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팔달문 동종
화성 축성과 동시에 건조된 성의 사대문의 남문인 팔달문 2층 누상에 달려있는 이 종은 종걸이는 음통이 없는 용두뿐이고 상대에는 내부에 글씨를 넣은 수십개의 문양을 두줄로 나란히 돌렸으며 종신에는 이종을 주조한 장소와 연대 유래, 주조자들의 명문이 주자 혹은 각자되어 있으며 하대에는 보상당초화문을 양주하여 돌린 고려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한 조선종의 형식을 하고 있다.
높이 1.23m 입지름 0.75m의 거대한 종으로 고려 문종 34년(1080) 2월에 개성에서 만들어졌고, 1687년 3월에 만의사(萬儀寺) 주지 도화승(道和僧)이 사찰의 불교의식에 사용하고자 다시 주조하였다고 한다. 이 종은 중국 종의 특징인 쌍룡(雙龍)이 새겨진 종을 거는 고리인 용뉴(龍鈕)를 갖춘 외래적인 유형에 속한다. 종신의 상단에는 2중 원 안에 범자(梵字)를 한 자씩 돌아가면서 양각하였다.
그 아래에는 4개소의 유곽(乳廓)과 보살입상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유곽의 주변에는 당초문이 새겨지고, 유두(乳頭)는 각 9개씩으로 보상화문의 형태인데, 중앙의 것만 돌출되어 있다. 보살입상은 둥근 두광(頭光)을 하고 있으며, 어깨를 모두 덮는 형식인 통견(通肩)의 옷주름이 유려하게 흐르고 있다. 이 팔달문 동종은 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일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용뉴는 조선 후기 조각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 경기관광공사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낙남헌)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정조는 축성기술을 얻기 위하여 중국 가는 사신에게 명하여 구하고자 했던 "사고전서"는 구하지 못했지만 "고금도서집성" 5,022권을 거금 2150양을 주고 들여와 이중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이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만5000근이나 되는 돌을 들어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화성 성역의궤
장안문은 화성華城의 북문이면서 정문에 해당된다. 문의 이름이 장안문이니 문을 들어서면 장안이라는 뜻이겠다. 장안은 수도(首都)라는 뜻으로도 쓰였듯이 서울의 다른 일컬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옛 중국의 도성이었던 섬서성 장안현의 서북쪽 고을은 주周나라, 진秦나라, 전한前漢, 수隨, 당唐나라 들이 도읍하였던 곳이다. 화성을 건설하면서 이런 격조 높은 이름을 정문에다 걸었다는 것은 대단한 자신감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화성을 답사할 때는 성 안팎으로 넘나들면서 보는 것이 좋다.
아군이 되어 보기도 하고 적군이 되어 보기도 하면서 실제의 전투 상황을 상상하는 것도 재미 있는 일이다. 안내소에서 나눠주는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을 넘나들기 좋은 지점을 찾을 수 있다.
즉, 네 큰문이나 샛문(암문暗門)을 잘 이용하면 훌륭한 답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적군이 되어 성벽을 바라보면서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이 성벽이 구간별로 나눠져 있다는 것과 축성 방법의 차이다. 심지어는 돌도 여러 방법으로 다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벽의 돌 중에는 굴삭기의 날에 찍힌 듯한 흔적이 더러 보인다. 이백 여 년 전에 굴삭기가 있었던 것일까? 또, 성벽의 돌들을 자세히 눈 여겨 보면 돌들을 자유롭게 오려낸 듯, 돌끼리 만난 곡선을 능숙하게 구현했다.
그리고 부정형의 돌들 중에서 유독 정사각형에 가까운 돌들이 심심치 않게 박혀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돌들은 성벽 안으로 길게 박힌 적심 돌들이다. 이렇게 안으로 길레 박혀야만 성벽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성벽은 벽체와 여장으로 구성되었다. 여장은 살받이, 성가퀴 혹은 타라고 불렀다. 타와 타 사이를 타구라고 했는데 타구를 통해서 적의 동정을 살피기도 하고 공격을 할 수도 있다. 타에 뚫려 있는 세 구멍은 좌우의 원총안과 가운데 근총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간혹 타구의 아래 부분에도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이것도 근종안, 혹은 근안이라고 해서 성벽의 아래를 주시할 수 있게 했다. 아마도 처음 화성을 쌓을 당시엔 성벽에 골고루 있었던 것 같은데 지난 70년대에 여장을 고쳐 쌓으면서 빼 놓은 부분이 많은 것 같다.
화성장대는 크지 않게 지었으나 이 층으로 지어서 위엄을 한껏 뽐내려 하였다. 여덟 모 난 긴 돌로 주춧돌을 삼아서 그 위엄에 걸맞도록 했다. 서장대를 짓기 위해1794년 8월 11일부터 한달 간 터를 다졌고, 9월 16일에 상량하였다.
화성 성역의 총 책임자인 총리대신 번암 채제공이 상량문을 짓고 썼다. 채제공은 1790년에 용주사 상량문을 짓고 쓴 일도 있는데,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서장대의 상량문만 지었고 또 썼다. 상량한 지 보름도 안된 9월 29일 완공하였으니, 공사 개시로부터 두 달이 채 안 걸린 공사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 임금이 [화성장대]라고 직접 쓴 편액을 달았다. 총리대신의 상량문과 임금의 친필을 걸었다는 것은 이 장대의 성격을 드러내는 한 예가 된다.
화홍문이 일곱의 무지개 수문인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의 무지개 수문을 가졌다.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화홍문과 같이 화강석으로 수문을 쌓고 쇠살문을 달았으며, 수문 위의 구멍을 통해 쇠사슬로 살문을 여닫을 수 있었고 자물통으로 잠글 수도 있었다.
다만 각 수문의 크기는 화홍문의 그것보다 작았다. 훌륭한 돌다리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화성의 건축가는 돌다리로 만족하지 않았다.
다리의 넓이를 셋으로 나눠 하나는 사람을 통행하게 하고, 나머지 둘은 긴 포사를 시설했다. 포사에는 세 개의 문으로 많은 군사가 들어가 적군을 향해 공격할 수 있게 했는데, 벽돌로 만들어져 위엄이 대단했을 것이다.
살랑 바람에 버들가지가 마냥 흔들리는 봄이면 방화수류정을 찾을 일이다. 광교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멈춘 곳,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은 이곳 용의 머리에 멋들어진 집을 지었다.
군사적 목적의 이름은 동북각루로서 지휘소의 역할과 망루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곳에 지었다. 그리고 방화수류정이라는 멋진 이름도 붙였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뜻이니 휴식처의 이름으로서 제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맥의 형상을 좇아서 용두각이라고 불렀다.
방화수류정은 군사 시설과 휴식 시설의 절묘한 만남을 구현했다. 마루 밑에 감추어진 비밀이 군사 시설로 지어졌음을 나타낸다면, 바깥에서 보는 형태는 고급의 휴식 시설로 손색이 없다. 적군들이 방화수류정의 자태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 마루 밑에서는 포가 작렬할 것이며, 총구가 사정없이 불을 뿜을 것이다. 마루 밑에 감추어진 총구와 포구는 군사적 긴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구들을 놓은 숙직방까지 갖추었으니 휴식 시설을 빙자한 군사 시설이라고도 하겠다. 적군은 성안의 사정이 매우 궁금할 것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두 수문중 북쪽에 위치하여 북수문이라고 했다. 광교산에서 시작되어 수원의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개울을 지금은 수원천이라 부른다. 과거에는 이 개울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드내라고 했다고 한다.
버드내 중에서도 북수문 주위를 한내(大川)라고 했고, 남수문 주위를 거부내(龜川)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크지 않은 개울은 홍수 때마다 범람을 일삼았다. 버드나무가 홍수의 예방 역할을 톡톡히 했겠지만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수도 있었다.
화홍문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다리로서의 기능이라 할 일곱 칸의 돌 무지개 문, 그리고 광교산이 시원스레 바라보이는 누마루 구역, 또 누마루 아래의 전투용 진지를 들 수 있다.
화성의 모든 시설물이 마찬가지지만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눈에 띄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 특히 화홍문이다. 일곱 칸의 돌 무지개 문은 얼핏 똑같은 크기로 이루어진 듯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가운데 문이 크고 양쪽의 문들이 작다. 화성성역의궤에도 가운데 수문은 넓이 9척, 높이 8.3척인데 비해 양쪽의 여섯 수문은 넓이 8척, 높이 7.8척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니까 가운데의 수문이 나머지 수문들보다 넓이는 한 자가 더 넓고 높이는 반 자가 더 크다는 말이다. 왜 그랬을까? 만약에 똑같은 크기로 수문 일곱 개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거친 돌을 다듬어 무지개 수문을 만드는 것인 만큼 그 수고로움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봉수당의 이름은 원래 장남헌이었다. 정조 13년(1789) 가을 지금의 융건릉 앞에 있던 수원부 치소를 이 자리로 옮겨 행궁으로 삼았고, 정조 임금이 직접 쓴 글씨로 액자를 달았다. 그러나 1795년 윤 2월의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이곳에서 치른 다음, 당호를 봉수당으로 바꾸고 참판을 지낸 조윤형에게 글씨를 쓰게 했다. 만수무강을 받드는 집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화성의 봉돈은 정보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서해안의 정보는 흥천산 봉수와 서봉산 봉수(간봉間烽)를 통해 전달 받았고, 육지의 정보는 용인 석성산 봉수를 통해 전달 받았는데, 지도에서 이를 확인하면 비슷하고 적당한 거리에 봉수대들이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화성의 봉돈은 서장대와 화성 행궁을 마주보는 곳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체 방어 시설과 치성으로서의 역할까지 고려해서 지어냈는데, 형태적인 아름다움은 기본이었던 듯 어느 곳에서 사진을 찍어도 작품 사진이 된다. 기능적인 면에서도 가장 발달된 봉수대의 면모를 보인다. 봉수군이 숙직할 수 있는 구들방이 한 칸 있고, 봉수에 필요한 기계 따위를 넣어두는 창고가 한 칸 있다. 뿐만 아니라 봉수를 올릴 때 인원을 최소화 하기 위함인 듯 아궁이(거구炬口)를 마주보게 했다.
정조는 왕으로서 살아있을 때 늘 베옷을 입고, 옷이 헤지면 기워 입는 등 검소함을 실천하며 살았다. 이와 같은 모습을 늘 눈으로 확인했던 당시 화성 유수 이만수는 화령전을 견고하면서도 검소하게 짓기를 원하였다. 이 뜻을 받아들인 순조의 하교에 따라 단정하면서도 장중하게 만들어져서 당대의 대표적인 건물이 되었다. 건물은 정면 5간 측면 3간의 팔작 지붕이며, 화강제 기단에 세워졌다. 건물 구조는 익공집으로, 이 시대의 사당 건물과 같이 간소한 수법으로 되었다.
정전의 "운한각"이란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친필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현재는 고인인 대통령 박정희 친필로 운학각이라 쓰여 있다. 경내에는 풍화당이란 건물이 있으며 이 곳은 순조가 풍악을 즐기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오히려 순조가 선왕을 그리며 때를 보낸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건물구성은 외삼문과 내삼문, 운한각을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운한각 오른쪽에 전사청을 두었으며, 우측 담장 밖의 풍화당까지 아울러 조선 후기 기능적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조의 사당인 이 곳에서는 역대국왕이 현륭원과 건릉을 다녀갈 때마다 제향을 올렸으며, 탄신일과 납향일에도 제사를 올렸다.
정조의 영정은 1910년경에 일제의 강압으로 서울로 옮겼다가 잃어버리고, 1992년에 유네스코 경기도협의회의 건의로 새로운 영정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용(甬)이란 양쪽에 담이 있는 길을 말하는 것으로서, 즉 양쪽에 성가퀴(女牆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가 있는 성벽을 말한다. 다만 성벽보다는 일반적인 길처럼 느껴진다.
용도를 정확하게 알려면 수원화성의 전체적인 면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수원화성의 서남쪽은 팔달산이 있으며, 그 정상에 서장대라는 전시 군사 지휘소가 있다.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성벽이 계속 올라가는데, 이는 산의 능선에 따라서 성벽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가운데 부분이면서도 높은 부분에 성벽을 쌓는데, 이런 식으로 팔달산에는 성벽이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게 남치와 남포루 쪽을 지나서 서남암문 쪽에 다다르면 기존에는 없던 이상이 생긴다. 그쪽 부분의 지형은 남치나 남포루 쪽과 비교해서 넓은 부분이 비슷한 높이로서 성벽을 쌓아 서삼치 쪽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적에게 안정적인 공격 진지를 주게 된다.
즉 용도가 없는 경우를 상정해 볼 시, 수원화성에서 전투 시 적에게 약점으로 노출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서남암문 쪽이다. 산의 능선에 따라서 성벽을 쌓고 이곳에서 적을 방어하는 것은 적보다 좀 더 높은 곳에서 적의 모습을 관망하면서 싸우면 전투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도가 없다면 그러한 목적에서 일부가 사라져, 도리어 적에게 전략적 요충지를 주게 된다. 이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군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다.
고구려와 당의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과 대치하고 있었던 당 태종은 고구려의 뛰어난 방어에 의하여 공격이 계속 저지당한다. 이때, 당태종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토산(土山)이다. 흙으로 안시성 바깥에 산을 쌓아서 공격 진지를 만든다는 것인데, 이는 안시성보다 더 높은 곳에서 적의 모습을 관망하고, 그에 따라서 부대 배치를 하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공성병기 중 소차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이는 적의 성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의 모습을 관망할 수 있게 한 기계이다.
그럼 이 상황에서 화성은 적에게 고지를 주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2가지 선택권이 있다. 하나는 지금의 화양루까지 성벽을 빙 두르는 방식이다. 이 경우는 방어적 효율성 면에서는 올바른 선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엔 본래의 화성의 모습과 대조해 보아서 공사의 범위가 꽤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에 소비되는 인력과 재력의 피해는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럼 섣부르게 성벽을 쌓기도, 그렇다고 쌓지 않기도 모호한 상황이 온다. 이 상황에서 화성은 매우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 그 선택의 산물이 바로 용도이다. 화양루까지 성벽을 쌓고, 이는 거대한 치 모양을 하게 한다. 이게 있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공사에서 재력과 인력을 절반이나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앞서 말한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용도는 본래의 성에 붙어서 이어진 성벽에서 방어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에 대한 방비는 단연 허술해진다. 즉 방어진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생기는 것이다. 즉 용도는 방어의 취약점이 생기며 이곳이 점령될 경우 적에게 중요한 고지를 내주게 되므로, 방비에 신경을 쓰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점령당한다면 아군에게 치명적이다.
군사건축의 정수를 보여준 수원화성
그러나 화성은 이미 그 수까지 넘겨짚고 있었다. 첫째로는 방어의 확충이다. 여기에서 치의 개념이 도입된다. 서남암문과 화양루의 가운데 부분에는 용도동치(甬道東雉)와 용도서치(甬道西雉)라는 게 있다. 치(雉)란 꿩이란 뜻이다. 왜 꿩이란 이름이 붙었나 하면, 꿩이 자신의 모습을 숨길 시 머리를 수풀에다가 넣고 꽁무니를 뒤에 뺀다고 하여 그 모습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치, 혹은 치성(雉城)이라고 부른 이 독특한 방어시설은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의 성곽역사에서 빼놓으래야 빼놓을 수 없는 시설이다.
중간쯤에 이 두 치가 있음으로서 방어의 보완이 된다. 그리고 용도의 끝부분에는 화양루(華陽樓), 즉 서남각루가 있다. 수원화성에는 총 4개의 각루가 있다. 각루란 높은 위치에 세워진 건물로서 주변을 감시하고 전투 시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화성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화양루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곳에서 용도의 군사들을 지휘하면서 적과 싸웠던 것이다.
그래도 문제가 하나 생긴다. 이런 시설을 갖춰놓았다고 하더라도 점령당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곧장 성내로 침입하면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 화성의 구조물을 보면 마치 장기를 두는 것 같다. 적의 수를 읽고 미리 포진을 펼침으로서, 이미 고수의 수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침입을 막는 결정적인 것이 서남암문(西南暗門)이다. 서남암문은 서남포사(西南鋪舍)와 함께 구조물을 이루고 있다. 포사(鋪舍)란 성 밖의 위험을 성안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건물로서,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함을 알린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암문은 성 밖에 첩자를 보내거나 군량미를 운송하는 등, 적과의 싸움에서 섣불리 4대문으로 나가기 힘든 경우 사용하는 문인데, 이곳에서는 그러한 목적보다도 방비적 역할이 강하다. 그리고 포사가 있기 때문에 용도가 함락되었더라도 주위에 알려서 방어진을 더욱더 견고하게 할 수 있다.
이곳을 직접 밟으면서 마음속으로 내내 찬사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을 떠올리면서 이중, 삼중으로 이미 포진을 쳐 놓은 고수의 손길을 직접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옹성이나 치, 공심돈보다 더 화성의 방어능력이 뛰어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용도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용도의 역할에 대해서 화성 내에선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서남암문과 서남포사, 그리고 용도동치와 용도서치, 화양루, 이 용도와 관련된 설명은 이 5가지 시설물에 대한 내용뿐이지, 가장 중요한 용도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 너무나도 아쉽다.
수원화성은 18세기 조선의 군사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최고의 건축물이다. 그리고 곳곳에는 세밀하게 미학적 측면과 방어적 측면을 고려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 없고 단순히 경관만 구경한다면 이를 무엇이라 하겠는가.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문화재를 두고 정작 그 정수에 대한 자랑을 하지 못한다면 껍데기만 가지고 자랑하지, 정작 알맹이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 자료 - 수원화성의 홈페이지 / 화성행궁-세계문화유산 / 수원시화성사업소-사진콘테스트 / 오마이뉴스 송영대기자
수원 왕대폿집
거구의 주인 때문에 인근에서는 ‘뚱땡이집’이라고도 부른다. 양조장 막걸리를 때 묻은 양은 주전자에 내오는 얼마 남지 않은 진짜 왕대폿집이다. ‘뚱땡이’ 주인은 가게를 지키는 시간보다 가게 앞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리는 시간이 더 많다. 주인이 자리를 지킬 땐 막걸리 주전자에 술이라도 채워 주지만 만약 없으면 알아서 마셔야 한다. 미역튀김과 게튀김은 서비스로 제공하므로 안주를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맛있게 술을 마실 수 있다. 주변 경치가 수려해 오랫동안 이 지역의 예술가가 즐겨 찾던 풍류 있는 집이기도 하다. ●031-256-9206
Check Point 화성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이 한눈에 보인다. 송사리와 붕어가 헤엄치는 청계천의 모델인 수원천이 바로 옆을 흐른다
정조대왕의 효심 들려주는 성벽의 속삭임 - 화성 걷기
김기은 걷기모임 유유자적 회원
총 걷는 거리: 6㎞
총 걸리는 시간: 1시간 50분
떠나기 전에: 수원 화성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어른은 1000원, 청소년은 700원, 어린이는 500원이다. 수원시민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타종도 돈을 받는다. 1~2명이 종을 칠 경우 3번을 치는데 1000원을 내야 한다. 성 안에 7개의 화장실이 있어서 큰 불편은 없다. 장안문과 팔달문 부근엔 매점이 있다.
경기도 수원 화성(華城)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陵寢·묘)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산 부근에 있던 마을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려고 지은 ‘효심’의 상징이다. 정약용이 고안한 활차와 거중기를 활용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기도 하다. 화성을 따라 걸으며 정조의 지극한 효심과 조선의 ‘계획신도시’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보자.
1. 장안문 입구~서장대 관광안내소(1.3㎞/25분)
장안문에서 장안공원 쪽 북서적대로 올라가서, 성벽을 오른쪽에 두고 성벽을 따라 걷는다. 북서포루, 북포루, 서북공심돈, 화서문을 차례로 지나면 야생화 산책로다. 토종 야생화 50여 종을 심어 놓았다. 야생화 산책로를 지나 서북각루와 서포루를 지나면 과거에 팔달산 정상에서 성 주변을 살피며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라던 서장대가 나온다. 서장대 관광안내소 옆에 ‘효원(孝園)의 종(鐘)’이 있다. 소원을 빌면서 종을 직접 쳐봐도 좋겠다.
2. 서장대 관광안내소~팔달문(1.4㎞/25분)
서장대 관광안내소에서 성벽을 따라 서포루를 지나면 서남암문이다(화양루를 보고 싶다면 잠시 서남암문으로 들어가 둘러보면 된다). 서남암문에서 남포루를 지나쳐 성벽을 따라 계속 계단을 내려가면 왼쪽에 팔달문 관광안내소가 있다. 안내소를 지나 큰길로 나가 팔달문을 보면서 왼쪽으로 간다. 첫 번째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으로 10m쯤 가면 시장 골목이 나온다. 팔달문을 가운데 두고 시계방향으로 반 바퀴 도는 셈이다.
3. 팔달문~동장대(2㎞/35분)
팔달문에서 시장 길로 접어들어 작은 다리를 건너면 ‘지동시장’ 입구다. 시장 앞에서 왼쪽으로 10m쯤 가면 오른쪽으로 다시 성벽이 시작된다. 계단 왼편엔 무궁화가 한창이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가을 정취를 더한다. 다시 성벽을 따라 동남각루와 동이포루를 지나면 봉돈이 나온다. 봉돈을 지나 동일포루, 창룡문, 동북노대, 동북공심돈을 지나면 동장대다.
4. 동장대~장안문(1.3㎞/25분)
동장대를 지나 성벽으로 올라선다. 동암문, 동북포루를 지나면 북암문이다. 북암문 밖으로 나가 용연(龍淵)을 둘러본 후, 다시 북암문으로 들어서서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을 지나 계속 성벽을 따라가면 처음 출발한 장안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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