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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이것저것

불가사의 만리장성

by 구석구석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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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으로써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춘추시대 제(齊)가 영토방위를 위햐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통일(BC 221) 후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허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근년에 이 장성의 동부 유지(遺址)가 둥베이지구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흉노로부터 지키려고 장성을 란저우(蘭州) 북방에서 서쪽으로 둔황(敦煌) 서편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방민족의 활동으로 장성 위치는 남하하여, 6세기 중엽 북제(北齊)는 다퉁(大同) 북서에서 쥐융관(居庸關)을 거쳐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을 축성하였다.

수(隋)는 돌궐·거란 방비를 위하여 오르도스(내몽골자치구의 중남부) 남쪽에 장성을 쌓았다.

당대(唐代)에 들어서 북쪽까지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고,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明)나라시대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관광 대상이 되고 있는 바다링〔八達嶺〕 근처의 장성은 높이 8.5m, 두께는 밑부분 6.5m, 윗부분 5.7m이며, 위에는 높이 1.7m의 연속된 철자형(凸字形) 담인 성가퀴(城堞)를 만들고 총안(銃眼)을 냈고, 120m 간격으로 돈대(墩臺)를 만들어 군사의 주둔과 감시에 이용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본토와 만주·몽골 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만리장성

장성은 중국 고대의 중요한 군사 시설로 기원전 7세기에 건조되기 시작하였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북방 흉노족의 남하 교란을 방지하기 위해 기원전 214년부터 각 제후국이건조한 장성을 수축, 중축, 연결하기 시작, 10 년을 거쳐방대한 장성이 구축 되었다.

그 후 역대 왕조들이 방어 수요에 따라 개수 하였다. 명나라때에 와서 선후로 약 200여년간 장성을 18차나 수축,그리하여 장성이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에서 동쪽의 하북성 산해관까지 뭇산을 넘고 초지를 건너고 사막을 경유하여 6개 성, 1개 시를 가로 지난 총 길이가 6,70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현재의 장성이 되게 하였다. 장성은 대부분 오늘까지 기본적으로 완전하게 보전되어 있다.

만리장성 팔달령

북경 팔달령 구간의 장성은 명나라 장성의 대표이다. 성벽의 높이는 8.5미터, 윗 부분의 너비는 5.7미터이고 성가퀴의 높이는 1미터이다. 장성은 세계일대의 가관으로서 구불구불 끝없이 뻗어나가는 기세 웅장하다.

운대는 거용관의 주요 건물의 하나로서 원래는 사탑 기반이며 그 아래는 북상 요로이다. 운대의 아치벽에는 4대 천왕과 무늬 부조가 조각되어 있는 데 정교하고 생동하여 석조 중의 정품으로 꼽히고 있다.

팔달령 장성의 성벽은 남과 북으로 각각 산세를 따라 뻗어 올라 갔는데 남북 두 봉우리에 각각 4개의 망루가 우뚝 솟아 있고 기세 웅장하고 경치 화려하다.

황화진은 옛날 군사 요충지로 모전욕을 비롯한 90 킬로미터 장성을 관할하였는데 명나라때 황릉을 직접 호위하던 <1 급 장성>으로 <수도 북문> 으로 불리웠다.


중국 네티즌의 몰표로 세계신7대불가사의에서 1위를 차지한 중국의 10경에 속하는 만리장성은 길이가 무려 6000km나 되는 어마어마한 성이다. 너무 길어 한눈에 그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정도다.

대개의 관광객은 베이징 북방 80km 거리에 있는 파타링(八達嶺)에 올라 그 일대를 둘러보는 것에 만족한다. 이곳은 1987년 ‘베이징 16경(景)’의 하나로 선정된 데 이어 1992년에는 만리장성의 백미로 지정됐을 만큼 명소다. 교통이 편리하고 풍광도 뛰어나다.

베이징 수비의 마지막 관문.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천해의 요새고 실제 역대 병법가들이 수없이 두드렸지만 열린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곳에서 만리장성은 남과 북으로 나뉜다. 북성은 잘 지어졌고 경관이 아름답다. 성벽은 폭이 넓어 말 4필이 함께 달릴 수 있을 정도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면 총안(銃眼)이 있는 여장(女墻·성 위에 낮게 쌓은 담)과 돈대(망루), 봉화대를 볼 수 있다. 어떻게 이 높은 곳에 이토록 높고 튼튼한 성벽을 끝도 없이 축조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해발 888m 지점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직접 ‘장성에 오르지 않은 이는 진짜 사나이가 아니다’고 쓴 만리장성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이 비석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어떤 이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까지 걸어서 오르는 일은 쉽지 않다. 나이든 사람이나 아이들, 그리고 시간에 쫓기는 여행객들은 케이블카로 대신한다. 케이블카로는 정상까지 10분이면 족하다. 하지만 장성의 이모저모를 보고 싶다면 힘들더라도 제 발로 걸을 것을 권한다.

이곳에선 바다링 주위의 산세와 그 산세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장성의 위용이 발 아래 펼쳐진다. 장성은 서쪽으로 달리다 타클라마칸 사막 속의 자위관까지 이어진다. 장성 축조의 목표는 단 하나, 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다. 

만리장성의 역사는 중원을 통일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 때부터 시작된다. 그가 제국의 경계를 확고히 하고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차단하겠다는 목적에서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 춘추 6국(國)이 제각기 쌓은 성벽을 하나로 연결해 만리장성이란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성은 명(明)왕조가 크게 손보고 증축한 것이다.

명나라야말로 북방 몽골족과 여진족을 상대로 생존을 건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생존을 향한 욕망보다 더 강한 에너지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장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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