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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저런거/이것저것

7대불가사의 피라미드

by 구석구석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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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Pyramid)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와력(瓦礫)의 산으로 변한 것과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2007년 2월 5일 밤 이집트 카이로 서부 기제에 있는 피라미드가 화려한 빛깔의 조명을 받고 있다. 최근 스위스의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 재단'이 21세기 불가사의 선정 작업을 벌이자 이집트 당국이 이에 대해 불쾌해하고 있다. 수천년의 세월을 딛고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피라미드가 현대 건축물과 경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이유다. <2007. 2. 7 중앙일보>

위의 사진에서는 가장 뒤에 있는 것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가운데에 있는 피라미드가 가장 커 보이는데, 이것은 원래 높은 땅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 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건조법] 

피라미드를 건조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核材)·내장재·전재(塡材)·외장재의 순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아졌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진다. 정상까지 다 쌓고나면 위에서부터 외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외장은 정성들여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 장 끼워지지 않은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된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기제의 스핑크스는 BC 2650년경 카프레왕 시절 조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이 73.5m, 높이 20m, 폭 14m의 매머드 사이즈를 자랑한다.

사람의 얼굴에 사자의 몸을 한 이 스핑크스는 '신의 모습'과 '재생과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얼굴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얼굴은 카프레왕의 생전 모습이라고 한다. 당연히 이 스핑크스를 세운 이는 카프레왕라는게 정설이었다.

스핑크스의 양 다리 사이에서 도도메스 4세의 돌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카프'라는 상형문자가 나왔고, 스핑크스 신전에서는 카프레왕의 초상이 발견됐다. 또 남쪽에는 카프레왕을 참배하는 길이 나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비문의 '카프'는 이집트 말에서 여러 의미로 쓰이고 있으며, 왕의 참배길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자 여러 신비주의적 해석이 등장했다.

영국의 템플이란 사람은 1976년 그의 책에서 "우주의 별 시리우스에서 온 외계인이 스핑크스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화성 연구가 호그랜드는 이집트 문명을 포함한 고대 지구 문명의 기원은 화성이라고 한 술 더 떴다. 최근 화성 탐사선 패스파인더가 보내온 사진에 나타난 '인면암(人面岩)'을 근거로 그는 이집트의 피라밋과 스핑크스는 고대 화성인들이 지구를 방문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들이 만든 문명의 구조물들을 지구상에도 똑같이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집트 문명은 자연적인 발전에 의한 산물이 아닌 지구밖의 어딘가로부터 옮겨온 외계의 유산일 수 있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이집트 기자 지하도시 / 출입구닫아 고대비밀 봉인

이집트 기자의 3대 피라미드 바로 밑에 거대한 지하 도시가 존재한다고 고대 지질학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적도 바로 밑인 에콰도르 정글과 말레이시아 남쪽 해안 밑에도 역시 거대한 지하도시가 있다고 한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장식화 등으로 꾸며진 초고대 지하 문명도시들은 공룡 등 척추동물들이 지구상에서 날뛰기 훨씬 이전에 건설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 한번 고대인들의 우수성과 실력(?)을 느끼게 된다.

BC 5세기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3대 피라미드인 기자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라뷰린도스'를 방문한 뒤 쓴 역사서 2권에서 "내가 본 '라뷰린도스'는 인간의 힘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거대 지하도시 건조물로서 지상과 지하 각각 1500실의 넓은 2중 구조의 거대한 건물이었다"고 전제한 뒤 "건설자는 이집트를 지배한 12왕들이 평화협정을 맺고 자신들의 무덤과 성스러운 유물들을 숨겨 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집트 장제(葬祭) 문서인 '사자의 서'를 연구한 보바르 박사는 하늘의 오리온좌 소속 세 개의 별과 강을, 기자 3대 피라미드와 나일강을 대칭하여 지상의 건물 밑에 같은 크기의 지하 건물을 건설함으로써 천상의 신들과 지상의 인간들을 하나로 묶는 이집트 건축학의 기초를 제시했다고 말한다.

"점성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에 천문학의 많은 비밀을 숨겨 두었으며, 모든 건물은 천상의 별자리와 똑같이 지상에 대칭으로 지었다"고 헤로도토스가 밝혔다. 서기 4세기 로마 역사가 마루세리누스는 "이집트 거석문명의 유적 밑에는 반드시 문서 보관용 지하 건물을 지었으며, 모든 귀중한 자료들이 엄청난 대홍수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보존되었다"고 전한다.

1993년 인두수신(人頭獸身)의 스핑크스의 몸통 밑에 있는, 인간이 만든 커다란 공간이 최첨단 지진 탐사기에 의해 확인됐다.

상처난 스핑크스를 복구하던 작업원이 우연히 내부로 통하는 터널을 발견했다고 이집트 감독관 하우스박사가 보도진에게 발표했으나, 무슨 이유인지 입구의 봉인석을 닫아 기자의 지하도시 출입구를 영원히 닫아버렸다. 스핑크스 지하에 숨겨져있다는 '우주 창조와 인간 탄생'의 비밀이 묻혀버린 것이 아쉽기만 하다.

최근 인공위성을 이용한 지표탐사 기술, 지진 탐사 장치, 최신 GPR(지중 관통 레이다)의 발달로 세계 각지의 땅속에 묻힌 선사 문명, 초고대 문명의 유물이나 유적 조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룩소 등 5개 지역을 조사한 결과 아직 발굴하지 않은 유적 27곳이 새로 확인되었다. 기자의 거대 피라미드 지하 통로는 현재 복잡한 여느 도시교통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멀고 먼 과거와 현재의 거리가 별로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 출처=일본 가쿠에사의 월간 'MU', 번역 및 정리=최 호(칼럼니스트)


2.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1994년 가을에 프랑스 해저 고고학 발굴팀이 깊이 7m 정도의 바다 속에서 등대의 잔해 수백점을 건지는데 성공을 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수수께끼에 싸여 있던 파로스 등대의 신비가 조금이나나 벗겨졌다. 발굴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4.55m, 무게 12톤의 여신상을 기중기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발굴팀은 아직도 바다 속에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 등이 잠겨져 있어 그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고 밝혔다. 여기에서 발굴된 잔해 또는 조형물마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사람들은 파로스 등대의 비밀이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섬과 헵타스타디온이라고 불리던 1㎞정도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동쪽 끝에 세계의 모든 등대의 원조격인 파로스 등대가 서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된 등대의 높이가 135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졌다. 맨 아래층이 4각형, 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각 층은 모두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지어졌다(기울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음). 등대 안쪽에는 나선형의 길이 있어서 등대 꼭대기의 옥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아마도 알렉산드 대왕이나 태양신 헬리오스의 모양을 본떴을 것으로 여기지고 있다.

등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는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고 또 먼 본토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c이후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 뒤쪽의 반사경으로 비치는 타오르는 불길은 43㎞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고, 맑은 날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으며 또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 정도 떨어져 있는 배도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B.C28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등대에 불을 지폈을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파로스 등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등대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단단한 돌로된 등대가 무너진 것은 12c경으로 짐작하고 있다. 아마도 1100년과 1307년의 두차례의 큰 지진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반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등대의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그 모습을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반쯤 남은 등대도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해 알렉산드리아에는 배의 길잡이가 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이 등대는 14세기까지 반 정도 부서진 상태로 계속 서 있다가 대지진으로 완파되었다. 그후 여러번 등대를 재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이를 축조할 기술이 없었다. 이 기술이 가능한 때는 20세기 들어와 강철 구조의 사용 등 건축술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서야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대인들에게는 가능한 건축술이 그 후손들에게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묘한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역사가 발전한다는 발전사관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증거들을 살펴보면 고대인들이 우수한 과학 기술 문명을 보여주고 있는 예는 상당히 많다. 예컨데 이집트나 마야의 피라미드가 그러한 경우이다. 이것은 고대의 문명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과거, 밝혀야 할 역사가 상당히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3.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 정원(空中庭園) - Hanging Gardens of Babylon

BC 500년경 신(新)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다.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있다는 뜻이다.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露臺)에, 성토하여 풀과 꽃, 수목을 심어놓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한다.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물을 댔다고 전해진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왕비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서 공중 정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 왕국의 키약사레스 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하여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기로 결심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재주가 뛰어난 건축가, 기술자, 미장이들은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각각 400m, 높이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에 불과했지만 총 높이가 105m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었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 꽃이랑 덩굴초랑 과일 나무를 많이 심도록 한 이 파라미드형의 정원은 마치 아름다운 녹색의 깔개를 걸어놓은 듯이 보였다.

그런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는 방을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

공중 정원에 대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의 페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있다.


4. 에페수스(Ephesus)의 Artemis 신전 [로마 신화의 달과 사냥의 신인 Diana]

에페수스 시는 소아시아에 있는 고대 이오니아 지방의 열두 개 도시 중 하나로서 B.C 6세기 경에 이미 서아시에서 상업의 요충지로 번영하여 가중 부유한 도시로 알려졌다. 이 곳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이 신전은 당시 최고 부자였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B.C 560∼B.C 546)때 세우기 시작하였다. 높이 20미터 정도의 훌륭한 이오니아풍의 백색 대리석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이 신전은 완성되기 까지 120년이 걸렸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하여 이 신전을 돌아보고는, 기자에 있는 피리미드에도 떨어지지 않는 걸작으로 묘사하면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한 지 1세기 정도 지난 뒤 그 훌륭하고 아름다운 신전은 어리석은 한 인간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B.C 356. 10월 "어차피 나쁜 일을 하려면 후세에까지 알려질 수 있는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한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가 신전을 계획적으로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 후 디노크라테스가 불타 버린 신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에페수스의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을 팔았고, 왕들은 크로이소스 왕을 본받아 기둥을 기증하기도 했다. 더욱이 아시아 원정 길에 올랐던 알렉산더 대왕은 한층 완성중에 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의 장대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았겨 "만일 에페수스인이 이 신전을 나의 이름으로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내가 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페수스인들은 다른 나라의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야심이 강한 에페수스인들은 자신들의 신전을 지금까지 어떤 신전보다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여, 그 당시 가장 훌륭했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파르테논은 길이가 69m. 폭이 30m, 높이 10정도로서, 대리석 기둥을 58개나 사용한 신전이었다. 에페수스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정도의 규모로 만들기 시작했다. 높이 18m짜리 기둥을 127개나 사용했고, 길이는 120m, 폭은 60m로 했다. 또한 신전의 건축용 자재는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중앙의 넓은 홀에는 네 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그 규모나 화려함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제우스와 레토의 딸, 아폴론과는 쌍둥이 남매간이다. 처녀 사냥꾼으로 산과 들에서 사슴을 쫓는 활의 명수라고 하며, 그의 화살은 산욕(産褥)을 치르는 여자를 고통없이 그 자리에서 죽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한다. 또한 처녀의 수호신으로서, 순결 정절의 상징이었는데, 처녀의 순결에 상처를 입힘으로써 죽음의 벌을 받은 자 가운데는 오리온이나 아크타이온이 있다.

소(小)아시아의 에페수스에서 신앙되던 아르테미스의 상(像)은 풍부함을 표시하는 듯 살이 쪄 있고 가슴에 무수한 유방을 갖고 있었다. 주변에는 기묘한 모습의 동물들이 얽혀져 있다. 고장에 따라 특징 있는 숭배를 받았는데, 옛날에는 인신공희(人身供犧)를 하는 고장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로마 신화에서는 디아나와 동일시되었다.

아폴론이 태양의 신인 데 반하여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는 월신(月神) 셀레네, 헤카테와 동일화되었기 때문이며, 아르테미스라는 이름도 그리스계(系)가 아니고 옛 선주민족(先住民族)의 신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원래는 대지, 특히 야수들이 사는 들판을 주관하는 모신(母神)으로서 동식물의 다산(多産)과 번성(繁盛)을 주관하는 것으로 믿어, 출산과 어린이의 발육을 수호하는 신이 되기도 하였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260 ∼268년 유럽에서 아시아로 침입해 온 고트인에 의해 약탈되었으며 이 때의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J.T 와트가 대영박물관의 원조와 11년동안의 노력으로 마침내 지하 7m 지점에서 대신전을 발굴해 냈다. 발굴한 건축용 석재, 기둥, 조각을 토대로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꽤 정확하게 신전의 본래 모습을 복원할 수 있었다.

로마의 남쪽 25 km에 위치한 아리키아 부근 네미 호숫가에 있는 디아나 네모렌시스는 가장 유명한 신역(神域)으로서, 이곳에서는 디아나가 여성의 수호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로마의 유명한 디아나 신전은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다.


5. 제우스 신상

제우스 상이 있는 올림피아는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 앨리스 지방에 있는 제우스의 신역으로서 완만한 구릉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로 예부터 잘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를 믿었다. 제우스는 고대 로마의 최고의 신 '주피터'와 같이 고대 그리스 신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천둥, 번개와 비바람을 만드는 신이며, 그의 주 무기는 벼락이었다. 제우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이며,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도시마다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고대 그리스에는 아테네, 스파르타, 앨리스 등의 도시 국가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처음에는 땅의 신 크로노스와 여신 헤라를 숭배했지만 뒤에 제우스 신을 숭배하게 되어서 B.C457년에 제우스 신전을 만들었고 그 안에 '피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상을 안치하였다.

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네 여신상은 피디아스의 2대 걸작품으로 꼽힌다. 피디아스는 8년여의 작업 끝에 제우스 상을 완성했는데, 그는 제우스의 신성함 위엄과 함께 너그러움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걸작 중의 걸작 제우스 상은 오늘날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대지 위에 우뚝 세워진 신전에는 양옆에 열세 개씩, 양끝에 여섯 개씩 장엄하고 무거운 도리아식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완만하게 기울어진 지붕이 덮여 있다. 이 신전의 한가운데 있는 제우스 상은 높이가 90㎝, 폭이 6.6m인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12m 정도 되는 상은 거의 천장을 닿고 있다.

제우스 상은 나무로 만들어져 그 위에 보석과 흑단, 상아를 박아 장식한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금으로 된 발 디딤대에 올려져 있는 양다리는 거의 예배자의 눈높이와 일치하였다. 오른손에는 금과 상아로 만든 승리의 여신(Nike)상을 떠받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황금을 박아 장식한 지팡이(왕홀)를 쥐고 있다. 지팡이 위에는 매가 앉아 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어깨에는 꽃과 동물이 새겨진 황금의 아름다운 망토가 걸쳐져 있다.

제우스 신전의 발굴 움직임이 18세기 경부터 일어났고 처음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829년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년경에 독일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1950년대 제우스 신전 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6.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의 마우솔로스 영묘(靈廟) - Mausoleum

페르시아 제국 카리아의 총독 마우솔로스를 위하여 그리스의 할리카르나소스에 건조된 장려한 무덤기념물이다.

면적 29×35.6 m, 높이 50 m. 할리카르나소스의 묘묘(墓廟)라고도 한다. 마우솔로스의 생전에 착공되었으나, 그가 죽은 뒤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계속 진행하였으나 완성된 시기는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죽은(BC 350) 뒤로 추측된다.

설계는 사티로스와 피테오스가 하였다. 동서남북의 장식조각은 각각 스코파스, 레오카레스, 티모테오스, 브리아크시스가 담당하였다.

각 면의 조각·프리즈는 발굴되어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또, 로마인은 비슷한 대규모의 분묘건축(墳墓建築)도 마우솔레움이라고 일컬었다. 마우솔레움은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다.


7. 로도스 항구의 거상 - colossus

거상(巨像). 그리스어 콜로소스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 등을 보고나서 칭한 말이 그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에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로도스섬의 콜로서스이다.

로도스 항구에 서 있던 태양신 <헬리오스 청동상>은 높이가 36 m나 되었으며, 린도스(로도스 섬 동쪽에 있던 고대 도시의 이름)의 카리오스에 의해 BC 280년경 건조되었는데 BC 224년의 지진 때 붕괴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현존하는 것도 많으나 모두 기념비적인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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