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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남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팔만대장경

by 구석구석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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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문화유산 해인사 팔만대장경

가야산 남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최근 등산로가 폐쇄된 남산제일봉을 앞에 두고 있다. 신라 제40대 애장왕때 순응과 이정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가야산에 초당을 지은 데서 시작된다. 법보종찰로서 통도사, 송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워낙 유명한 사찰이어서 두말하면 숨 가쁠 지경이다.  

팔만대장경 (국보32호) 과 대장경판전 (국보52호)

 부처의 가르침인 불교의 교리를 집대성한 불전을 법보라 한다. 해인사는 그러한 법보의 종찰이다. 재조고려대장경(속칭 팔만대장경, 국보 32 호)의 원판을 해인사의 장경판전(국보 52호)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는 신라 하대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스님에 의해 왕실의 후원으로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되었다. 그 후 930년경 고려 태조의 도움으로 희랑(希朗) 대사에 의하여 제대로 된 사찰의 면모를 갖추며 새롭게 중창이 되었으며, 조선 태조 때 강화도에 있던 고려대장경을 해인사로 이안하면서 법보종찰(法寶宗刹)로서 사격을 높이며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대장경'이란 무엇인가. '세개의 광주리'란 뜻의 산스크리트어 '트리피타카'를 번역한 삼장경 또는 '일체경'이라고도 일컫고 있는 대장경은 부처가 직접 설법한 것으로 알려진 '경'과 수행자들이 지켜야할 계율을 적은 '율'은 물론이고 그에 대해 논리적으로 정리한 주석인 '논' 등 일체를 집합한 총서이다. '삼장경'은 옛날 인도에서 불전을 나뭇잎에 새겨 '패엽경'이라 불렀는데, 그것을 경장 율장 논장으로 분류하여 세 광주리에 나눠 보관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화엄십찰의 하나인 해인사전경

그러나 이러한 불전이 전화나 재해 등으로 상실되는 경우가 잦고보니 일찍부터 이를 돌이나 나무에 새겨 영구보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대장경의 조조가 착수되었다. 중국 송나라의 '촉판 대장경'을 필 두로 그뒤 동양에서는 20여종의 '대장경'이 만들어졌다. 해인사가 보관하고 있는 '고려대장경'은 그 가운데서도 질에 있어서나 양에 있어서나 단연 으뜸가는 것으로 세계는 알고 있다.  

 우선 고려대장경 조조의 배경과 동기부터 심상치가 않다. 서기 1011년 고려의 현종때 만주의 거란병이 서울 송악성까지 처들어 오자 왕은 남쪽 으로 피난가서 적병을 불법의 가피력(부처나 보살이 사람들에게 주는 힘) 으로 퇴치하려는 신앙으로 대장경 판각을 발원하였다. 그러자 거란병은 제발로 물러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때 조조한 것이 18년에 걸처 완성한 이른바 '초조 고려대장경'이다. 그것은 송의 촉판대장경에 이어 사상 두번째의 것이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했던 초조대장경은 고종 19년(1232년) 몽골병이 쳐들어 오면서 불을 질러 소실되고 말았다.

해인사 대장경판

'재조 고려대장경'이라고도 일컫고 있는 현존하는 해인사의 대장경 또 한 몽골병의 침략을 불력에 의해서 퇴치하려는 발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파천한 임시수도에서 1236년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이듬해부터 판각에 착수한 재조대장경은 1251년에 15년 동안의 대 불사를 완성시켰다. 당시 경판의 총수가 8만1천1백37판.이 재조대장경은 조선조에 들어와 강화도의 선원사에서 지천사로 옮겼다가 그 막대한 양의 경판을 다시 영남의 해인사로 운반 봉안하게 된 것이 아마도 태조 7년 (1398년). 2006년은 그 6백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현재 해인사에 있는 경판은 1천5백16종에 총 8만1천2백58판(이 안에는 후대에 판각된 15종의 문헌이 포함되어 있다). 8만여판에 8만4천 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있다해서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경판의 목재는 자작나무다.(대장경판 제조에 사용된 원목의 수종은 대부분 산벚나무류로서 전체 시편 수 대비 62%에 해당하고 경판 부위에서만 보더라도 64%에 달하며 마구리의 구성수종에서도 56%에 해당한다.

또한 돌배나무류는 전체 조사시편수 대비 약 13%이고 채취부위별로는 경판부에서도 14%나 점유하고 있다. 기타 자작나무류 8%, 층층나무류 6%, 단풍나무류와 후박나무류가 각각 3%, 버드나무와 굴거리나무가 각각 1점씩 검출되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경판에는 사용하지 않았고 마구리 혹은 부위불명 재료에서 각각 1-2점이 검출되고 있다.

경판의 수종은 산벚나무류와 돌배나무류가 전체 검출된 조사수종의 75%로서 대부분을 차지하며 지금까지 자작나무로 알려진 수종은 8%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야후지식리더 오현승님의 글중에서)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 등지에서 생산되는 자작나무를 벌채해서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조각을 낸다. 그 조각을 다시 소금물에 삶은 뒤, 그늘에서 말려 대패질을 하고 나서 경문을 한자 한자 새겨 판각을 마친 뒤에는 경판 양쪽 끝에 경판보다는 약간 높고 약간 두꺼운 각목으로 마구리를 만들어 그 네 귀퉁이에 구리판의 장식을 붙인다. 이 동제 장식의 마구리는 경판의 뒤틀림이나 터짐을 방지 할뿐만 아니라 판가에 경판을 찍찍하게 꽂아두어도 마구리가 두껍기 때문에 경판끼리 서로 부딪치는 것을 막고 통풍을 가능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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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부족해서 8만여판의 경판마다에는 다시 옻칠을 해서 부식을 방지하도록 대비해두고 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나 슈타인웨이 등 유럽의 명품 악기를 만들어내는 장인들처럼 꼼꼼함과 정성과 그리고 '시간'을 쏟아부었던 것 들이다. 대충 세로 30센티에 가로 70센티의 경판에는 평균 14자씩 23행의 경문 이 새겨져 있다. 게다가 경판은 1면만이 아니라 앞뒷면에 판각이 되어 있기 때문에 8만대장경에 세긴 글자수는 줄잡아 16만3천쪽에 5천3백만자(!). 천자도 아니요 만자도 아닌 5천3백만자를 마치 한 사람의 글씨인 듯 처음부터 똑같은 필체의 정자로, 그것도 붓글씨가 아니라 칼로 나무판에 새겨 놓은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더욱이 해인사의 재조대장경은 지금은 소실된 송의 '촉판대장경'이나 '거란판 대장경'의 내용을 아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어떤 대장경에도 수록되지 않은, 중요한 12종의 대승경론이 포함되어 있어 한층 그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특히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은 외국군 침략하의 한계상황 속 에서 임시수도로 피난중에 착수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대장경판의 편찬과 판각에 있어서는 한자의 오자도 탈자도 내지 않기 위해 여러차례의 교열을 거쳐 완벽을 기했다는 사실이다. 기막히게 훌륭한 유물을 발굴하면 우선 중국서 건너 온 것이 아니냐고 지레 짐작해보고, 좋은 것은 덮어놓고 '외제'라 믿고 있는 오늘날의 한심스런 문화적 열등의식의 만연에 상도한다면 그러한 '세기말병'의 치유를 위해서도 해인사 순례를 통해 '적당주의'나 '대강대강주의'가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전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오직 현대한국의 당대병임을 깨닫는 것은 약이 될 것이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해인사가 자랑하는 국보의 한쪽밖에 되지 않는다. 또다른 자랑, 또 다른 국보는 그러한 대장경판을 여러 백년의 세월과 전란많던 역사를 뚫고 보존케한, 기술과 정성의 집결체인 '장경판전' 이다. 대장경이 고려조 문화의 한 금자탑이라면 장경판전은 조선조 문화의 한 금자탑이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앞 뒤 두채로 이뤄진 장경판전은 각각 앞면 15간, 옆면 2간으로 도합 60간이다. 경판을 오래 보존하기위해선 적당한 환기와 온도로 부식을 방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를 위해 장경판전에는 건물의 외벽에 붙박이살창을 마련해두었는데 벽면의 아래와위의 살창, 그리고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서로 달리해 엇갈리게 함으로써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서 아래위로 돌아나가도록 계획한 절묘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법보전

뿐만 아니라 건물의 바닥도 맨흙바닥으로 두고 천장도 반자가 없이 지붕 구조가 드러나 보이도록해서 습기가 바닥과 지붕밑에서 조정이 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그건 어떻든 사시사철 창문이 개방된 장경판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년 동안 날짐승이 침범하지 못하고 쥐새끼도 들락거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천장에 거미줄이 쳐진 일조차 없었다고 한다. '선험적 직관에 의한 과학적 합리성'의 소산이라고 불교연구원의 '해인사'편에선 설명하고 있지만 오늘의 우리가 고려조-조선조의 선대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기 위해선 장경판전의 비밀을 현대과학으로 풀이해놓아야 될 것이다. 

해인사의 경판전은 햇빛을 충분히 이용하는 구조를 가졌다.
아침에는 남쪽 면 탁 트인 넓은 아래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이 경판꽂이는 피하고 바닥만을 데워서 따뜻하게 하다. 아침에는 남쪽 바닥은 아랫목이 되는 반면 북쪽 바닥은 찬 윗목이 된다. 그러면 아랫목의 더워진 공기가 팽창하면서 위로 올라가서 윗목의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대류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오후에는 오전과는 반대방향으로 대류가 일어난다. 그 결과 경판전 내부의 온도와 습도가 균일해 지는 것이다.

 

동/서 사간전

팔만대장경의 '신비스러운 영험'은 또 있다. 장경판전을 세운 이후 해인사에는 전후 일곱차례의 화재가 일어나 모든 당우를 태워버렸으나 장경 판전만은 온존하게 보존되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노략질로부터도 무사할 수 있었다. 불력의 가피, 가야산의 지리, 대장경을 판각한 사람들의 지성. 삼재가 하나된 은덕의 기적이라고나 할 것인가….

팔만대장경이 훌륭한 재료와 뛰어난 구조물 속에 잘 보관되어 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왠지 국보를 불타기 쉬운 나무로 된 허름한 곳에 보관하기가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197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첨단기술로 장치된 새 경판전을 건축하고 일부 경판을 옮겨놓았다. 그런데 700년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경판이 갈라지고 비틀어지는 일이 생겨나서 부랴부랴 경판을 옛 경판전으로 다시 옮겨 놓아야 했다. 20세기의 현대과학이 13세기의 고려시대 과학에 완패한 것이다.

대장경판을 새긴 것은 고려시대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장경을 보존하기 위해 자연의 과학을 이용한 장경판전을 지은 것은 조선시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거의 수많은 손길들을 생각하며 소중한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보존ㆍ관리하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 자료

조선일보 2005. 5. 12 최정호·연세대교수

한국관광공사 '문화관광축제'

동판팔만대장경 홈페이지 /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해인사 홈페이지

야후 블로그 '문화재이야기'

과학칼럼리스트 이정모


팔만대장경 지켜냈던 그 ‘빨간 마후라’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의 어느날,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장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에게 폭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공비들이 숨어 있는 가야산을 폭격하라."는 지시였다. 자신이 지휘하는 전대를 이끌고 출격했지만 김 장군은 가야산에 단 한 발의 폭탄도 떨어뜨릴 수 없었다. 그곳에는 바로 팔만대장경을 모셔둔 해인사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빨치산 몇명 죽이기 위해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불태울 수는 없다."고 목숨도 내놓은 항명을 했다. 그 항명으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지금 우리 민족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김 장군은 1954년 34살의 나이로 비행 중 실종됐다. 공군 창설 멤버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그이지만, 팔만대장경에 얽힌 이야기는 최근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문화재청이 발간한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에도 이름이 누락됐고, 그 공적도 부하 장지량 장군의 것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그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고 김 장군을 문화재 지킴이로 되살린 것은 해인사였다. 해인사는 2002년 장군의 공적비 건립을 추진하던 중 이와 같은 사실을 밝혀냈고, 공군 역시 이를 계기로 역사자료발굴위원회를 꾸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았다. 

/ 서울신문 2009.11 강병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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