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의 볼거리
과천은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창을 열면 관악산(冠岳山:629m)과 청계산(淸溪山: 618m)의 푸르름이 눈앞에 펼쳐지는 향기로운 청정주거도시입니다.
과천시는 관악산의 연주대(관악연주), 청계산의 빼어난 봉우리(청계수봉), 온온사의 백송나무(온온백송), 막계동의 맑은 호수(막계청담), 갈현마을의 밤나무 숲(갈현율림), 남태령 망루에서 바라보는 과천(남령망루), 지하동의 맑은 물(자하청류), 광창벌을 내닫는 말(광창주마)를 8경으로 선정해 놓고 있다.
과천팔경 제1경 관악연주 / 관악산의 연주대
연주대는 관악산정 연주봉의 솟아있는 바위틈에 30m의 축대를 쌓고 나한전(응진전:應眞殿)을 지은 곳을 말한다. 신라 문무왕 17년(677) 의상대사가 지은 작은 암자로, 원래 의상대(義湘臺)로 불렸다고 한다.
의상대가 지금의 연주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데에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조선이 건국되고 수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지면서 고려를 그리워한 사람들이 여기에 올라 옛 왕조를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설은 태종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정하려하자 두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궁을 나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이야기이다.
응진전에는 철종 때 김완송 스님이 16나한을 봉안하여 나한전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법당 내에는 근세작으로 보이는 석가 3존상이 모셔져 있다. 응진전 입구에는 우진각 지붕의 마애감실에 중생의 질병을 구제하고 법약을 준다는 약사여래가 입상으로 봉안되어 있는데 왼손에 약병을 들고, 오른손에 시무외(施無畏)의 인(印)을 들고 있다. 제작연대는 고려시대(나한전법당 중수기에 의하면 효령대군이 조성)로 추정된다.
관악산 연주봉 남쪽에 있는 사찰로 기도사찰로 유명해 대학입시 때가 되면 합격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통적인 가람 건축양식과 달리 높게 쌓은 석축위에 이층 구조로 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며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어 절에서의 생활을 체험해 볼 수 있다.
과천팔경 제2경 청계수봉 / 청계산의 빼어난 봉우리
해발 618m의 청계산은 과천의 남쪽에 위치하여 관악산과 마주보고 있다. 청계산은 그 명칭과 같이 맑은 내를 이룰 정도로 산림이 울창하여 삼림욕을 즐기려는 등산객이 찾는 곳이다.
특히 청계산 수려한 산자락에는 과천서울대공원, 과천서울랜드, 국립현대미술관, 국립과천과학관, 과천경마공원 등 수도권 일대 최대관광단지를 이루고 있다. 청계산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문화관광레저를 즐길 수 있어 1년 365일 언제나 등산객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청계산 꼭대기에 석대가 하나 있는데 이 석대가 바로 망경대이다. 이곳에 오르면 좋은 경치가 보인다고 해서 망경대라 부르던 것을 고려시대의 충신 조윤이 조선의 건국을 부정하며 이곳에 올라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서울이 한 눈에 들어온다는 연유로 ‘서울이 보인다’는 뜻의 망경대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 후 충절어린 조윤을 흠모한 사람들이 산정에 초막을 지어주었으니 그 자리가 오늘날의 망경대다.
과천팔경 제3경 온온백송 / 온온사의 백송
온온사는 조선시대 과천현 관아에 부속된 객사의 정당 건물이다. 객사는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로 이용하던 곳이다.
과천의 객사는 인조 27년(1649) 현감 여이홍이 객사 동헌을 건립하여 창건되고, 이후 현종 7년(1666) 남창조에 의해 서헌이 건립되어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규모가 크다. 이는 조선시대 왕이 남행할 때 과천을 경유하며 묵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온온사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조가 현륭원 참배를 위해 능행할 때 과천의 객사에 머물며, ‘주위 경관이 좋고 쉬어가기 편하다’하여 ‘온온사(穩穩舍)’란 현판을 내림으로써 이름을 갖게 되었다. 동헌에는 옛 별호인 부림을 따서 ‘부림헌(富林軒)’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인들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과천면의 청사로 사용되다가, 1932년 기존 건물이 헐리고 원형이 변경되었다. 이후 1986년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객사의 형태를 참고로 해체 복원하였다.
현재 온온사 건물은 석축 위에 정당 3칸, 좌우 익실 3칸을 둔 정면 9칸, 측면 2칸의 구조이며, 팔작지붕집에 정당 부분에 맞배지붕을 얹어 놓은 형태이다.
과천팔경 제4경 막계청담 / 막계동의 맑은 호수
청계의 맑은 물을 받아 이루어진 과천저수지 주변으로 서울대공원과 서울랜드ㆍ국립현대미술관ㆍIT WORLDㆍ수석박물관 등 관광 위락단지가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과천팔경 제5경 갈현율림 / 갈현마을의 밤나무 숲
지금 갈현동의 은은쟁이 동네에는 옛날부터 느티나무가 동네 앞 양쪽으로 하나씩 서 있었고, 그 건너편에 훼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지금은 훼나무도 없어지고, 느티나무도 하나는 죽어 없어져 하나만 남아 있다. 그 위 느티나무에 지금부터 한 80년 전 쯤에 불이 났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름이면 나무 아래에서 살고는 했던 거지가 불을 놓았는데, 이 나무는 동네의 선비들이 날이 더우면 나와 글을 읽거나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장기도 두고 이야기도 했던 곳이다. 그런데 자료제공자의 셋째 어머니(작고)가 하루는 낮잠을 자는데, 꿈에 아, 애가 잠만 자면 어떡하냐. 우리 집에 불이 났는데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 놀라서 일어나 보니까 느티나무에 불이 나 끄러 간다고 동네가 온통 난리가 나 있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나서 북한군이 과천에 들어왔을 때는 이용진씨가 그곳으로 피난을 했었다고 한다. 느티나무 밑은 속이 비어 있었는데, 그 안으로 동네 사람 일곱 명이 피난해 숨어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그 앞으로 인민군이 많이 지나갔으나, 다행히 나무 밑을 보지않고 지나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 어두워질 때까지 숨어 있다가 일행은 무사히 피난을 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느티나무에 귀가 달린 구렁이가 있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이 그 나무 밑에서 굿을 했었다. 아래 느티나무에도 뱀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갑자기 벼락치는 소리가 나서 웬일인가 했는데, 동네 개들이 모두 뛰어 나갔다. 나중에 보니까 어마어마하게 큰 구렁이가 떨어져 죽어 있었다.
그 송장 썩는 냄새때문에 근처에 가지를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제보자가 열대여섯 때 목격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살아 있는 느티나무에서 그 뱀이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과천팔경 제6경 남령망루 / 남태령 망루에서 바라보는 과천
과천의 입구격인 관문광장에서 서울 사당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남태령은 한양과 삼남을 잇는 유일한 도보 길이었다. 물산의 이동로이자 한양 과거길 가던 선비들의 관문이기도 한 이곳 남태령에서의 도적행위가 여우짓 같다고 해서 ‘여우고개’로 불리기도 했으며 행인 50명이 한데 모여 관군의 호송을 받아 고개를 넘었으므로 ‘쉬네미고개’라고도 했다.
이후 한양에서 남쪽으로 가다가 만나는 첫번째 큰 고개의 뜻으로 ‘남태령’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는 망루와 벤치, 나무계단을 설치하고 마사토로 옛길을 복원해 놓았다. 사당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포장도로 왼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정취가 느껴지는 흙길이 더 정감이 있어 보인다.
남태령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 나루에 이르고, 다시 흑석동(黑石洞)을 지나 강변을 끼고 한강을 바라보면서 동작동(銅雀洞) 이수교(梨水橋)를 우편으로 돌아가면, 승방평(僧房坪) 석굴암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6㎞ 쯤 가면 큰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가 바로 남태령(南泰嶺)이다. 이 고개는 예전에 과천(果川)을 거쳐 수원(水原)으로 가던 옛길이었다. 또한 삼남(三南)으로 통하던 길이었고, 한때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지극한 효성에서 아버지를 그리워 하여 묘소로 가시던 길이었다.
과천을 지나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물맛이 좋아 정조께서 가자(加資)로 당상(堂上)벼슬을 제수(除授)했다는 우물이 있고, 그 위 산에는 묘가 하나 있는데, 이는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 아버님이신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할아버지에 의해 돌아가실 때 협력했다는 김상로(金尙魯, 1702-1766)의 형인 좌의정(左議政) 김약로(金若魯, 1694-1753)의 묘소이다.
곡담을 쌓아 정승묘답게 모두 갖추어진 묘였지만, 정조께선 지난날의 아버님의 애절함을 생각하여 지나는 길 옆에 놓인 그 묘소조차 보기 싫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과천팔경 제7경 자하청류 / 자하동의 맑은 물
관악산의 자하동 중 과천쪽 계곡은 가장 절경을 이루고 있어 예부터 자한 신위, 추사 김정희, 우암 송시열 등 많은 묵객들이 시를 짓고 암각문을 남긴 명소로 맑은 물이 흐를 때는 속세를 떠나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과천에서 관악산을 오르는 계곡을 ‘남자하동’이라 하였는데 자하동문은 관악산에서 가장 넓은 계곡인 남자하동에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이다. 19세기 중후반에 새겨졌으며 자하 신위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자하동문 암각자에서 북쪽으로 약 2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자하 신위의 글씨로 평가되고 있다.
과천팔경 제8경 광창주마 / 광창벌을 내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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