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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이것저것

크레타문명

by 구석구석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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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지중해 에게해에는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하여 40여개 섬으로 이루어진 크레타 왕국이 있었다. 올림포스의 주신(主神) 제우스가 세계를 방랑하다가 페니키아 왕의 딸인 에우로페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제우스는 흰소로 변해 그녀를 등에 태우고 자기가 태어난 크레타 섬으로 데려갔다(그때 에우로페가 소를 타고 다닌 곳을 그녀의 이름 Europe에서 따서 ‘유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세 아들이 태어났는데,첫째인 미노스가 크레타의 왕이 되었다.

미노스 왕은 아들 안드레게오스를 아테네에서 열리는 운동 경기에 내보냈다. 안드레게오스가 그리스 사람들을 물리치고 월계관을 독차지하자 화가 난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가 그를 죽였다. 미노스 왕은 함대를 보내 아테네를 굴복시키고,9년마다 일곱 청년과 일곱 처녀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미노스 왕은 이 젊은이들을 라비린토스 궁전에 보내,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로 하여금 잡아먹게 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산 미노스 왕비 파시하이는 머리는 소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을 낳자,미노스 왕은 회랑과 방을 복잡하게 배치해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짓고 괴물을 가두어 두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청년과 처녀 들을 보내야 하는 해가 돌아오자,아테네는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그러자 왕자 테세우스가 미궁의 괴물을 죽이고 젊은이들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검은 돛을 단 배를 타고 아테네를 떠나면서,괴물을 죽이고 살아 돌아오게 되면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어 달기로 왕과 약속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은 대개 잘 생긴 청년이고 여자에게 약하다. 크레타 왕국의 아름다운 공주 아리아드네를 본 테세우스는 곧 사랑에 빠졌다. 공주도 왕자에게 한눈에 반했다. 공주는 미궁을 지은 다이달로스를 찾아가,미로(迷路)를 헤치고 나올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다. 공주는 그에게 들은 대로 몰래 칼과 털실뭉치를 테세우스에게 건넸다.

공주가 털실의 한쪽 끝을 잡은 채 미궁 입구에서 기다리고,왕자는 실을 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괴물과 싸워서 이겼다. 그는 털실을 되감으면서 미궁을 빠져 나오자 공주를 데리고 아테네로 달아났다. 그러나 흥분한 나머지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는 것을 깜박 잊었다. 아테네 왕은 수평선에 모습을 드러낸 배가 검은 돛을 단 것을 보자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테세우스가 자기 딸을 데리고 도망친 사실을 안 미노스 왕은 대로했다. 미궁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알 만한 사람은 다이달로스밖에 없었다. 왕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를 잡아다가 미궁에 가두었다. 그러자 다이달로스는 새의 날개를 모아 초를 녹여 붙여서 날개를 만들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것을 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는데,아들은 그만 너무 높이 날아 태양 근처까지 갔다가 날개를 붙인 초가 녹는 바람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 다이달로스는 무사히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 섬에 닿았다. 그는 왕의 마음에 들어 그곳에 숨어 살게 되었다. 

다이달로스를 찾을 수 없자 미노스 왕은 한 가지 꾀를 내었다. 그는 겹겹이 잇댄 나선형의 소라껍데기에 실을 꿰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고 선전했다. 다이달로스가 이름을 숨기고 그 소라껍데기를 가져오게 했다. 그는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는 개미를 잡아다가 다리에 실을 묶어 소라껍데기 속으로 밀어넣었다. 개미는 빙빙 돌아 다른 구멍으로 기어나왔다. 문제는 풀었지만,다이달로스는 숨어 있던 곳을 들켰다. 미노스 왕이 직접 다이달로스를 잡으러 오자,시칠리아 왕은 다이달로스로 하여금 특별한 목욕통을 만들게 한 뒤 미노스 왕을 거기에 들어가도록 유인해 죽였다. 

‘미궁’(迷宮)으로 널리 알려진 미노스 왕의 라비린토스 궁전에 얽힌 이 비극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크레타 왕국이나 미궁이 실제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단지 미궁이라는 것이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에 세월이 흐르면서 그럴듯하게 극적인 요소가 덧붙은 전설일 뿐이다.

 베르홀트 탐험대의 실종

1873년 10월 터키의 항구도시 차나칼레에 있는 한 고물상. 독일의 고고학자이며 탐험가인 베르홀트 박사가 높이 70센티쯤 되는 항아리 앞에 붙박인 듯이 서 있었다. 뚫어져라 항아리를 쳐다보는 그의 눈길은 감동의 경지를 넘어서 자못 경건했다. 그는 항아리를 사가지고 연구실로 돌아가자 곧 조수들을 불러 탐험대를 짰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조수들에게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여기 새겨진 소용돌이 무늬 두 줄을 보아라. 이것은 크레타 문명의 특징이다. 이 항아리는 왕궁의 길을 표시하려고 군데군데 놓아두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 항아리가 발견된 곳에 가면 미노스 왕의 미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궁 이야기는 절대 근거없는 전설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신념으로 가득차 있었다. 

한 달 뒤 베르홀트 박사를 비롯해 그 무렵 이름을 날리던 탐험가 그라브르크,고고학자 오르토리코 박사 등 아홉 사람을 태운 배가 터키를 떠났다. 미노스의 항아리를 주워다 고물상에 판 젊은이도 길 안내자로 타고 있었다. 에게 해로 나선 지 닷새가 지나자 크레타 섬이 나타났다. 젊은이가 외쳤다.

“박사님 바로 저 섬입니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제가 항아리를 주웠던 동굴이 있습니다.”

섬의 뒤쪽으로 돌아드니,과연 나무들 사이로 시커먼 동굴이 보였다. 탐험대가 동굴 안으로 20m쯤 들어가자 탁 트인 곳이 나타나고,거기에는 선반 모양으로 잘 다듬어진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분명히 사람이 만든 받침대이고,그 항아리는 왕의 거처로 가는 길을 일러 주는 표식이다. 이 돌받침대를 사람이 만들고,그 항아리가 여기에 놓여 있었다면,이곳이야말로 미궁임에 틀림없다.”

한참 살피고 난 오르토리코 박사가 자신있게 말했다. 탐험대는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몸을 옆으로 뉘어야만 빠져나갈 만큼 좁은 길이 여러 갈래 나타나는가 하면,시커먼 늪도 있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들어갈수록 산소는 적어지고,물 떨어지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이틀 동안 두 차례나 탐험했으나,짧은 굴인지 긴 굴인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탐험대는 병을 앓는 오르토리코 박사와 뱃사람 둘을 남겨 두고 3차 탐험에 나섰다. 여기에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탐험대가 굴 속으로 들어간 지 10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오르토리코 박사가 선원 두 사람을 동굴 안으로 들여보냈더니 4시간이 지나서 돌아온 그들은,동굴의 끝까지 갔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규모 수색대가 동굴 안을 네 번이나 이 잡듯이 뒤진 결과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동굴 길이는 겨우 600m였다.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고,동굴 안은 바위 벽으로 꽉 막혀 있어 사람이 빠져나갈 틈이 어디에도 없었다. 여덟 사람이 모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다.”

기껏 600m밖에 안 되는 동굴에서 여덟 사람이 감쪽같이 증발했다(?) 전설의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나타나서 그들을 잡아먹었을까? 아니면 미로를 헤매다가 미궁에 갇혔을까? 이 사건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1900년 마침내 크노소스 왕궁터가 발굴되었다. 그러나 이 왕궁과 베르홀트 탐험대가 사라진 동굴이 이어진 길은 지금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에번스의 발굴

 

트로이·미케네·티린스를 발굴해 전설을 역사로 바꾼 하인리히 슐리만은 그의 꿈을 이룰 네 번째 무대로 미궁과 미노타우로스 전설의 고향인 크레타를 점찍었다. 미노스왕의 궁전은 크레타섬 크노소스의 산기슭에 있을 것 같았다. 그곳은 도기 파편이 널려 있고,올리브 나무들로 뒤덮인 자갈밭이었다.

 

발굴 허가는 쉽게 얻었지만 땅주인들이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값을 터무니없이 높여 부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슐리만과 다른 땅주인 사이에 끼어들어 사기 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슐리만은 화가 나서 아테네로 돌아갔다. 그는 미노스 왕궁이 크노소스에 있다고 확신하고 다시 가려고 했지만 1890년 나폴리의 한 광장을 지나다가 쓰러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그는 백만장자였지만 옷차림이 아주 초라해 사람들이 그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아 죽었다).

 

크노소스를 발굴하는 행운은 아서 에번스에게 돌아갔다. 1851년 영국에서 태어난 에번스는 고고학에 관심이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선사시대 고고학에 조예가 깊은 지질학자였다. 고고학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모험가 기질이 있던 그는 1870년대 말기부터 ‘맨체스터 가디언’의 통신원이 되어 발칸 반도를 돌아다니면서 고대 유물을 수집하고,오스트리아의 통치에 저항하는 슬라브 민족의 투쟁을 도왔다.

 

1881년 오스트리아 당국에 체포되어 발칸에서 추방된 그는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팔리는 미케네 출토 골동품에 매료되었다. 주로 무늬가 새겨진 작은 인장과 보석이었는데,골동품 상인들은 그것이 크레타섬에서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인장과 보석에서 그는 ‘최소한 두 가지 문자 체계로 기록된 흔적’를 발견했다. 그는 선형문자 B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크레타의 문자 문명 유물을 좀더 많이 발견하기 위해 1884년 크레타로 갔다.

 

에번스는 슐리만이 발굴하려던 크노소스를 찾았다. 그 역시 그곳을 파헤치면 뭔가 엄청난 결과가 나오리라고 예감했다. 그는 2년여 동안 땅주인들을 설득해 1896년 그 땅을 전부 사들였다.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에서 ‘포도꽃 피는 풍요한 섬,바다에 떠있는 부유한 나라’라고 노래한 크레타. 그곳에서 제일 큰 도시 이라클리온 항구에서 남쪽으로 6㎞ 떨어진 올리브밭에서 1900년부터 시작된 발굴은 그로부터 30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첫 삽을 뜬 날 에번스는 건물과 유물을 발굴했다.둘째날에는 퇴색한 벽화들이 그려진 가옥을 찾아냈다.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얼마 후 그는 ‘크레타’라고 표기된 점토 서판 2,000개를 찾아냈다.그 뒤를 이어 벽화와 조각상들이 나왔다.그는 기쁨에 들떠 런던의 ‘타임스’ 신문에 전보를 쳐서 자기가 ‘미노아 문명’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그는 미노스 왕에게서 딴 ‘미노아(미노스의)’라는 말이 크레타섬에 있었던 문명을 나타내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아이디어에 흡족해 했다.

 

얼마가 더 흐르자 크노소스 유적지는 8,100㎡ 넘게 확장되었다.나중에는 24㎢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임이 드러났다.이를 두고 에번스는 다음과 같이 추리했다.그 성은 슐리만이 미케네와 티린스에서 발굴한 성들과 같은 시대의 것이며 서로 관계가 깊다.즉 에번스가 발견한 성이 훨씬 당당하고 장엄한 것으로 미뤄 크레타가 에게해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섬들의 중심지였고 미케네와 티린스에 있는 성들은 거기에 복종하는 지방도시였다.

 

왕궁은 아주 큰 네모꼴 안뜰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방이 수백 개 있었다. 벽은 돌로 되어 있었고 평평한 지붕을 둥근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다.층마다 방과 복도,넓은 홀이 어지러이 널려 있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다가 길을 잃는 일이 자주 생겼다.미궁에 대한 전설을 모르는 사람조차 미로(迷路)라는 말을 저절로 떠올릴 지경이었다.

 

크노소스 시민들은 부유함을 마음껏 누렸으며 오늘날의 눈으로 봐도 매우 세련된 문화를 향유하고 살았다.크레타는 지금도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많이 생산하지만 그 옛날에도 값비싼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항아리에 담아 에게해 일대와 멀리 이집트·시리아·키프로스에까지 수출했다.크레타는 에게해를 통틀어 가장 큰 섬으로 수도인 크노소스 항구는 온갖 배들이 모여드는 무역 중심지였다.기름과 포도주를 수출한 배들은 돌아오는 길에 사치품을 사왔다.주석과 구리는 이탈리아나 에게해의 다른 섬에서,금과 은은 소아시아에서,상아는 시리아에서 들여왔다.이집트의 자수정,아프가니스탄의 청금석,나일강 유역의 갑충석과 타조알 껍질,메소포타미아의 보석과 인장이 궁전의 보물창고에 수북이 쌓여있었다.크노소스 궁전은 영국의 버킹엄 궁만큼 컸다.그 굉장한 건물의 화장실은 수세식이었고 배수구와 호사스러운 목욕탕,환기 장치와 지하수 도랑과 하수도가 있었다. 

 

크레타 문명

 

크레타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살았는지,벽에 그려진 그림에는 사프란꽃을 그릇에 담으며 풀밭을 거니는 소년들과 백합꽃이 핀 들판을 한가로이 거니는 젊은이가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젊음과 건강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그것을 세련된 옷차림으로 표현했다. 남자들은 가슴을 드러내고,허리에 작은 천을 둘러 엉덩이를 가렸다. 그것을 작은 치마처럼 입거나,팬티처럼 가랑이 사이에 포개어 입고,때로는 술로 장식한 긴 치마를 입기도 했다. 가끔 넓은 허리띠를 찼으며,날씨가 추우면 털가죽 망토를 둘렀다. 

여자들의 화장과 옷차림 또한 세련과 사치의 극치였다. 그들은 입술과 볼은 물론 젖꼭지에까지 화장을 했다. 꽉 끼는 옷을 입어 몸의 곡선을 강조했고,앞가슴은 대담하게 파서 벌렸다. 긴 스커트 자락은 가볍게 퍼지게 했고,옷단에는 장식을 달았으며,색색 무늬가 있는 화려한 드레스도 입었다. 벽화에 나타난 한 무희는 투명한 속곳 위에다 노랑 바탕에 빨강 파랑 단을 댄 옷을 입었는데 길고 검은 머리가 어깨 위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에번스는 어느날 매우 특이한 그림을 하나 발견했다. 두 소녀가 날뛰는 황소의 앞뒤에서 황소를 어르고,한 소년이 황소의 등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한 그림이었다. 미노타우로스에게 제물로 바쳐진 그리스 젊은이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에번스는 그것 역시 크레타 사람들이 인생을 화려하게 즐긴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그림에 나타난 젊은 남녀의 모습에서는 포로나 노예라는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이것은 권투나 레슬링 같은 경기가 아닐까. 이 남녀 선수들은 크레타 사람 중에서 엘리트인 것 같다. 그들은 숙련과 담력을 요하는 아슬아슬한 기예를 보여주고 사람들의 환호에 흥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발굴해도 크노소스 궁전에서는 방어벽이나 요새가 나타나지 않았다. 옛 도시를 발굴하면서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 수수께끼는 에번스가 크레타 함대의 자취를 발견함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막강한 크레타의 해군함대는 에게해 출입구를 막아서서 지중해를 오가는 배들을 통제하거나,외적을 섬에까지 들이지 않고 먼 바다에서 물리친 것은 물론,바다를 오가며 수출입 무역에 종사했던 것이다. 에번스가 찾아낸 기름 창고에서 올리브 기름을 담았던 큰 병과 그릇들을 놓고 계산해 보니 약 8만6,000ℓ나 되는 엄청난 기름을 저장할 수 있었다. 크노소스 왕궁이 얼마나 부유하고 사치했는지 짐작케 하는 증거였다. 

에번스는 발굴 현장 옆에 집을 지어 살면서 25년이라는 세월을 크노소스 왕궁을 발굴하는 데 바쳤다. 그는 옛 유물을 한 조각도 놓치지 않으려고 몇 번씩 체로 걸렀다.

자기가 발견한 것들이 모두 같은 시대 유물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도자기와 그림 들은 전부 다른 양식이었고, 벽들도 저마다 다른 시대에 세워진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에번스는 크레타의 역사를 초기·중기·후기 미노스 시대로 나누고, 막강한 해군 함대를 거느리고 에게 해를 주름잡으면서 미궁을 건설한 미노스 왕이 살았던 시대를 크레타의 황금 시대라고 불렀다. 그것은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기원전 1600년 무렵의 수십 년 간이었다.

에번스는 크노소스 궁을 발굴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미노스 궁전의 경이로움 가운데 극히 일부분이라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는 비판받을 것을 무릅쓰고 궁전 건물 몇 채를 재건했다. 결과는 대체로 실패였다. 주랑(柱廊;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복도)에 늘어섰던 나무 기둥들은 콘크리트 기둥으로 대체되었고, 거기에 미노아의 장식과 같은 색이 칠해졌다. 옥좌가 있는 방은, 어떤 사람들이 보면 부정확하다고 하리만큼 세부적인 데까지 현대인의 손길이 미쳤다. 오늘날 사람들은 에번스가 발굴품이 보여준 이상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해 .콘크리트 크레타.를 창건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학문적 시야를 벗어나면, 에번스의 손길에 의해 크논소스 궁전은 전체적인 모습과 효과가 살아났다. 반 세기가 넘도록 재건된 벽들은 세계대전과 지진을 견디고, 해마다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선사 시대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오늘날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사용해 알아낸 바로는, 최초로 크레타 섬에 주민이 살았던 때는 기원전 6000 ~ 기원전 3500년이다. 미노아 문명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전 1500년까지 무려 2천 ~ 4천5백 년이나 유지된 크레타 왕국의 주민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호메로스는 크레타에 각기 다른 다섯 종족이 있었다고 했다. 헤로도투스는 미노스 왕이 그리스인이 아니라고 했다. 벽화나 유골을 보아도 크레타 주민은 그리스인과는 인종이 다르다. 아마도 이 섬의 토착인일 것이다. 에번스는, 크레타인이 원래 창조력이 뛰어난 데다가 항해 능력이 출중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우수한 문명을 받아들여 독특하고 수준 높은 문명을 이룩했다고 보았다. 

크레타 문명의 멸망

 

강대하고 화려했던 미노스 왕국이 왜 땅 속에 묻혀 버렸을까? 누가 그들을 정복해 그처럼 철저히 무너뜨렸을까? 에번스는 이 궁전이 폼페이처럼 화산폭발 같은 천재지변으로 어느날 갑자기 무너졌다고 추측했다. 그는 옥좌가 있는 방을 발굴하면서,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듯한 시신을 발견했다. 방에는 기름 그릇이 거꾸로 엎어져 있었다. 아마도 왕이 제사를 지내려고 그 방에 왔다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최후를 맞이한 것 같았다.

 1926년 6월26일 오전 9시45분. 에번스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몸소 겪었다. 책을 읽고 있는데 느닷없이 땅과 벽이 크게 흔들렸다. 지진이었다. 그는 지진이 멈추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가 발굴하는 왕궁은 쇠기둥과 버팀목을 많이 넣어 괜찮았지만,근처 마을들은 모두 폐허가 돼 있었다.

 에번스는 거대한 미노스 왕궁을 무너뜨린 것은 밖에서 온 침략자가 아니라 바로 지진이라고 생각했다.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는데,1939년 그리스의 한 젊은 고고학자 스피리돈 마리나토스가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그는 크레타 문명을 파괴한 것이 크레타 섬에서 서북쪽으로 120㎞ 떨어져 있는 티라 섬(산토린 섬)의 화산폭발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마리나토스는 1883년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화산이 폭발할 때 3만6천명이 죽고,그 여파로 생긴 해일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던 일을 상기시켰다. 크라카타우의 4배가 넘는 규모인 산토린 화산의 폭발이야말로 160㎞밖에 떨어지지 않은 크레타 섬과 에게 해 일대에 어마어마하게 큰 피해를 주지 않았겠는가,하고 물었다. 미국 지질학자들이 산토린 화산의 돌들을 조사해 보니,그 화산은 크레타 문명이 멸망할 무렵인 기원전 1500년께 폭발했고 50년 뒤에 더 크게 폭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리나토스는 1967년 티라 섬을 발굴해 크레타 왕국과 같은 시대에 번성했던 도시를 용암과 화산재 속에서 찾아냈다. 3만명이 살았던 이 도시에서 궁전과 벽화,생활용품이 많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미노아 문명은 산토린 섬 화산폭발로 멸망했고,그뒤 이민족에게 정복되었으리라고 추정되고 있다. 

문명은 밝혀졌지만,문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 50년 동안 수많은 언어학자가 크레타에서 쓰인 선문자(線文字)B에 달라붙었으나 아무도 이를 해독하지 못했다. 1953년 마이클 벤트리스가 크레타어를 해독해 고대 그리스어의 방언이라고 주장했지만,아직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을 뿐이다.


수수께끼의 미해독 문자가 새겨진 크레타 원반

지중해 동반부에 있는 크레타 섬은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으로 유명하며 그리스 문명의 뿌리라 생각되는 미노아 문명이 꽃피었던 곳입니다. 크레타 발굴사에서 가장 중요한 크노소스 왕궁은 에반스(Arthur Evans)가 이끄는 영국 발굴팀의 노력에 의해 드러나지만, 섬 중앙부에 번영했던 또다른 중요한 도시 파이스토스(Phaistos)는 이탈리아 발굴팀이 담당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1908년, 수수께끼의 유물이 하나 출토됩니다. 이른바 파이스토스 원반(Phaistos Disc)라 불리는 석판인데, 제작 연대는 대략 BC 1700년경으로 추정되고, 수수께끼의 문자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후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크레타 문명이 남긴 문자는 선형문자 A, B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1952년 천재 언어학자 마이클 벤트리스의 노력에 의해 선형문자 B가 해독되어 그리스어 방언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선형문자 A는 다른 어족에 속한 것으로 추정되기만 할 뿐, 아직까지 해독이 되지 않은 상태. 그런데 이 파이스토스 디스크는 형태상 선형문자 B 계열로 분류할 수 있으나, 해독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신동아 1998년 5월호에 실린 글에 의하면 1988년 피셔(S. R. Fischer)가 해독하여, 이 문자가 음절문자이고 미노스 그리스어의 방언임을 밝혀냈다고 하는데... 그 뒤의 다른 언론 보도에서 이 사실이 확인된 바 없어,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파이스토스 원반, 현재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소장

크레테문자 '파이스도스 원반'  컴퓨터로도 해독불능

인류는 아주 먼 옛날부터 문자를 사용했다. 파키스탄의 하라파와 이란의 사그로즈에서 숫자와 동물을 상징화한 그림문자들이 발견됐다. 문자냐, 단순한 장식의 일부냐는 논란은 있지만, 이외에도 해독 불가능한 상징 문자들은 더 있다. 

대표적인 것이 크레테 상형문자다. 기원전 2000년경 미노아 문명이 꽃핀 지역에서 이 문자가 발전했다. 크레테 상형문자가 쓰인 가장 오래된 자료는 유명한 파이스도스 원반이다. 이 원반은 일종의 도자기로 양면에 나선형의 글씨가 쓰여 있다. 크레테 섬의 남쪽 파이스도스에 있는 고궁 보관소에서 발견됐는데 선으로 61구역을 구분했으며 그 안에 글을 썼다.

 19세기 말 원반이 발견된 후 여러 사람이 해독을 시도했다. 최신 컴퓨터까지 동원했지만 아직 뜻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자 숱한 가설이 생겨났다. 미노아 문자와 마야 문자를 비교 연구한 미국의 고든 교수는 이 문자가 아즈텍 상형문자와 똑같아 보인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미 청동기 시대에 지중해인과 아메리카 인디언간에 문화 교류가 있었다는 말인가?

비슷한 증거는 또 있다.
거석상으로 유명한 남태평양 이스터섬에 남아있는 롤롱 문자는 나무판에 인간이나 새, 생선 등과 기하학 모양을 새겨넣은 것이다. 약 790자의 상형문자가 확인됐는데 이 가운데 160자가 기원전 2500년에 지구 반대쪽에서 융성한 하라파 유적의 문자와 너무나 비슷하다. 또 1970년 미국에서 발견된 3개의 돌인 '미시간 플레이트'에서 확인된 문자는 기원전 1200년 경의 바이킹의 룬 문자와 아주 흡사하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서의 이야기처럼 혹시 태고적 지구에서는 하나의 말과 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일본 가쿠엔사의 월간 'MU', 번역 및 정리=최호(칼럼니스트)

 

L-코트렐의 7대불가사의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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