙의 발생지이자 전북 최대의 사찰이다.  모악산도립공원에 있는 금산사, 가을철에 가는 길은 하늘도 땅도 모두 노랗다. 금산사 가는 길은 모악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의 옷차림만큼이나 화려하다. 모악산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에도 가을이 내려앉았다. 계곡의 돌들도 단풍에 취한 듯 조용하다.

4대 종단을 품은 김제의 아름다운 순례길도 인기

모악산은 다양한 종교 시설이 들어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금산사(불교), 금산교회(개신교), 수류성당(천주교), 원평교당(원불교) 등 4대 종단을 비롯해 증산법종교본부, 대순진리회, 동곡약방, 만유사, 월명암 등의 종교시설이 몰려 있어 ‘종교 순례길’이라는 테마 여행이 인기를 끌고 있다.

금평저수지옆에 위치한 증산법종교

김제의 아름다운 순례길은 3층 법당의 미륵전이 있는 금산사에서 시작된다. 모악산 금산사는 약 1400년 전(599년), 삼국시대에 창건된 유서깊은 도량이다. 지난 5월 1일 제1256주년 금산사 미륵강탄제가 열린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그 앞쪽의 육각다층석탑과 석련대 등 총 10점의 보물이 있다.

송남진 해설사는 “39척에 이르는 거대 불상이 있는 3층 미륵전은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라며 “고통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생 하실 미륵부처님은 누구든지 간절히 기도하면 만날 수 있다는 신앙을 확산시킨 인물이 있는데, 바로 신라시대 12살의 나이로 금산사로 가출한 진표율사”고 말했다.

1908년 세워진 금산교회는 ’ㄱ’자형 한옥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남녀가 유별했던 시절이기에 강단의 앞쪽은 남자 신도들이, 동쪽은 여자 신도들이 나눠 앉아 예배를 보게 했던 것으로 외래종교와 유교전통이 만들어낸 독특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금산교회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양반 조덕삼과 마부 이자익의 이야기 때문이다. 미국인 선교사 테이트가 전라도 지역을 선교활동하면서 조덕삼이 운영하는 마방에 말을 쉬게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조덕삼이 신앙을 받아들였고, 마부로 일하던 머슴 이자익도 함께 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1908년 조덕삼이 내놓은 땅에 교회를 짓어지면서 장로를 선출하는 선거가 열리게 된다. 100여 명의 교인이 투표를 한 결과, 장로로 선출된 자는 바로 머슴 이자익이었다.


에 대해 조덕삼은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이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다”라고 말했다. 그 후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기까지 조덕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자익도 1924년 예수교장로 총회장에 당선되고 나서 “나는 마부였다”라며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설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 
여행스케치(http://www.ktsketch.co.kr)

 

금산사전경

금산사에는 보물22호 노주, 보물25호 오층석탑, 보물26호 방등계단, 보물27호 육각다층석탑, 보물28호 당간지주, 보물29호 북강삼층석탑, 보물62호 미륵전, 보물827호 대장전 등 많은 보물이 있다. 금강문·천왕문을 거푸 지난 다음 2층 누각인 보제루 계단을 밟고 절 마당으로 올라서자, 대적광전과 방등계단, 미륵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백제 법왕(800년) 때 창건된 금산사는 신라 혜공왕 2년(776)에 진표율사가 중창하면서 큰 사찰로 발돋움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장전은 원래 미륵전 뜰 가운데 세운 목조탑으로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지붕 용마루 한가운데에 남아 있는 복발만이 예전 목탑의 흔적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는 불경은 보관하지 않은 채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인 가섭, 아난을 모시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앉아 있는 수미단에 새겨진 꽃 등 여러 가지 장식문양이 무척 아름답다.

보물827호 대장전과 828호 석등

대장전 앞뜰에는 8각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꼭대기 머리장식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석등이다. 단순하지만 단정한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석등이다. 석등에서 조금 떨어진 노주석으로 다가간다. 이 노주석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물이다.

꼭대기에는 석탑의 머리 장식이 남아 있다. 이 유물의 이름을 노주라고 부르는 건 탑 꼭대기에 있는 찰주를 노반지주라 부르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꼭대기에 얹힌 꽃봉오리 모양의 조각만 없다면 불상이 앉는 사각형의 대좌로 볼 수도 있는 형태이다. 그러나 금산사에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노주'는 잘못된 명칭이라고 한다. 원래 이름은 '광명대'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는 것이다.

2020.9 금산사 베롱나무

원래 금산사 대적광전은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었던 건물이다. 그러나 지금 보는 건물은 그 이듬해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하는 바람에 다시 지은 것이다. 비교적 잘 '복원'한 건물이지만, 문화재의 지위는 상실하고만 비운의 건물이다. 

대적광전 오른쪽 마당엔 육각다층석탑이 서 있다.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인 대적광전 앞의 왼쪽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탑이 대부분 밝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탑인데 비해 이 탑은 특이하게도 흑백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석탑이다. 

보물 제23호 석련대

육각다층탑 옆에는 커다란 석련대가 놓여 있다. 석련대란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석련대 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다. 중앙에는 불상의 양발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두 개 있다. 상대 아래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는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는 등 화려하기 짝이 없다.  

국보 제6호 미륵전과 방등계단(좌측).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3층 목조 건물이다.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는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밖에서 바라보면 3층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라는 걸 알게 된다. 미륵전에는 많은 벽화가 있다. 외벽에는 범·제석천과 천중사천왕을 비롯해 보살, 동녀, 비천상, 금강역사, 나한도 등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아름다운 벽화 아랫부분에는 관람객들의 거친 손이 할퀴고 간 무수한 생채기가 그려져 있어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송대에 우뚝선 보물 제25호 5층석탑

미륵전 뒤론 난 계단을 통해 송대로 올라간다. 송대에는 오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5층석탑의 형태는 매우 소박하고 단순하다. 상·하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몸돌을 올려 놓았다. 몸돌은 줄어드는 비율이 제법 부드럽고, 각 층의 몸돌에 새겨진 기둥조각이 넓은 편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머리 장식은 온전히 유지되어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산찾사/강충구

5층석탑 뒤에는 석종형 부도가 있는 방등계단이 자리 잡고 있다.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적멸보궁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석종형 부도의 모습은 색다른 맛이 있다. 탁 트인 공간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더 가슴에 와 앵기는 듯하다. 

방등계단은 수계법회를 거행할 때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장소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방등계단을 도솔천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과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 신앙을 표현했다는 말이다. 

/ 2008 OhmyNews 안병기/2007 김강임

 
 
금산사 산사체험 종무소 063-548-4441  

금산사 산사 체험은 예불, 참선, 산행, 신행상담, 다도, 108배를 기본 프로그램으로 하며, 2005년 봄부터는 차밭 체험 프로그램이 추가로 마련되어 있다. 특히 차밭 체험 프로그램은 차나무 관리와 거름주기, 찻잎 따기와 덖기, 차 마시기, 그리고 적은 양이지만 직접 덖은 차를 가져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가을에는 황금 들녘을 만끽할 수 있는 김제 들녘을 산책하고, 특산품인 지평선 쌀을 맛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금산사 산사 체험은 본인의 취향에 맞게 선택해서 인터넷으로 신청할 수 있고, 자신이 선택 한 프로그램에만 참여하면 된다.

 본인이 선택한 프로그램 외의 시간에는 기도나 산책, 독서, 참선 등을 하면서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금산사 산사 체험의 또 하나 특색은 참가자들이 모여 만든 ‘걸망에 담아 온 산사 이야기’ 카페이다. 이 카페를 통해 평소에는 온라인에서 만남을 계속하면서, 두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 동참할 수 있다.
금산사 산사 체험 프로그램은 이렇듯 참가 신청부터 체험까지 짬지고 알차게 준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이 한번 참여한 뒤에도 또 다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연계하여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금산리 산4 청룡사 063-543-7735

주차장에서 금산사 쪽으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좌측에 금산사가 보이고 그곳에서 맑은 계곡물을 따라 30분정도 도보로 올라가면 청룡사가 나온다.  

 청룡사는 원래 모악산 금산사의 40여 암자 중 하나이다. 사적지는 60여년 전에 토굴의 형태이던 것을 현재의 주지스님이 1974년 대웅전을 세웠으며, 완주 봉서사에서 진묵스님이 350여년 전의 관세음보살이 1950년에 소실될 위기에 있을 때 가져와서 모셨다. 내부의 복장기를 보면 목불이고 관은 수리한 것이다.

 청룡사는 넓다. 비온 뒤 홍수로 길이 끊어질만큼 험한 모악산의 산길을 힘겹게 지나 도착한 청룡사 경내은 무척 넓고 빈 공간이 많았다. 이러한 모습의 청룡사를 일군 것은 부처님을 향한 일념 밖에 없는 단 한 명의 수도승, 청룡사의 주지스님의 공력의 결과이다.

주지스님은 수십 년을 한결같이 이 청룡사와 함께 살면서 길을 닦고 터를 다지고 관음전을 세우고, 요사채를 지어온 것이다.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오직 이 청룡사에 투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에게서만 세월이 빗겨 갔는지 그의 얼굴에는 주름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부처님을 향한 법력이 세월도 무심하게 했는지 아직 청년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그만큼 청룡사는 주지스님의 분신인 것 같다. 보기에는 청년으로 보이는 스님의 마음이 조금씩 바빠지고 있는 걸 느낀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앞으로의 삶이 길지 않음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스님은 자신의 젊음을 투자하여 이제 터 닦기가 끝난 넓은 청룡사에 제대로 된 대웅전을 짓고 싶어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머물면서 부처님의 진리를 접하며 수도에 정진할 수 있는 선원도 짓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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