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군 판교면 현암리는 오래전에 시곗바늘이 멈춘 것 같은, 오래된 흑백사진 속 풍경 같은 마을이다. 마을은 죄다 낡고 오래된 것들의 질감으로 가득하다. 녹슬어가는 철 대문과 기울어진 목조건물, 막다른 골목과 펑크 난 리어카, 셀로판지를 떼어낸 자국으로 유리창에 남은 옛 대폿집 상호…. 현암리 골목에는 쇠락한 건물들이 마치 유적처럼 남아 시간을 되돌린 것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암리를 일러 ‘판교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판교’라면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먼저 떠올릴 텐데, 여기 서천의 판교도 성남 판교와 지명 유래가 똑같다. 지금은 폐교된 판교초 앞 물길에다 널빤지로 다리를 놓고 다녔다 해서 ‘널다리’로 부르다가 ‘너더리’가 됐고, 이걸 한자로 옮기면서 ‘널빤지 판(板)’에 ‘다리 교(橋)’ 자를 써 판교라 불렀다.
지금은 판교면이지만, 본래는 비인군 동면에 속한 ‘판교리’였다. 그러던 것이 1930년 장항선 열차가 놓이고 판교역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번성하자 ‘판교면’으로 승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판교면의 중심은 오일장과 우시장이 서던 판교리였는데, 정작 판교역이 들어선 자리는 판교리가 아니라 이웃 현암리였다. 현암리에다 역을 세우면서, 역 이름은 그때까지 인근에서 가장 번성한 마을이었던 판교리를 가져다 쓴 것이다.
기차역이 현암리에 들어서자 판교면의 중심은 판교리에서 급속도로 현암리로 옮겨갔다. 기차역이 서자 이듬해인 1931년 오일장이 현암리로 옮겨왔다. 1935년에는 판교우편소, 1936년에는 판교면사무소, 1942년에는 판교경찰서가 줄줄이 현암리로 이전했다.
제재소와 목공소, 정미소, 양곡상, 양조장이 앞다퉈 현암리에서 문을 열었다. 이따금 악극단 쇼까지 공연하는 극장까지 마을에 들어섰을 정도였으니 전성기에 현암리가 얼마나 흥청거렸는지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1980년대 들어 도시중심의 국토개발로 마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성장의 속도도 빨랐지만, 쇠퇴의 속도는 훨씬 더 빨랐다. 확인사살처럼 당겨진 마지막 방아쇠가 2018년 장항선 철로 직선화로 인한 판교역 이전이었다.
역으로 번성했던 마을은 역이 빠져나가면서 스러졌다. 여기다가 2009년 서천공주고속도로, 2015년 국도 4호선까지 멀찌감치 비껴가면서 현암리는 교통과 지리적 중요성을 모두 다 잃고 섬이 되고 말았다.
이런 과정에서 성장과 쇠퇴의 시·공간이 마을에 고스란히 박제처럼 남았다. 쇠락의 속도가 너무 빨라 미처 지워지지 않은 예전의 모습. 이게 지금 현암리가 간직하고 있는 풍경이다.
지금 현암리에 남아 있는 오래된 공간들은 그들이 그때 버리고 간 것들이다. 버텨보려 했다면 어떻게든 고쳐 쓰든가 허물고 다시 지으면서 훼손됐을 텐데, 아예 버리고 가는 바람에 오히려 옛 모습 그대로다. 이렇게 남겨진 옛것의 가치를 알아본 문화재청은 지난 10월 현암리 일대의 건물 7개를 묶어 통째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특정 건축물이 아니라 마을의 일정 공간 전체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건 이례적이다. 건물 하나하나뿐만 아니라, 마을에 남겨진 근대의 자취를 보존해보겠다는 뜻이다.
현암리의 건물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옛 판교시장 인근의 ‘장미사진관’이라고 부르는 2층 목조주택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쌀 배급소로 지어진 건물인데, 당시로써는 드물게 2층 한옥 상가로 지어진 건물이어서 독특한 외관으로 랜드마크 역할을 해왔다.
장미사진관이 들어선 자리는 판교 오일장과 우시장이 연결되는 곳으로 모시전, 어물전, 싸전, 여관, 대폿집 등이 늘어서 번성했다. 장미사진관도 한때 쌀집이었다가 주산학원, 사진관, 점방, 원불교 예배당 등으로 바뀌어오면서도 옛 모습을 잃지 않았다. 사진관은 진즉 문을 닫았지만 증명사진을 찍어주던 사진관 상호가 곧 건물의 이름이 돼 남았다.
1930년대 문을 열었다는 삼화정미소는 목조건축물의 외관에서부터 시간의 깊이가 묻어난다. 오 씨 일가가 삼대에 걸쳐 운영해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방앗간’이라고 불리는데, ‘삼화(三和)’란 상호는 삼형제가 의좋게 운영하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담아 지은 것이란다.
한창때 현암리에는 방앗간만 여섯개나 있었다는데, 그중 오방앗간이 가장 장사가 잘 돼 명절이면 100명이 넘는 손님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했다.
3대에 걸쳐 술을 빚어오던 동일주조장은 지난 2000년 문을 닫았다. 주조장 건물이 어찌나 초라하게 쇠락했는지 20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술을 빚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런 인상을 주는 데는 시멘트벽의 ‘동일주조장’ 상호 아래에 고딕체로 굵게 새겨진 전화 번호가 한몫한다.
‘TEL 45’. 전화 번호가 두 자릿수 ‘45’번이다. 그러고 보니 골목 초입 한약방 전화 번호는 ‘29’번이었고, 삼화정미소는 ‘52’번이었다. 자석식 교환 전화가 있었던 아득한 시절의 전화 번호다. 그때는 교환수가 전화를 연결해줬다.
※ 현암리 판교마을의 오래된 건물 그림은 문화체육관광부 유휴공간문화재생사업 진행 과정에서 우편엽서를 만들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현암리에 아직도 꾸준하게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건 음식점이다. 현암리에서 가장 이름난 식당은 1978년에 개업한 콩국수를 내는 ‘진미식당’(사진)이다. 마을은 고즈넉한데 식당 안에는 늘 손님들이 있다. 여름에는 동네 주민 수보다 더 많은 손님이 문 앞에 줄을 선다.
메뉴는 콩국수와 막국수, 콩전. 이게 전부다. 진한 콩물의 콩국수도 좋고, 누룽지처럼 구워낸 콩전의 고소한 맛도 좋다. 작년까지는 4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딱 5개월만 하고 문을 닫았는데, 올해부터는 연중 문을 연다. 이제 언제 가도 콩국수 맛을 볼 수 있다.
현암리의 중국집 ‘동생춘’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팔순을 목전에 둔 60년 경력의 수타면 장인이 자그마치 49년째 한자리에서 운영하고 있는 중국집이다. 충남 예산의 중국집에서 수타 기술을 배워 현암리가 한창 경기가 좋던 시절에 이곳에서 개업했다. 자장면도, 볶음밥도 훌륭하다. 다만 이곳에서는 세 그릇 이상 주문이 있을 때만 면을 친다.
현암리는 냉면집으로도 유명하다. 진미식당 건너편에는 둘 다 ‘원조’의 간판을 높게 매단 ‘수정식당’과 ‘삼성냉면’이 마주 보고 있다. 두 곳 모두 도토리가루와 고구마 전분으로 면을 뽑아 냉면을 내는 집이다. 질긴 면발의 냉면인데 정통파 냉면이라기보다는 시장통 냉면 혹은 분식집 냉면 스타일에 가깝다.
[문화일보 2021.12 서천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현암리234번지 판교수정냉면 041-951-5573
서천 나들목에서 부여방면으로 10분 거리의 판교역 좌측에 위치한 수정식당은 고객에게 친절하기로는 판교면 내에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다.
3개의 별실이 있어 오붓한 분위기에서 각종 모임을 갖기도 그만인 수정식당은 단골고객이 상당히 많을 정도로 유명 한데, 이유는 김연화(58) 사장이 손수 냉면을 만들기 때문이다.
수정식당의 냉면은 요즘같이 급격히 변화되는 맛과는 달리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맛이 변치 않고 한결같다. 냉면의 맛을 좌우하는 건 단연 면발과 육수다. 이곳 냉면의 면은 최상급의 전분 과 순수 도토리 전분을 사용해 면을 뽑기에 쉽게 끊어 지지 않고 꼬들 꼬들 탱탱함을 유지한다.
냉면이 여름 별미라면 5가지 버섯의 내뿜는 향긋한 향을 자랑하는 버섯전골은 겨울철 별미로 손꼽힌다. 버섯전골은 사장이 직접 재배해 신선하고 믿고 먹을 수 있는 각종야채들과 쇠고기가 들어가 담백함 과 향긋함 그리고 버섯 특유의 씹히는 맛이 어우러져 먹는 이의 오감을 만족시켜준다.
그때그때 무쳐 내는 배추 겉절이도 인기 있다. 가족들이 운영 하여 항상 웃음이 넘쳐나는 가정집 분위기가 풍기는 수정식당은 20 ~ 60대 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겨 찾을 수 있는 맛집이다.
현암리 255-1 삼성식당 041-951-5578
30년 전통의 소문난 냉면 전문점. 진한 사골육수 맛을 느낄 수 있는 물냉면은 속을 시원하게 달래주어 더울때면 항상 생각나는 별미이며, 시원한 육수와 함께 나오는 비빔냉면은 그 매콤한 맛이 입안을 얼얼하게 하여 한국인의 입맛에 제격이다.
오성초등학교 맞은편에 위치 / 대표메뉴 냉면 / 10:00~22:30 / 전체 70석 / 30대 주차가능
ㅁ 서천군 판교면 종판로 895(판교 농협 앞) / 판교오일장
[여행스케치=서천 전설기자] 여기는 시간이 정지 된 충남 서천 판교마을. 사람은 간데없고 몇 겹을 덧댄 슬레이트 지붕아래 빛바랜 방앗간, 주조장, 철공소의 간판이 1960년대 그 어디께 멈춰 있다.
마을 전체가 빈집 같이 고요한데 닷새에 한 번 시끌벅적 활기를 되찾는 날이 있다니, 무슨 영문일꼬?
한때는 전국의 날고 기는 소물이꾼의 집합소였다. ‘충남 3대 우시장’ 중 하나인 판교우시장이 서던 시절에는 음무음무 소 울음소리, 시끌시끌 호객소리 뒤섞여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몰려든 인파 끼니 맞추느라 조막만한 마을 곳곳에 음식점이며 구멍가게가 줄줄이 생겼고 그나마도 빈자리 없이 미어터졌다. 하지만 모두가 이미 지나버린 왕년의 이야기일 뿐.
“마을이 소 반 사람 반이였지. 대단혔어 아주. 근데 소전 없어지고 마을이 확 죽었어. 한 십몇년 됐나. 젊은 사람들 시골에 발붙일 일 없고 늙은 사는 사람만 남으니 아주 조용허요.”
서울 용산역에서 서천 판교역을 잇는 기차는 하루 8대. 기차 시간 맞춰 손님을 태우러 나왔다는 택시기사 허기철 씨가 한방향을 가리킨다. “마을까진 택시 탈 거 없어. 5분만 걸어.” 짚어준 방향을 따라 판교역 왼편으로 난 굴다리를 지난다.
맞게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시골길 위에서 슬슬 불안감이 밀려온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장날 특유의 복작거림이 없다. 장이 서긴 서는 건가, 싶을 즈음 마을 입구에서 김연자 할머니와 마주친다. “신작로 따라 가다보면 논길 지나서 판교 농협이 나와. 장은 그 앞부터 시장까지 서는디 늦게 가면 사람 없어. 살 것 있음 점심 전에 후딱 다녀와야지. 늦으면 못 사.”
가슴 쓸어내리며 농협을 찾아가는 길에 골동품 가게에서 꺼내온 것 같은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유리창이 성하지 않은 적산가옥과 함께 사람 떠난 지 오래인 건강원, 철공소, 정미소 같은 폐가가 길가에 여럿이다.
사람 온기 없는 풍경이지만 내리치는 봄볕 때문인지, 고운 봄꽃 덕분인지 을씨년스럽지는 않다. 아버지 사진첩에서나 만나봤던 풍경을 실물로 접하니 그저 뜻 모를 반가움만 앞설 뿐이다. 누구는 이런 마음을 두고 향수(鄕愁)라 했던가.
신작로 따라 쭉 걸어 나가니 김 할머니 말씀대로 판교 농협 옆으로 소박한 난전이 보인다. 할머니 두어 분이 쑥이며 냉이 같은 봄나물을 늘어놓고 있다. “쑥이 새벽에 캔 거라 다 좋아. 다듬어 놨으니께 국 끓여 먹어.” 쑥국을 끓이면 족히 3일은 먹을 양의 쑥을 3000원에 산다.
돌아서는 동안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아 쑥을 캤을 할머니 모습이 어른거린다. 난전이라고 부르기에도 쑥스러운 좌판 몇 개를 지나면 간판 하나 없는 판교시장 입구다.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의 양옆으로 조그마한 점포들이 쏙쏙 들어차 있다.
겉으로는 작아보여도 장터는 장터. 국화빵 굽는 냄새가 고소한 시장 안에는 농기구, 생활용품, 옷가지 등등 입고 먹고 자는데 필요한 생필품이 빼곡하다.
그중에서도 좌대 한가득 쌓인 씨앗 더미가 눈에 들어온다. 순무, 열무, 여주, 완두, 수박, 참외…. 그 가짓수가 끝이 없다.
꽁꽁 언 땅이 무르게 녹는 봄. 뭐라도 심어 볼까 서성이다 모듬 쌈 채소와 쑥갓 씨앗을 산다. “거름이고 뭐고 일체 주지 말고 그냥 흙에 뿌려 둬. 이런 계절에는 씨 뿌리는 게 일이지 뿌려만 놓으면 알아서 싹 트고 쑥쑥 크니까.
시골은 천지가 흙이라 상관없는데 도시에는 씨 뿌릴 때나 있나 몰라. 암튼 상추 하나 그냥 줄 테니까 잘 키워 먹어.” 둘을 사면 하나가 덤으로 얹어주는 것이 장터 인심이다. 덤 챙기는 재미에 푹 빠져 크지도 않은 시장을 휘젓고 돌아다닌다.
시장의 끝은 작은 어판장이다. 서해와 맞닿은 다사항이 지척이라 때깔 좋은 제철 해산물이 가득하다.
굴 파는 아주머니가 “떡굴이유. 들여가유” 오가는 사람을 불러 세운다. 그 뒤편 볕 좋은 자리에 박대, 갈치, 가오리가 꾸덕꾸덕 말라간다.
흔한 풍경을 특별하게 완성하는 것은 고대유물 같은 적산가옥이다. 검은 비닐봉지에 갈치를 담아주는 상인의 뒤로 언제 지어진 것인지 시대를 가늠하기 힘든 가옥들이 서 있다. 그 오묘한 조화를 어떻게 말로 풀까.
“서울에서 학생들 오면 집이고 구멍가게고 사진을 그렇게들 찍어가. 처음 보는 사람들 눈에나 신기하지, 백날 보고 사는 사람한테는 그냥 옛날집이지 뭐. 집이 100년이 됐고 200년이 됐고 상관있나. 그냥 그 앞에 물건 널어놓고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고 그런 거지.”
◁ 판교마을 옥산집의 김박순 할머니가 말걸리 한 사발을 따라 주신다. 2015년 5월 사진 / 전설 기자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다면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스케치북에 담아갈 텐데. 선 자리에서 카메라만 만지작댄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도 발걸음 멈추고 장터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본다.
천천히 걸었음에도 1시간을 채우지 못하는 작은 장터가 못내 아쉬울 뿐. 돌아서기 섭섭해 시장 입구를 서성이는데 사발에 막걸리를 따르는 할머니 한분이 보인다. 장보고 돌아가는 길, 가볍게 들러 목을 축이는 조그마한 대폿집임을 한눈에 알아본다.
“내가 고향이 옥천이라 옥천집이라고 간판 걸었어. 올해 여든 일곱인데 아직 일을 혀. 자식을 다섯 낳았는데 다 서울 가뿔고 심심하니께. 늙어서 사람 쫓아다니는 것도 못할 일이라 사람들이 날 찾아오게 만들었지. 막걸리는 한잔에 1000원, 소주는 1병에 3000원 씩 받어. 김치에 고기 넣고 짠지국 끓였는디 막걸리 묵고 갈 거면 퍼 줄테니까 뜨건 국물 먹고 가.”
김박순 할머니가 뽀얀 모시생막걸리를 한 사발 따라 주신다. 술잔을 받고 보니 눈앞에 파김치, 깻잎 장아찌, 콩나물 무침, 콩자반, 오이나물, 날배추까지 안주만 여섯 가지다. 막걸리를 양껏 들이켜고 벌겋게 끓여낸 짠지국 한 수저 떠먹으니 꺼억, 기분 좋은 술트림이 터진다.
“내가 이 집 수양아들인데 이집이 동네사람 다 아는 진짜배기야. 오다가다 한 번씩 들러서 잔술 먹고 가지. 가끔 서울이고 어디서 젊은 사람들 오면 뭐가 좋은지 연신 사진 찍어가.”
딱 4명 앉을 자리만 있는 허름한 대폿집. 모르는 사람과 술잔을 부딪힌다. 이방인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말하면, 본토박이 농군은 그 답례로 언제부터 어떻게 살았는지를 얘기해준다. 옛 이야기 안주삼아 마신 낮술에 뺨에 열이 오른다. 취하기 좋은 장터의 정오다.
요리 레시피 - 박대 양념구이
① 판교오일장에서 빛깔 좋은 생물 박대를 산다. 큼지막한 녀석으로 골라 5000원에 7마리. 볕 좋은 자리에서 말려 꾸덕꾸덕한 반 건조 박대도 OK!
② 장터의 박대는 이미 내장을 깨끗이 발라 둔 상태다. 따로 손질할 필요 없이 흐르는 물에 씻은 다음 물기를 제거하고 소금과 후춧가루로 밑간을 한다.
③ 오븐이나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노릇노릇해 질 때까지 튀기듯 굽는다. 충분히 구워야 뼈를 바르지 않고 통째로 먹기에 좋으니 참고할 것.
④ 고추장·고춧가루·다진 마늘 1큰 술씩, 진간장·물 2큰 술씩, 요리 술·물엿 3큰 술씩에 양파 반개를 다져 넣고 자글자글 끓여 빨간 양념을 만든다.
⑤ 그냥 먹어도 맛있는 박대 구이에 만들어 둔 양념장을 앞뒤로 고르게 펴 바른다. 박대 살에 매콤하고 달콤한 양념이 벨 정도로 약한불에서 졸인다.
⑥ 접시에 보기 좋게 담고 쪽파를 송송 썰어 올려주면 박대 양념구이 완성. 서천에서 공수한 생막걸리 한사발을 곁들여 맛있게도 냠냠.
출처 : 여행스케치(http://www.ktske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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