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거 저런거/이것저것

잉카문명 마추피추 Machu Picchu

by 구석구석 2022. 9. 10.
728x90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페루·볼리비아)을 지배한 고대제국의 명칭. 동시에 그 사회적 중핵(中核)으로 되었던 부족 및 그 지배계급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잉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잉카족은 케추아족이라고도 불리며, 남방의 아이마라족이나 북방의 창카족 등과 함께 페루 인디오의 한 집단이었다.

【잉카제국의 역사】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에는 BC 2000년경에 초기 신전(神殿)이 출현하였고, 이후 차빈·모티카·나스카·티아우아나코 문화 등이 잇따라 번영하였다. 1200년경부터 지방적인 국가 형성기로 들어가, 각지에 왕국·수장국(首長國) 등 정치조직이 성립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강대하였던 것은 페루 북해안 지방의 찬찬(Chan Chan)이라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치무(Chimu) 왕국이었으나, 잉카제국은 그들 여러 왕국 중에서 가장 늦게 나타나 치무를 비롯하여 각지의 지방적 정치조직을 정복 통합하고 전(全)안데스 지대에 걸치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잉카제국을 건설한 잉카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6세기에 잉카를 정복한 에스파냐인이 채집하였던 전설에 의하면 망코 카파크라는 전설적 인물이 13세기경, 자기의 부족을 이끌고 남페루 고원(高原)의 쿠스코에 정주하여, 그곳에 태양의 신전을 축조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이 망코는 태양의 아들로서 숭앙되고, 잉카제국 초대(初代)의 황제라고 불렸으나, 그와 그에 잇따르는 7명의 황제들에 대한 전승은, 확실한 역사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13∼14세기에 잉카족이,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정된 소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여 주변의 다른 부족, 특히 남쪽 티티카카호(湖) 북안의 아이마라족과 대치하였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잉카제국이 쿠스코에서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에 제9대 파차쿠티황제 시대부터이다. 그 이후의 역사는 연대기적으로 구전(口傳)에 의하여 전해진 자료가 있기 때문에, 구체적 사실이 알려져 있다.

발전의 계기가 된 것은 잉카족과 창카족의 싸움이다. 창카족은 쿠스코 남서쪽의 안다와이러스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페루 중부고원의 아야쿠초 지방까지 정치적으로 지배하였던 대부족이었으나, 쿠스코의 잉카족 정복을 기도(企圖)하여 대군을 보내왔다. 그것을 당시 왕자였던 파차쿠티가 영격(迎擊)하여 쳐부수었기 때문에, 쿠스코가 갑자기 중부 페루고원까지의 넓은 영역의 정치집단을 그 지배하에 넣을 수 있었다.

영토의 확대와 더불어 파차쿠티는 태양신전을 개축시키고 그곳에서 일하는 처녀의 제도와 각종 의례를 정하여, 정치적 통합을 위한 정신적 중심이 되기 위하여 쿠스코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동시에 정복지에 관리를 보내서 그 정치조직을 쿠스코의 산하에 놓는 일도 적극 추진하였다. 이 대개혁이 단행된 것은 1430년대 말에서 40년대에 걸쳐서였다.

그 후로도 파차쿠티의 정복사업은 계속되었다. 남쪽 티티카카 지방의 아이마라족이 정복되고, 또 페루 고원의 북부까지 잉카의 군대가 쳐들어갔다. 또한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지방의 평정도 실행되었다. 다음 대(代)인 투파크 잉카가 성장하자 그의 지휘하에 페루 북해안 지방의 공략이 시작되었고, 치무왕국도 잉카의 군문(軍門)에 항복하였다. 군사정복의 확대에 따라 각지방의 도로가 정비되고 고원의 깊은 골짜기에도 다리가 놓여져 유명한 잉카 왕도(王道)의 도로망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파차쿠티는 74년경에 죽었다고 알려진다.

다음의 투파크 잉카 유팡퀴 황제의 시대에도 정복사업은 속행되어, 에콰도르 지방과 칠레·아르헨티나의 북부도 잉카의 영토가 되었다. 질서가 확립된 행정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각종 공공건축도, 태양신전과 성채를 중심으로 각지에 세워졌다. 잉카제국의 근본적인 형태는 이 투파크 잉카 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이 잉카가 죽은 것은 93년경이었다.

다음 대의 와이나 카파크 시대에는 영토 확대는 없었으나 국내의 여러 제도를 계속해서 강화하는 한편 변경의 에콰도르 지방 개척에 힘을 쏟았다. 이 때문에 황제가 수도 쿠스코를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쿠스코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자층과 에콰도르의 키토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층과의 사이에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즉, 1525년 와이나 카파크가 죽자, 아들 중의 하나인 우아스카르는 쿠스코에, 또 다른 아들인 아타우알파는 키토에 본거(本據)를 두고 서로 대립하였다. 32년 양자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어, 아타우알파가 쿠스코 세력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페루에 침입하여, 북고지(北高地)의 도시 카하마르카(Cajamarca)에서 아타우알파가 체포됨으로써 잉카제국은 붕괴하였다.

 그 뒤 에스파냐인은 쿠스코를 점령하여 식민지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망코라는 잉카인이 반란을 일으켜, 쿠스코 북서쪽 계곡을 거점으로, 그 아들들이 71년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는 사실(史實)도 있다.

 【잉카문명】  

잉카문명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치·사회의 기구편성에 나타낸 독특한 기술이다. 사회적으로는 신성한 절대군주 잉카를 받들고, 친족인 지배층과 일반평민으로 구성되는 계층사회를 형성하여 중앙집권적 전제정치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평민을 위한 사회보장이 완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잉카의 정체(政體)를 ‘신권적 사회주의’라든가 ‘사회주의 제국(帝國)’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잉카의 정치·사회조직〉

 16세기의 에스파냐인 기록자에 의하면, 잉카제국에 있어서 모든 토지는 황제에 귀속하며, 모든 지방의 촌락들에 있어서 경지(耕地)는 잉카·태양신·국민을 위하여 3등분되었다고 한다. 취락의 인구는 10, 100, 1,000마다 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각각 충카·파차카·와랑카라고 불렀다.

그들의 장(長)에는 그 지방의 잉카 이전부터 있던 수장(首長)이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위에 1만 명의 집단 우뉴나 그것을 3,4개 묶어 놓은 와망이 존재하여, 잉카제국 전토는 와망의 집합체인 4개의 수유로 구분되었다.

수유나 와망의 장은 원칙적으로 잉카족 중에서 임명되었다. 각 지방의 25∼50세까지의 남자는 납세의 의무를 부담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공공사업에의 노력제공의 형태를 취하였다. 즉, 태양신과 잉카의 경작지에서의 경작이나 도로·다리의 건설 등에 동원되었다. 그 때문에 와랑카와 파차카의 수장은 연령별로 인구를 구분하고, 매년 잉카의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는 의무를 졌다.

일반 평민은 잉카로부터 부여받은 토지의 일정기준에 의한 분배를 받으며, 그것을 경작하여 충분한 생활 물자를 얻도록 되어 있었다. 과부·노인·고아 등에 대해서는 잉카와 태양신의 전답에서 얻은 수확물 재고의 일부에서 식량을 지급받았다.

또 기근 때에도 국가의 저장창고에서 물자가 방출되었다. 잉카제국의 모든 인간은 이와 같은 질서정연한 피라미드형 지배체계 속에 배치되었으나, 마마코나·아클라쿠나·야나코나라는 3종류의 집단은 지방수장의 감독하에서 벗어나 직접 쿠스코에서 파견되는 잉카 관리의 지시를 받았다.

마마코나란 각 지방의 미혼여성 중에서 선출되어, 태양신전의 제례나 잉카 귀족들을 위한 의복·장식품·주류 등을 제조하기 위하여, 특별한 건물 안에 거주하게 되어 있는 처녀들을 말한다. 이 여성들은 결혼적령기가 되면 집단적으로 동네 남자들과 맞선을 보고 부부의 인연을 맺었는데, 특히 그 중의 일부 여자는 아클라 쿠나(선택받은 여자)로서 그대로 남아 마마코나의 감독관이 되었다.

야나코나란 잉카 귀족에게 시종하던 하인·사용인 등을 말한다. 이처럼 체계적인 정치·사회조직이 안데스 세계에서 돌연히 잉카인에 의해 실현되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사실로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잉카의 체계는, 잉카 이전의 기존의 지방적 정치·사회조직에 많이 의거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결국 잉카는 안데스의 광대한 지방을 ‘변혁(變革)’한 것이 아니라, 기존적인 제도와 조직체계를 이용하면서 통합하였던 것이다.

<잉카문명 유적지, 찬찬 사원의 벽>

태평양에서 분리된 안데스 사막의 좁은 줄 간격을 따라 거대한 왕국은 모래로 성을 쌓았다. 페루의 북쪽 해안을 따라 600마일 쫙 펼쳐진 제국의 수도인 '찬찬'은 여전히 형태가 있다. 9개의 조합된 왕국의 부서진 벽들은 여전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치무 왕국은 250년동안 약 1470년동안 떨어져서 번영했다. 

콜롬버스가 도착하기 전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도시였던 찬찬은 9평방마일로 퍼져 있었고 50000명의 거주지를 보호했다.그 왕은 각각 그의 궁전과 사후의 부덤을 지키기 위해 복잡하게 지었다. 건축가들은 마린신전의 복잡한 띠 장식을 황갈색의 벽 표면으로 바꿨다. 왕은 음악가와 무희, 재담꾼에 둘러 쌓여 중세 유럽의 최고만큼 좋은 옷을 입고 잘 살았다.  왕이 죽었을 때 왕들은 수 백명의 희생된 여성들과 금과 은의 거대한 저장고와 함께 묻혀졌다. 잉카를 정복해서 실물대 조각상에 부를 녹이었고 고쳐 만들었다.

 고고학자들은 '찬찬'을 보호하기 위해 서둘러야 하고 국왕의 인격을 세밀히 표현한 초상화를 완성해야 한다. 약탈에도 불구하고 단서인 보석과 직물, 도기, 금장식, 구리, 그리로 상감된 껍질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가공품들이 풍부하지만 고고학자 빅토르 W.하겐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광채와 찬찬의 생각만 오직 가졌다.

 


안데스와 아마존을 헤맨 탐험가 가운데에는 비록 파이치치는 아닐지라도 유적을 발견한 사람도 몇 있다. 오늘날 남아메리카의 고대 유적지 가운데 관광객을 제일 많이 끌어모으는 마추픽추(Machu Picchu)를 발견한 하이럼 빙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잉카인들은 글자·쇠·화약·바퀴를 몰랐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강한 군대를 유지했다. 제국은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산맥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두 갈래 길(잉카 로드)을 2만㎞나 만들어 광대한 영토를 통제했다. 황제의 명령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두루 미쳐 새 한 마리도 황제의 명령 없이는 날지 않는다고 했다.

잉카인이 돌을 다룬 기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들은 20톤이나 나가는 돌을 바위산에서 잘라내 수십 ㎞ 떨어진 산 위로 날라다가 신전과 집을 지었는데,면돗날도 들이밀 틈 없이 돌을 잘 쌓았다(그들이 사용한 가장 큰 돌은 높이 8.53m 무게 361톤이다). 평야가 적었지만 산비탈을 계단처럼 깎아 옥수수를 경작함으로써 그들은 넉넉히 먹고 살았고,구리를 쇠만큼 단단하게 제련해 썼는데 그 방법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이렇듯 강성했던 잉카 제국은 겨우 100여년 만에 스페인 군대에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의 문명과 패망과 저항에 얽힌 수많은 사연을 집약해 보여 주는 최대 유적이 바로 안데스 산맥 밀림 속의 해발 2,400m 바위산 꼭대기에 남아 있는 옛 도시 마추픽추이다.

‘…우리는 비탈에 납작 붙어서 아래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땅에 손가락을 찔러 꽂은 뒤 미끄러운 풀을 밀어 헤치면서 몸을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아득한 낭떠러지 저 아래에서는 우리가 밧줄을 잡고 건너온 우루밤바강의 성난 급류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인디언 안내인이 이 근처에는 사냥감을 뒤에서 공격하는 페루드란스 독사가 많다고 신음하듯이 일러 주었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가르치던 서른다섯살 난 하이럼 빙엄이 마추픽추를 발견한 1911년 7월24일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탐험대는 빙엄과 그의 대학 동료 두 사람,통역과 길안내를 맡은 페루군 하사관 1명,거기에 노새 몇 마리.

그들은 잉카 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빌카밤바를 찾으려고 들끓는 모기와 지독한 더위와 위험한 급류를 무릅쓰고 우루밤바강을 따라 폐허들을 모조리 조사하고 있었다. 어느날 일행이 빌카밤바 계곡에서 야영하고 있을 때 한 인디언이 나타나 그들의 바로 앞에 깎아지른 듯이 솟은 바위산 등성이에 거대한 폐허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꽤 높이 올라갔는데도 폐허 같은 것은 없었다. 모두가 몹시 지쳤다. 그때 인디언 몇 사람이 샘물을 담은 호리병을 가지고 다가왔다. 물을 정신없이 들이키고 가슴 가득히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자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인디언들은 조금 더 가서 산모퉁이를 돌면 폐허가 있다면서 한 소년을 딸려 주었다….’

빙엄 일행이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과연 잉카 시대의 계단식 경작지가 보이고 돌 건축물이 나타났다. 거대한 계단 같은 것을 몇 단 겹쳐 쌓은 큰 건축물은 나아갈수록 더 많아졌다. 모두 길이 30m가 넘는 돌벽이 3m 높이로 쌓여 있었다. 한 건축물의 끝까지 걸어가니 맞은편 나무가 이끼 낀 돌벽에 솟아 있었다.

‘엄청나게 큰 돌들이 서로 꽉 맞물려 있었다. 그 벽은 가옥의 일부였다. 벽은 옆에도,그 맞은편에도 있었다. 바위 선반 아래에 동굴이 있었다. 벽에 벽감이 나란히 설치된 왕족의 무덤이었다. 그 위쪽에는 쿠스코에 있는 태양의 신전처럼 바깥 벽이 경사진 반원형 건물이 있었다. 돌계단은 광장으로 이어졌고,거기에는 흰 화강암으로 지은 대사원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맞배지붕 건물이 제사장의 주거주지였으리라. 비탈 아래에는 건물들이 미로처럼 배열되어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안데스산 중에 해발 4,570m 높이로 우뚝 솟은 바위산. 그 중턱에 만여명이 살 수 있는 비밀 도시가 있었다니! 바퀴를 모르던 잉카인들은 흙과 돌을 사람이 지고 날라다가 이 도시를 세웠다.

마추피추전망대

길이가 수백m나 되는 축대를 100개나 쌓고,거기에 흰 화강암을 빈틈없이 이어 쌓은 벽과 집들. 샘에서 수돗물을 끌고,계단식 밭을 일구어 외부의 도움없이 살 수 있도록 신전과 묘지까지도 갖춘 완벽한 도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바깥 세상과 소식을 끊은 채 수십 년 동안 살다가 늙어 죽은 듯했다.

어떤 군대라도 막아낼 수 있도록 3면이 낭떠러지인 이 요새는,그 뒤로 400년 동안이나 사람 그림자가 얼씬하지 못한 채 두꺼운 이끼에 덮여 있었다. 빙엄은 빌카밤바를 찾았다고 확신했다. 눈앞의 옛 도시가 스페인군에 쫓긴 잉카의 황제의 피난처이자 저항의 근거지로 삼은 최후의 수도라고.

산 위에서는 계곡이 다 내려다보이지만 계곡에서는 어디에서 올려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요새. 바위산 꼭대기에 있으면서도 천여 명이 상주한 자급자족 도시. 빌카밤바 계곡 일대에 흩어져 있는 만여 명을 관장한 거점 도시. 신전 중심의 시설로 가득한 신성한 도시. 마추픽추는 누가 세웠고 언제 버려졌을까.

잉카의 초대 황제 비라코차 잉카가 안데스산맥 일대의 여러 부족을 합병해 제국을 세운 때는 1438년.계속 영토를 넓히고 도로를 닦고 제도를 정비해 오던 잉카제국은 제12대 후아이나 카팍 황제가 죽자 내분에 휩싸였다.적자인 후아스카르와 서자인 아타왈파의 싸움에서 아타왈파가 이겨 13대 황제가 되었는데,내전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페인군에게 무너졌다.

스페인군의 꼭두각시로 황제에 오른 망코 잉카는 기회를 엿보다가 수십만 명을 동원해 봉기했으나 실패했다.그는 우루밤바강 기슭의 빌카밤바 요새로 도망가 스페인군에 맞섰지만 그마저도 함락되었다. 끈질기게 저항하던 망코 잉카가 살해되고 1571년 마지막 잉카 투팍 아마루가 스페인군에 처형되자 40여년에 걸친 잉카인들의 저항은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340년이 지난 1911년 하이럼 빙엄이 마추픽추를 세상에 알리자 사람들은 마추픽추야말로 망코 잉카가 머물렀던 빌카밤바라고 믿었다.그러나 마추픽추는 잉카인이 처음 세운 도시는 아니었다.1912년 빙엄의 발굴보고서에도 잉카시대 이전에 만든 옹기와 접시가 많다고 나와 있지만,1988년 카본 테스트를 해보니 마추픽추에는 서기 800년에 정착해 산 사람들이 있었다.그래서 ‘잉카 이전에 세워져 버려졌던 마추픽추를,쫓기던 망코 잉카가 다시 건설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그 밖에도 마추픽추는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을 몇 가지 지니고 있다.


파이치치의 전설

파이치치의 전설에는,잔인무도한 스페인 군대에 의해 황제가 처형되고 나라를 잃은 잉카 민족의 슬픔이 서려 있다.

태양을 으뜸신으로 섬긴 잉카족.‘잉카’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황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잉카제국은 안데스 지방에 있었던 여러 국가 가운데 제일 늦게 세워진 왕국이었다.그런데 13세기에 망코 카파크라는 왕이 쿠스코에 도읍을 정한 뒤부터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망코는 태양신전을 쌓았고,태양의 아들로 숭앙되었다.

15세기 중반 제9대 황제 파차쿠티 때에 잉카는 둘레의 여러 종족을 정복해 오늘날의 페루·콜롬비아·칠레를 아우르는 큰 나라를 세웠다.전설에 따르면 황제는 아마존 강이 시작되는 밀림 깊숙한 곳까지 군대를 이끌고 갔다.원정군은 그곳에서 금광을 찾았는데 흙을 한움큼 쥐면 금가루가 잔뜩 섞여 있었다고 한다.이때부터 잉카는 황금시대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뒷날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군인 180명을 이끌고 쿠스코를 점령했을 때 태양의 신전 돌벽에는 황금덩어리가 여기저기 박혀 있었고 해·달·별의 제단에는 황금이 두껍게 입혀 있었다.또 황금으로 만든 황제 상(像)이 18개나 되었다고 한다. 잉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무너졌다.아타왈파 황제의 근위대 5,000명이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짐승(말)과 천둥소리를 내는 막대기(총)에 놀라 180명밖에 안되는 스페인 군인과 말 27마리에게 전멸한 것이다.

1531년 11월16일,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스페인 왕의 사절로 왔다고 속이자 아타왈파 황제는 방심하고 그를 만났다.황제의 근위병들은 무기를 들지 않은 맨손이었다.스페인 종군 신부가 성경을 건네며 “여기에 손을 얹고 하나님과 스페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말하자 황제는 성경을 내동댕이쳤다.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페인군의 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창기병이 말을 몰고 짓쳐 나왔다.

사로잡힌 아타왈파 황제는 자기가 갇힌 방을 가득 채울 만큼 황금을 줄 테니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그 방은 높이가 7m,너비가 6m나 되었다.피사로가 허락하자 두 달 만에 황금 200상자,은 20상자,보석 60상자가 모였다.피사로는 그것들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그가 황제를 불태워 죽이려고 하자 황제는 기독교도가 되겠다고 애원해 겨우 화형을 면하고 목 졸려 죽었다.슬픔에 젖은 잉카인들은 분노에 떨며 뿔뿔이 흩어졌다.그들 대부분은 밀림으로 숨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황금을 숨긴 파이치치로 갔다.

 1540년 피사로는 파이치치와 대서양쪽으로 나가는 길을 찾으려고 탐험대를 만들었다. 그는 자기 동생 곤잘로 피사로를 대장으로 삼아 군인 200명과 원주민 4,000명을 보냈다. 안데스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나아간 탐험대는 밀림을 헤매다가 여덟 달 만에 물줄기 하나를 찾았다. 아마존 상류 나포 강이었다. 사람과 말이 모두 지치자 피사로는 오레야나로 하여금 밀림을 정찰하고 먹을 것을 구해 오라고 명령했다. 오레야나는 병사 70여 명을 이끌고 강을 따라 내려갔다. 자꾸 가니 큰 강이 나타났다.

지친 몸으로 노를 젓던 오레야나 일행은 도중에 여자들만으로 된 인디오들을 만났다. 그 여자들은 밀림 속을 누비며 활을 쏘아댔다.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오레야나는 그 여자들이야말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구의 끝에 사는 용맹스러운 아마존’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이 강은 아마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레야나는 끝내 대서양까지 나아가 카리브 해에 있는 스페인 땅으로 돌아갔으나 열여덟 달이나 그를 기다리던 피사로는 지치고 말았다. 그 사이 원주민들은 뿔뿔이 달아났고,스페인 군인도 반 넘게 죽어 탐험대는 빈손으로 쿠스코에 돌아갔다. 그 뒤로 500년이 흐르는 동안 파이치치를 찾아 안데스산맥 동쪽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은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파이치치를 찾는 탐험대는 먼저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쯤 날아 잉카의 도읍지였던 쿠스코로 가야 한다. 산소가 적어 숨이 찬 해발 3,400m 고지의 쿠스코에서 다시 북쪽으로 4,500m 산을 넘으면 판차코차 지방으로 들어가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거대한 아마존 밀림이 방문객을 맞는다.

아홉 나라를 거치며 장장 6,400㎞를 도도히 흘러내려 대서양에 1초마다 17만5,000톤씩 민물을 쏟아붓는 아마존강. 이 강 200여 갈래가 아마존 분지 700만㎢를 거미줄같이 꿰고,거기에 지구 전체 산소의 10%를 대는 열대 밀림이 끝없이 펼쳐진다.

강물에는 아무리 큰 동물도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물고기떼 피라냐가 살며,두꺼운 담요도 뚫는 큰 모기떼는 사람이 잠깐 걸음을 멈추면 사정없이 달려들어 피를 빤다. 독사와 독벌레,몇 달씩 퍼붓는 장대비와 해가 보이지 않는 수림.

어떤 사람도 이곳에서 열흘 넘게 버티지는 못한다. 어떤 탐험대도 이 밀림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20세기에 잉카의 유적들이 여러 군데 발굴되었지만 파이치치를 찾는 일은 아직 요원하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