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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이것저것

L-코트렐의 7대불가사의

by 구석구석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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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델포이의 아폴로신전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를 지구의 중심이라 생각했고 그 중에서도 델포이(델피)를 지구의 배꼽이라 하며 신성시했다. 그리스의 유일한 고고학 유적지라 할 수 있는 델포이는 신화에 등장하는 신탁의 장소이고 아폴로 신에게 소속된 그리스 최대의 성지로 통한다. 이곳의 델피 박물관에는 이 곳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델포이 유적의 입구에서 파르나스 산의 구불구불한 참배의 길을 올라가다보면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아폴로 신전을 볼 수 있다. 길 양쪽으로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헌납한 보물창고와 봉납비, 신상, 건조물이 늘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그 대좌와 기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중 프랑스 고고학회가 재건한 아테네인의 보물창고가 거의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는데 도리스식 기둥 2개의 한쪽면에 아테네가 마라톤 전쟁에서 페르시아인에게 승리한 것에 대해 아폴로신에게 헌상한 내용이 적혀 있다. 그 옆에는 브레프테리온이라는 전물터가 있는데 옛 제전의 평의원들이 사용했던 곳이다. BC 3-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폴로 신전의 내실에는 아폴로 상이 놓여 있었으며 지하실에는 대지의 배꼽(옴파로스)라는 돌이 보관되어 있었다. 현재 이 돌은 델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폴로 신전은 현재 그 기둥과 토대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아폴로 신에 대한 신앙과 그에 의한 신탁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신전이 만들어졌을 당시 그 신전에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곳 바위 틈에서 올라오는 물 기운을 마시며 황홀해진 신관이 아폴로 신에게 신탁을 고했다고 한다. 신전 전실의 벽에는 고대 현인 7명의 격언이 새겨져 있는데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에서 광명, 의술, 궁술, 시, 음악, 예언, 가축의 신이다. 아폴론이라고도 한다. 그는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신이었고 또한 음악의 명수로서 예술의 수호신이 되어 뮤즈의 여신들이 그를 따른다. 그는 때로 태양과 동일시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폴로가 그리스, 로마인에게는 지성과 문화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2. 크레타섬의 미노스궁전 / 그리스 최남단의 섬, `지상낙원`크레타

 길이가 260km, 폭이 약 15km인 그리스 최남단에 길게 누워 있는 화산섬.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으로 면적은 제주도의 4.5배에 달하며 인구는 약 51만 명이다. 행정상 하니아, 레씸노, 이라클리온, 라시씨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라클리온이 수도다. 기원전 26세기경에 탄생한 크리티는 미노안 문명의 중심지자 독립된 국가였다가 기원전 4세기부터 로마, 베네치아, 오스만 튀르크 등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1913년에 그리스로 합병됐다.

올림픽의 도시인 아테네, 포카리스웨트 광고와 영화 <맘마미아>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산토리니에 비해 크레타는 그저 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크레타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면 그리스인들은 서운해할지도 모른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자 유럽 최초의 문명이라고 부르는 미노아 문명의 발상지이고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와 그리스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 본명 대신 ‘그리스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스페인의 궁정화가 엘 그레코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흥미진진한 신화의 섬


크레타의 역사는 자그마치 기원전 2800년경으로 올라간다. 귀가 솔깃해진다. 지나가는 꼬부랑 할머니를 붙들면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보따리를 술술 풀어놓을 것만 같다. 물론 여기에서 2개의 유명한 신화가 탄생했다. 크레타를 유럽의 어머니라고 부르게 된 신화가 그 첫 번째다. 신들의 왕 제우스는 크레타에서 자랐다. 

그는 호색한으로 유명했다. 현모양처인 헤라가 있었지만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했던 그는 어느 날 동방의 공주인 에우로파에게 반한다. 그리고 특기인 변장술을 부려 흰 소로 둔갑해 에우로파를 등에 태우고 납치하고 만다. 

감이 오는가? 에우로파 공주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유럽’이다. 에우로파 공주가 살던 곳, 즉 크레타가 유럽 땅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두번째 신화. 이렇게 제우스와 연분을 맺게 된 에우로파는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아들이 미노아 문명을 일으킨미노스 왕이다. 미노스 왕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의 후원으로 왕좌에 오르고 나라를 융성케 했지만 제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아 포세이돈의 눈 밖에 나게 된다. 포세이돈은 미노스 왕이 사랑하는 왕비 파시파에가 제물로 보냈던 황소를 사랑하도록 저주를 걸었다. 

그리하여 황소를 연모하게 된 왕비는 머리는 황소요 몸은 사람인 괴물을 낳았다. 미노스 왕은 건축의 신인 다이달로스에게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미궁을 만들게 하여 이 망측한 괴물을 가둔다. 그래도 왕비의 소생이라 끼니는 챙겨주었는데 문제는 괴물이 사람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미노스 왕은 매년 아테네 시민들을 뽑아 미궁으로 들여보냈고 이를 저지하려는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제물을 자청해 미궁에 잠입한다. 용맹한 테세우스는 결국 괴물을 해치우고 미노스의 딸이 준 실타래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 실타래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다이달로스였다. 이를 알고 격노한 미노스왕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를 미궁에 가둬버린다. 명석한 두 부자는 밀랍으로 새의 날개를 몸에 붙여 탈출에 성공하지만 이카루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바람에 밀랍이 녹아내려 추락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흔히 알고 있는 ‘이카루스의 날개’의 교훈이다.

미노아 문명이 번성했던 주 무대였으나 기원전 16~17세기에 일어난 지진과 해일로, 14세기에 일어난 화재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 상당히 복원되었으나 사실 위와 같은 신화를 모른다면 폐허로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4000여 년의 역사가 깃든 곳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가치가 있다. 복원품이 아닌 미노스 왕의 진품 왕좌가 있는 방은 줄을 설 정도로 인기가 많다.

과연 이 두 가지 신화는 그리스 선조들이 만들어낸 전설일 뿐일까? 실제로 신화의 무대는 존재했다. 바로 크노소스Knossos 궁전이다. 이라클리온에서 남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크노소스 궁전은 영국의 고고학자인 아서 에반스Arthur Evans에 의해 발굴되었다. 신화에서처럼 크노소스 궁전은 좁은 통로와 복잡한 구조 때문에 몇 번이나 직각으로 돌아야만 입구로 빠져나갈 수 있다. 게다가 이 안에 1400여 개의 방이 있었다고 하니 그 자체가 미로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또 이곳에서 발굴된 소뿔 모양의 석조물과 황소머리 잔은 그 당시 황소를 신성시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황소도 있고 미로도 있는데, 그렇다면 왕비 파시파에에겐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오르는 궁금증은 그리스를 더욱 알고 싶게 한다. 

/ 마이프라이데이 EDITOR•PHOTOGRAPHER 서다희     

미노스 궁전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와 트로이센 공주 아이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테세우스는 트로이센에서 자랐다. 아버지인 아이게우스는 아이트라에게 테세우스가 자라서 큰 바위를 들어내고 그 아래 감춰 둔 칼과 구두를 꺼낼 수 있을 만큼 장성한 후에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다. 테세우스가 장성한 후 아이트라는 아들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테세우스는 그 큰 바위를 간단히 들어내고 칼과 구두를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 긴 여정을 떠났다. 테세우스는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아테네에 도착했다. 

당시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의 부인은 마법사인 메데이아였는데 그녀는 마법으로 이 청년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테세우스를 제거하기 위하여 독이 든 술을 권했다. 테세우스가 왕의 앞에 나가 독이 든 술잔을 받아 마시려는 순간 아이게우스는 청년의 칼과 구두를 보고 자기 자식임을 눈치챘다. 그리고는 그 술잔을 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메데이아는 자신의 소행이 탄로날까 두려워 아시아로 도망을 갔고 테세우스는 친자 인정을 받아 왕위계승자로 결정되었다. 

당시 아테네에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당시 강국이었던 크레타의 왕 미노스가 청년과 처녀들을 각각 7명씩 산제물로 바치라는 요구를 해 온 것이었다. 미노스는 몸은 인간이고 머리는 황소인 미노타우로스에게 젊은 남녀를 먹이로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동물은 힘이 장사에다 성질이 난폭해서 특수 설계한 미궁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 이 궁전이 미노스 궁전 혹은 크노소스 궁전이라는 것이다. 테세우스는 이런 재앙으로부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제물의 한명으로 자원해서 이 괴물을 처치하기로 마음먹었다.

케세우스는 출항 전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만일 성공하면 검은 돛 대신 흰 돛을 배에 달고 돌아오기로 말이다. 크레타에 도착한 일행은 미노스 앞에 끌려 갔다. 이 때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는 일행 중에 끼어 있는 테세우스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아이아드네는 미궁의 비밀을 귀띔해 주면서 칼 한 자루와 실 타래를 주었다. 테세우스는 실 타래를 풀면서 미궁 안으로 들어가 괴물을 죽인 후 다시 실 타래를 따라 무사히 빠져 나왔다. 테세우스는 배를 타고 아테네로 돌아오면서 흰 돛을 단다는 것을 깜빡 잊어 버렸다. 이것을 멀리서 본 아이게우스는 아들이 죽은 줄로 알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것이 궁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재로 그것이 발견되지 않아서 아무도 그 존재여부를 알지 못하였다. 트로이를 발굴하고 미케네, 티린스를 발굴한 독일의 쉴리만은 현지 총독과 협상하여 발굴권을 겨우 얻어냈다. 궁전이 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지주와 흥정을 했다. 지주는 2500그루의 올리브 나무 가격을 받아야 한다며 10만 프랑을 요구했다. 결국 4만프랑에 합의를 하고 현장 조사를 하던 중 나무가 888그루밖에 되지 않자 쉴리만은 화가 나서 발굴작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10여년 후 영국인 아서 에반스(Arthur Evans)가 상형문자 해석에 관한 그의 이론을 확인하고 위해서 크레타 섬에 오게 되었다. 그는 쉴리만이 했던 것처럼 올리브 나무가 있는 곳을 궁전의 위치라고 생각했다. 올리브 나무가 있던 지역은 크레타의 수도 헤라크 레이온(혹은 이라크 레이온)에서 5km 남쪽으로 떨어진 곳이었다. 에반스는 신화에서처럼 크레타에 반드시 미노스의 크노소스 궁전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발굴에 착수했다. 

발굴을 시작한 후, 거대한 궁전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방이 1천개가 넘는 궁전은 3~4층으로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각방은 층계를 통해 각 층을 연결하고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다이달로스가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공주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에게 알려준 미궁 탈출 방법도 그가 알려준 것이라 한다. 

궁전 안에는 수도 설비가 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하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각 방의 밝기는 광정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와 건물 내부를 밝혔다. 이 광정은 지붕에서 바닥까지 수직으로 관통하는 공간인데 이것이 건물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그들의 건축술이 고도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방과 복도의 벽에는 화려한 프레스코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장난치며 물 속을 헤엄치는 돌고래들, 젊은 청년과 머리를 길게 땋은 젊은 여인들의 행렬, 돌진하는 황소와 곡예사들 등이 벽화를 장식하고 있다. 궁전 안에는 거대한 꽃병들이 발견되었는데 꽃병에는 문어가 한 마리씩 그려져 볼록한 꽃병의 윤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또 궁전 곳곳에서 라비린토스(lavyrinthos)라고 부르는 '쌍날도끼'가 발굴되었다. 

금제 봉납 양날도끼. 크노소스궁전에서 출토. BC17~13세기 작품. 미노안들이 이 양날도끼를 '라브리스(labrys)'라고 불렀음. 근대어의 '라비린스(labyrinth, 미궁)'는 이 '라브리스의 주거(resident of Labrys)'에서 유래한 것으로, '양날도끼의 궁전'에서 유래된 것임. 도끼는 미노안 종교의 신성한 상징임. 

이 쌍날 도끼는 일종의 종교 의식의 상징으로 많이 이용된 것으로 보이며 악귀를 쫓는다든지 제사를 지낼 때 소를 잡아 받치는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하에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은 창고였던 것 같다. 이 항아리 모두에 올리브 기름을 채운다면 19,000갤론 정도로 엄청난 양이 된다. 

수정 단지(rhyton). 자크로스(Zakros)궁전에서 출토된 우아한 작은 리톤(獻酒 단지). BC17~15세기에 제작. 몸체는 큰 수정덩이를 조각한 것이고 손잡이는 청동으로 된 끈으로 묶은 수정 알로 만들어져 있음. 이 독특한 단지는 수백개의 작은 파편을 복원한 것임. 

이 곳에서는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옥좌가 발굴되었다. 신하들이 앉는 긴 의자 사이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자 몸에 독수리 머리와 날개의 괴물인 그리핀 두 마리가 새겨져 있는 옥좌이다. 

아직도 의문인 것은 크노소스 궁전과 화려하던 미노아 문명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가이다. 외부의 침입자에 의해 파괴되었는지, 아니면 지진 등 자연적인 재해에 의한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궁전을 발굴해 낸 에반스는 궁전의 방에서 갑작스런 재해의 증거를 발견했다. 연장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완성되지 못한 예술 작품, 가사 도구가 그대로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크레타가 유럽에서 지진 활동이 많은 지역이라는 점이 재해에 의한 멸망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에반스도 강도 높은 지진만이 크노소스 궁전을 파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후 많은 학자들은 에반스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 출처 : http://mystery.wo.ro

 

3. 바위 돔사원 / Dome of the Rock

엘 카스 샘을 지나서 계단 길을 올라서면 정면에 나타나는 것이 황금 사원이다. 오마르 사원이라고도 불리며, AD 691년 칼리프 압둘 말리크가 세운 것이다. 당시 이집트에서 나오는 7년간의 모든 세금을 들여서 만든 이슬람의 제 3대 성지이다. 지름이 78피트, 높이가 지상으로부터 108피트인 돔은 구리과 알미늄의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태양빛이 비칠 때는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반사된다. 황금사원이라는 이름은 이 사원의 둥근 지붕을 1958 ~ 1964년 사이에 교체하면서 황금색 칠을 한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사원의 실내에는 폭 13 m, 높이 1.25 ~ 2 m, 길이가 18 m 의 넓직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던 (이슬람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도 전해진다. 표면네는 골이 패어 있어서 제물의 피가 흘러 내리도록 되어 있다. 무슬림들은 이 바위를 딛고 모하메드가 승천하였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은 무슬림들의 3대 성지가 되는 것이다.

기원전 950년경, 유다 왕국의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안의 동쪽편 산지에 순금으로 장식한 장엄미가 넘치는 솔로몬 성전을 세웠다. 성전이 세워진 후 이 지역은 성전산(Temple Mount)이라 불려지게 되었고 성도 예루살렘의 핵심부가 되었다. 이 성전은 이스라엘 최초의 성전으로 그들 신앙의 중심지요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기원전 6세기 초, 바벨로니아 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도성을 불질렀고 이 때 성전도 소실되게 된다. 유다 왕국의 멸망 후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바벨로니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들의 포로가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승리로 그들은 해방되었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폐허가 된 성전을 소규모로 재건하게 된다. 이 때가 기원전 515년경이었다. 성전산 위에 세워진 이 두 번째 성전은 페르시아, 희랍, 로마시대를 거치는 500여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제국의 후광으로 왕위에 오른 헤롯 왕은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두 번째 성전을 헐고 크고 화려한 성전을 새롭게 건축하였다. 대규모의 성전과 부속건물, 주변의 요새 등을 원래의 크기와 위용대로 재건하게 된다. 이것이 세 번째 성전이며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성전이기도 하다.

서기 1세기 중엽, 로마제국의 통치에 항거하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기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 터에 서기 135년경에 하드리안 황제가 이교도의 아도니스(Adonis) 신전을 건설하였고, 비잔틴 시대에는 이곳을 통치했던 기독교 인들이 유대인 성전의 파괴를 보여주기 위해 황폐한 모습으로 성전산을 방치하였다. 오직 성전산의 서쪽편 축대인 "통곡의 벽"만이 남아 그곳의 역사를 가늠하게 해 줄 뿐이었다.

서기 638년 이곳을 통치했던 아랍인들은 성전산의 큰 바위 위에서 자신들의 최고의 선지자 모하메드가 승천했다는 전설에 따라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바위를 종교적으로 기념 및 보존하기 위해 서기 692년 당시 예루살렘의 통치자인 압둘 말리크는 그들의 대사원을 건축하게 한다. 

오늘날도 성전산 위에 우뚝 서 있어 예루살렘의 대표적 건축물이 되고 있는 "바위의 돔"이 바로 그것이다. 지름이 78피트, 높이가 108피트인 돔은 구리와 알미늄의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태양빛이 비칠 때는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반사된다. 1958~1964년 사이에 사원의 돔을 교체하면서 황금색 칠을 하여 황금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정팔각형의 건물인 이 사원 실내 한가운데에는 폭 13m, 높이 1.25~2m, 길이가 18m인 나무로 둘러싸인 넓직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고 전해진다. 표면에는 골이 패어 있어서 제물의 피가 흘러 내리도록 되어 있다. 모하메드가 승천했다는 바위도 바로 이 바위다. 이 때문에 회교에서는 메카 메디나와 함께 예루살렘을 3대 성지로 꼽고 있다.

바위의 돔 사원의 모든 벽면에는 정교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어 아랍 건축예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돔 내부에는 대리석 기둥들이 있는데 이 기둥의 색깔, 높이, 두께 등이 모두 제각각이다. 그 이유는 이 기둥들이 비잔틴이나 로마시대 신전의 것으로 복잡한 배경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바위의 돔은 새 단장을 하게 되었다.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650만 달러의 사재로 돔을 24K의 순금으로 씌우게 했다. 1993년 시작된 공사는 15개월간 계속되어 1200장의 얇은 순금 판이 돔 위에 입혀져 진짜 황금의 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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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리아의 팔미라 고도(古都)

뜨거운 사막 위에 솟아오른 환상의 도시 팔미라. 시리아의 동부 사막지대 한복판에 세워진 대도시 팔미라는 흔히 사막의 궁전으로 불리며,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과 경이로 채워준다. 팔미라는 동서를 잇는 교역도시였으며 그로 인해 사방에서 유입되는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특유의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팔미라가 있는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다마스쿠스 사이의 광할한 사막지대 안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오늘도 이곳의 에프카(Efqa) 샘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나 일대를 풍요롭게 적셔주고 있다. 이 곳은 10m이상되는 아쟈나무들이 큰 숲을 이뤄 주변의 사막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원래 이 곳 지명의 이름도 타드몰(Tadmor : 고대 셈족어로 야자수)이었다.

팔미라는 동쪽의 페르시아 만과 이란, 서쪽의 지중해를 잇는 동서 무역의 중요한 중계지로서 번영하였다. 팔미라에는 많은 상인이 살았고, 페르시아 제국에서 온 인도와 아라비아 산물을 로마 제국으로 운반하였다. 또한 사막을 왕래하며 장사를 하던 카라반 (caravan)들이 피곤한 몸을 쉬고 물을 공급받던 사막의 경유지였다. 셀레우스코 왕조 때부터 중개무역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팔미라는 로마가 점령했던 기원전후 약 300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한 때 이 곳에까지 영향을 미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팔미라는 역사의 대부분을 정치적인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곳을 지나는 대상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였으며 사막 교역로를 지켜주는 대가로 통과세를 받기도 하였다. 그 결과 팔미라는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희랍과 로마시대가 전성기였으며, 이 때 타드몰에서 팔미라로 이름을 바꾸고 독자적인 군대를 가진 강력한 도시국가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팔미라에 남아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은 1~3세기의 로마시대에 건축한 것이다. 거친 표면이지만 세련미가 돋보이는 그래서 팔미라를 대표하는 신전인 벨 신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당시의 석조기술을 알 수 있는 원형극장, 벨 신전 맞은편에 있는 나부신전과 개선문, 정치집회장 혹은 시장으로 이용된 아그라와 그 밖의 많은 석주들. 이 모든 유적들을 보면 눈부시고 황홀한 팔미라가 계획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독자성을 유지했던 팔미라의 문화는 그 미술에서 특히 조각에서 확실히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주변의 구릉에 석회암이 풍부했던 덕택이기도 하다. 많은 팔미라의 조각은 양식화된 정적인 미술이고 서아시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팔미라의 납골당.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벽면 사이로 관을 안치했다.
팔미라의 서쪽 시외에 북시리아의 황야가 펼치지고 묘지의 계곡이라는 장소에 팔미라 시민의 묘가 있다. 묘는 영원의 집이라 불리며 팔미라 사람들에게 깊은 의미를 주고 있었다. 공동 묘지도 있었으나 유력한 가족은 일족의 묘를 가지고 있었다.   묘의 형식에는 탑묘(塔墓), 가형묘(家形墓), 지하 분묘(地下墳墓) 등이 있었으며 탑묘의 형식은 팔미라 독자의 양식에 근거하고 있다.
AD.32년 티베리우스 통치 기간 중에 로마의 神 주피터에게 바쳐진 벨 사원의 웅장한 모습.

오랜 세월이 지난 후 1930년대에 와서야 팔미라의 발굴과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16만평에 달하는 팔미라를 발굴하는 작업을 언제쯤 끝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조금씩 발굴되고 있는 팔미라의 신전과 석주들이 화려했던 팔미라의 옛모습을 현대에 전해주고 있다. 시리아의 동부 사막지대 한 복판에 세웠던 로마시대의 대도시 <팔미라>는 흔히 사막의 궁전이라고 불리며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경이에 찬 감동과 찬탄으로 채워준다.

/ 출처 : http://mystery.wo.ro

/  www.hanmaumtour.com

 

5. 왕가의 계곡(The Valley of Kings)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500km떨어진 곳에 룩소르라는 관광지가 있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 테베의 남쪽 교외에 해당한다. 왕가의 계곡은 나일강 서안의 메마른 계곡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곳에는 아멘호테프 4세가 중부 이집트의 텔엘아마르나에 천도해 있던 시기를 제외하고 신왕국 제 18왕조(기원전 1400년경) 투트메스(Thutmose) 1세에서 제20왕조 람세스(Ramses) 11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왕의 암굴묘가 세워져 있다. 표고 450m의 알쿠른 바위산이 파라미드 형상을 한 산과 태양이 지는 나일강 서안은 죽은 왕의 매장지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대에는 타이네트(골짜기), 타세트아아트(위대한 장소)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와디알무르크(왕들의 계곡)라 불리고 있다. 

왕들의 계곡은 동서로 갈리어져 있으며, 지금까지 약 60여기의 묘와 20여개의 피트(지면에서 곧게 내리 판 굴)가 발견되었다. 1922년 투탕카멘(Tutankhamen)의 묘가 발견된 이후 새로운 묘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새로운 묘를 찾기 위한 발굴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무덤들은 모두 신왕국 때의 것으로, 왕들의 묘는 험한 바위산을 파고 낭떠러지의 중턱이나 아랫 부분을 파낸 곳에 세워졌다. 그리고 왕묘에 대해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공사에 참여했던 인부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이 묘들은 일반적으로 계단과 경사로로 구성되는 하강 통로, 여러 개의 부속실, 전실, 현실로 이루어져 있다. 제 18대 왕조 시대에는 묘의 통로가 도중에 지각으로 구부러지는 직각형이 전형적인 형태였다. 제 18왕조인 이크나톤(Ikhnaton) 왕은 도읍을 아마르나로 옮겼고 그 곳의 묘는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구조는 빛의 직진성과 관련되어 태양신을 숭배하던 당시 사회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왕묘는 계속 왕가의 계곡에 세워지게 되었다. 제 18왕조 말의 호르멤헤브(Hormemheb) 왕묘 이래로 묘의 구조는 직선형으로 변해갔다. 또 제 20왕조의 람세스 4세 이후는 거대한 입구를 가지게 되었다. 

1881년 7월, 텔엘바하리의 남쪽 낭떠러지에서 구멍 뚫린 샤프트 묘에서 놀라운 대발견이 있었다. 그 곳에는 금속기나 석제 그릇, 샤프트상 등을 비롯하여 5900점의 부장품과 50구가 넘는 미라가 발견된 것이다. 이 묘는 제 21왕조의 파누젬 2세와 그 가족을 매장하기 위하여 준비된 것으로 드러났다. 매장 후에 제 22왕조 세숑크(Sheshonk) 1세 때 신왕국 시대의 왕과 왕비 미라가 운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텔엘바하리의 묘를 발견하게 된 것은 한 도굴범의 정보 제공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그의 진술에 따르면 1870년대 초에 이 곳을 발견하여 골동품을 팔아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많은 부장품이 나돌자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그는 더 이상의 도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경찰에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898년, 프랑스의 한 학자에 의해 왕가의 계곡에서 아멘호테프 2세의 묘가 발견되었다. 그 곳은 입구가 대량의 모래와 자갈에 의해 완전히 매몰되어 비교적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11구의 미라가 발견되었고 그 중에 8개가 왕의 미라임이 밝혀졌다.

이렇게 텔엘바하리와 왕가의 계곡에서 2군데의 왕의 미라를 숨겨 놓은 곳이 발견되었다. 왜 이 왕들의 미라는 자신의 묘가 아닌 다른 곳에 숨겨졌을까?

신왕국 시대 말기에 왕가의 계곡에서 도굴이 성행하게 되어 많은 왕의 미라가 손상을 입었다. 이 사태를 우려한 아멘 대사제가 안전한 다른 장소로 이송했다고 알려져 있다. 즉, 도굴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묻혀 있던 수많은 부장품과 금으로 도금한 관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아멘 신관단이 왕의 미라를 옮기면서 부장품을 약탈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합법적인(?) 도굴로 얻은 금은 보화는 아멘 대사제를 중심으로 하는 테베 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왕의 유체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그들의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즉, 겉과 속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벌인 일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왕들의 미라는 모두 33구이다. 그 중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거나 확정되지 않은 것은 13구의 미라이다. 그렇다면 또다른 은신처에 이 13구가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2군데의 은신처에서 발견된 왕들의 미라를 안장한 목관이나 미라를 쓴 포대에는 미라가 여러 은신처로 이동, 운반되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호르멤헤브 왕묘에는 왕의 미라가 다른 장소로 운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제18왕조 말기에서 제19왕조 초기의 왕들의 미라는 발견되지 않은 제3의 은신처에 있을 확률이 높다. 앞으로의 발굴에서 새로운 왕묘를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5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집트는 이미 기원전 3500년, 부족 국가들이 탄생을 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00년 경에 최초의 통일 국가인 제1왕조가 세워졌다. 이 때부터 약 2500년동안 26개의 왕조가 생겨났는데 제 10왕조까지를 고왕국, 제17왕조까지를 중왕국, 그 이후를 신왕국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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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클락 데 슈발리에(십자군 성채)

1096년 유럽 기독교 국가들로 구성된 십자군의 대장정은 오늘날 터키의 최남단 도시 안디옥(현재의 안타키아)을 점령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서 남진을 계속하여 1099년에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기독교 성지를 이슬람교도의 손에서 탈환하자는 구호 밑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의 승리였다. 이로써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십자군은 남북으로 700km나 되는 이 지역에 50개가 넘는 요새 성채를 축성하였다. 이 성채들은 십자군 건축 양식에 따라 하나같이 장대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13세기말 십자군의 패배와 함께 파괴되었다. 그 후 7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직 그 골격들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 곳 예외가 있다. 십자군 시대 성채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곳이 있다. 그 곳은 시리아의 클락 데 슈발리에 (Crac des Chevaliers)라고 부르는 성채이다. 기사의 성체 뜻을 가진 이 곳은 당시 성채의 구조와 축성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유럽 전체를 포함하는 중세 건축물 가운데 건축법이나 건축미가 매우 뛰어난 것 중 하나로 꼽혀 건축사의 연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십자군은 그 숫자로 볼 때 대군은 아니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십자군 수는 15,000명을 넘지 못했다. 그 후 예루살렘에 주둔했던 십자군 기사들은 고작 300명 정도였다. 소수의 십자군이 다수의 적대적인 지역을 관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십자군은 수적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군사적 요지에 수많은 성채들을 건설하게 되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장악해 갔다. 십자군 성채는 군사들이 주둔하는 요새였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다. 클락 데 슈발리에는 모슬렘의 중요한 도시 홈스(Homs)와 지중해를 잇는 중간지점의 전략적 위치에 세워졌다. 이 성채가 완성되었을 때 모슬렘 사가는 모슬렘 세계의 '목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했다.

클락 데 슈발리에는 해발 750m의 칼릴(Khalil)산 정상에 오각형 형태로 우뚝 서 있다. 길이는 남북으로 200m, 동서로 140m나 되며, 면적만 해도 1만평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다.

이 성채의 특징 중 하나는 성벽이 완벽한 이중구조라는 것이다. 우선 든든한 외성이 있고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높게 쌓아 올린 내성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다. 외성과 내성 사이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해자를 만들었다. 내성은 성벽을 직각으로 쌓지 않고 그 밑부분을 45도 각도로 경사지게 만들어서 해자를 넘어온 적들이 성밑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성 밑부분은 경사지게 만든 것은 성벽자체가 지진에 견딜 수 있게 하는 효과도 지녔다고 한다. 성내부에는 바닥이 꺼지면서 적을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장치, 가득 채우면 몇 년까지 버틸 수 있는 곡식저장소, 거대한 물 저장소, 120m에 달하는 대집회소, 예배소, 식당, 숙소, 미로같은 비밀통로 등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슬람교도인 모슬렘들은 이 성채를 빼앗기 위해 여러 번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무적의 살라딘도 이 성채를 공략하러 갔다가 성공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다음날 철군했다는 일화도 있다.

1271년 이집트의 술탄 베이발스(Sultan Baybars)는 군대를 이끌고 이 난공불락의 요새 클락 데 슈발리에를 공격했다. 격전 끝에 외성을 뚫는데는 성공했지만 내성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를 함락시키는 것이 무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세이발스는 한가지 계략을 꾸몄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성안의 십자군들에게 한 통의 밀서가 전달되었다. 그것은 십자군 총사령관이 보낸 밀서였다. 거기에는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투항하여 유럽으로 퇴각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저항하던 십자군들은 베이발스에게 유럽으로 돌아가는 안전한 귀로를 보장하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베이발스가 이 조건을 수락하자 십자군 성채에는 백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사실 그 밀서는 베이발스가 꾸며낸 가짜였다. 그러나 그의 밀서로 인해 성채는 파괴되는 운명을 면할 수 있었다. 1271년 이 성채의 함락을 시작으로 십자군 성채들은 차례로 모슬렘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20년 후인 1291년, 십자군 최후의 보루 아코(Acco)가 함락됨으로써 십자군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 출처 : "http://mystery.wo.ro"

/ "박준서교수의 '성서세계탐방'

 

7. 테베 네크로폴리스 귀족 묘지

이집트의 룩소르에는 왕들의 무덤인 왕가의 계곡이 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무덤이 있는데 귀족들의 무덤인 네크로폴리스가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왕가의 계곡보다 귀족들의 묘인 네크로폴리스가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고 얘기한다.

네크로폴리스는 왕가의 계곡보다는 그 유명세가 덜한게 사실이다. 왕족들보다는 한단계 아래 계급인 귀족들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덤의 크기나 형태로 보면 결코 왕가의 계곡 무덤들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 무덤들은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의 묘와는 다르게 벽화나 조각이 무수하게 많으며 그림도 상당한 수준이다. 학자들은 이 귀족들의 무덤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이 무덤들 가운데 라후미라의 묘를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라후미라는 기원전 1502년부터 1448년까지 제 18왕조 토우토메스 3세 때의 재상을 지낸 사람이다. 그의 무덤은 다른 것보다 훨씬 크고 훌륭한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토우토메스 3세는 싸움에 능한 왕으로 전쟁을 즐겼으며 라후미라는 그 빈자리를 지키면서 여러 나라로부터 공물을 받아 관리하고 정리하였다.

네크로폴리스

라후미라의 벽화를 보면 외국 사신으로부터 공물을 받는 그림이 몇 개 있으며, 수단 지방의 흑인종인 누비아인이 상아나 기린, 원숭이 그 밖의 아프리카 산물을 운반하는 장면도 있다. 또 시리아 인이 파라오에게 물품을 전달하는 그림도 있다. 미노아 시대의 크레타 섬에서 온 인물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그림들은 미노아 궁전 안의 그림과 비슷한 점이 많다. 가령 미니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나 헤어스타일 그리고 술잔을 든 인물처럼 아주 품위 있는 모습이다. 또한 미노아 특산의 항아리와 손잡이가 있는 술잔 그리고 은제 황소 머리상을 나르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들은 점령국가의 지배시민이 아닌 크레타 시대의 상인으로 나일 강을 거슬러 룩소르까지 올라오기도 했었다.

라후미라의 묘에는 파티의 흥겨운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의 아내인 메리트가 정장을 하고 자랑스럽게 남편 옆에 서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다. 또 다른 부분에서는 여성 악사들이 하프, 리라, 탬 버린 등을 들고 풍악을 울리는 모습도 있다. 초대된 손님들은 남녀구분없이 아주 흥겨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남부 테베(현재 룩소르)의 장관이었던 센네펠의 무덤도 여기에 있다. 그는 농업과 축산에 관련된 일을 맡아 보았는데 그의 묘의 천장에는 포도잎과 늘어진 포도송이가 그려져 있어 그의 생전의 직업을 연상할 수 있다.

또 하르에포의 묘에는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들도 남아 있다. 하르에프는 고대 이집트 18왕조 왕이었던 아멘헤테프 3세의 왕비였던 티이의 궁내 시종 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려져 있는 벽화는 왕비 티이와 여신 하트홀을 동반한 아멘헤테프 3세가 그들 부부를 칭송하는 춤을 관람하고 있는 장면이다.

파라오의 전답을 관장했던 멘나의 묘에는 파피루스 풀로 만든 배를 타고 호수에서 여가를 즐기는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오른손에 투창을 들고 하늘을 향해서 날아오르는 오리를 겨누고 있는 모습이다.

네크로폴리스에는 라후미라, 센네펠, 하르에프, 멘나 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그려져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서민적인 특징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벽화에 쓰인 물감은 눈부신 광택을 가지고 있으며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어떻게 몇쳔년 전의 그림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다음은 매일경제 2004. 11. 28 '문화명소기행'글입니다.

나일강 서쪽의 사막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다. 그 대표적인 땅이 그 유명한 왕가의 골짜기(네크로폴리스)다. 이 일대에 산재 해 있던 많은 무덤들은 아쉽게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 도굴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다른 무덤들에 비해 검소하게 꾸며진 투탕카멘의 무덤만 은 도굴을 면했다. 따라서 발굴했을 때 매장 당시의 모습이 거의 완벽한 상태 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를 포함한 많은 유물들은 현재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고학이나 고대 건축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 어하는 룩소르는 고대 왕국의 수도인 테베가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시내 한가 운데는 마치 폐허를 연상케 하는 룩소르 신전이 있다. 신왕국 시대 초기에 아 멘 신과 그의 아내 무트, 아들 콘스를 위해 세워진 신전이다. 룩소르 신전 근 처에는 지난 1975년에 문을 연 룩소르 박물관이 있다. 테베의 유적지에서 발굴 된 다양한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아멘호테프 3세의 두상, 아 멘호테프 4세의 벽화, 람세스 3세의 오벨리스크 등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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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2004. 11. 28 '문화명소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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