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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경주 구황동 황룡사터

by 구석구석 2022.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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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염원하며 세운 서라벌의 랜드마크 황룡사

553년(진흥왕 14) 짓기 시작한 황룡사는 본래 사찰(寺)로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삼국사기>는 “월성의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찰(‘황룡사’) 조영으로 계획을 수정했다”(‘신라본기’)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황룡사 조영공사는 13년 만인 566년 1차 가람이 마무리됐다. 진흥왕은 8년 뒤(574년) 구리 3만5007근(약 7.6t 추정)과, 도금 1만98푼(약 100냥)을 사용하여 5m에 달하는 불상(장육상)을 조성했다. 이와함께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136푼을 들여 두 보살상을 주조했다. 이들 불상을 모시기 위한 금당도 새롭게 건립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643년(선덕여왕 12) 황룡사 경내에서 역사적인 불사가 이어진다. 그것이 황룡사 9층 목탑이다. 탑의 높이만 약 80m에 달했다니 천년고도 서라벌의 랜드마크였을 것이다.

선덕여왕은 당나라 유학파 승려인 자장(595~658)의 건의를 받아들여 9층 목탑을 완성한다.(645년)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 침범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탐라), 5층은 응유(백제),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거란), 8층은 여적(여진), 9층은 예맥을 진압한다.”(<삼국유사> ‘구층탑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던 선덕여왕은 불법의 힘을 빌려 위기를 탈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는 높이 80m가 넘는 목탑을 세울 기술자가 없었다. 그래서 보물과 비단을 보내 백제의 탑건축가인 아비지를 ‘스카웃’했다. 아비지는 이간 김용춘(생몰년 미상)이 이끄는 200여명의 신라인과 함께 탑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황룡사의 가람형식은 고구려 양식(1탑3금당)을 따랐다. 황룡사의 조성 기획은 신라, 가람형식은 고구려, 기술은 백제 등의 문화가 응측된 삼국 공동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목탑은 바닥 면적이 약 150평이고, 기단 한 변의 길이가 22.2m 정도이며 아파트 30층 높이(탑신부 65m, 상륜부 15m 가량)로 추정된다. 당대 서라벌의 모든 건축물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부터 진지왕(576~579)-진평왕(579~632)을 거쳐 645년(선덕여왕 14)까지 93년에 걸친 대역사를 끝내고 신라 천년 사직을 지키는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신라는 9층탑을 조성한지 불과 23년 만에(668년) 삼국통일을 이룬다. 황룡사와, 그 가운데 눈만 들면 보이는 우뚝 솟은 거대한 목탑은 신라인들의 불안했던 마음을 다잡은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목탑은 그 압도적인 높이 때문에 벼락을 맞기도(718·868·953·1035·1095년), 화재가 일어나기도(935년) 했다. 지진 때문에 북쪽으로 탑이 기울기도 했다.(927년) 그 때마다 수리공사가 이루어졌는데 1238년(고려 고종 25) 윤 4월 몽골 침략군의 방화로 황룡사와 9층 목탑은 끝장나고 만다.

<삼국유사>는 “1238년 몽골군의 병화로 황룡사의 모든 전당과 9층 목탑, 장육존상까지 모두 소실됐다”고 기록했다.

황룡사에는 신라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예컨대 <삼국사기>는 “황룡사 금당 벽에는 (그림의 천재인) 솔거가 그린 ‘늙은 소나무 그림(노송도)’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솔거의 소나무는 뿌리와 줄기가 비늘처럼 주름 잡히고 가지와 잎은 서리어 구불구불했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이 그림을 보고 벽에 날아들었다가 부딪쳐 미끄러져 떨어지곤 했다.”

<삼국유사>는 “754년(경덕왕 13) 왕비인 삼모부인이 49만7581근(약 108t)의 구리를 시주하여 제작(높이 1장3촌·약 3m)했다”고 전했다. 이 범종은 현존하는 성덕대왕 신종(약 26t)의 4배 정도 된다.

황룡사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었다. <삼국유사>는 “643년(선덕여왕 12) 자장법사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사리를 세 곳(황룡사 목탑·양산 통도사·울산 태화사)으로 나누어 봉안했다”고 기록했다.

 

2만5000평에 이른 황룡사의 위용

황룡사와 목탑터 발굴은 1976년부터 시작되었다. 절터에 자리잡고 있던 민가 100여호를 매입해서 철거한 뒤 본격 조사를 벌였다. 발굴은 1983년 11월까지 8년간 연인원 7만8000명이 동원된 끝에 일단 마무리됐다.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이 정리한 자료

황룡사는 회랑까지 포함된 중심사역의 규모만 동서는 최대 270m(북쪽은 154m), 남북 186m에 달했다. 면적으로는 8665평이었다. 외곽을 포함하면 황룡사의 전체 규모는 더 엄청났다. 동서 약 281m, 남북 288m이고, 면적은 2만4480평에 이르렀다. 한변이 300m에 가까운 정사각 형태의 사찰규모라니 얼마나 대단한가. 절 내부에 조성된 주요 건물은 어떤가.

장육상이 들어서있던 중앙 금당(507평)과, 양 옆에 두 보살상을 모신 동서 금당(각 228평)이 확인됐다. 불경을 연구하고 논하는 강당(337평)의 모습도 드러났다. 9층 목탑터에도 건물(260평)이 보였다. 종과 불경을 보관한 ‘종루지·경루지’(96평)도 확인됐다. 사찰의 문인 중문터(102평)도 드러났다.

황룡사터에서 확인된 다양한 금동불상들. 출토된 유물 중에서 불상류기가 40여건 확인됐다. 574년주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장육상의 나발편을 비롯하여,수 십 점의 소형급동물상과 불상편들이 출토됐다.

황룡사 광장의 실체

황룡사와 관련된 발굴조사에서 특히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 있다. 황룡사 남쪽 바깥에서 확인된 광장이다. 이른바 ‘황룡사 광장’은 확인된 구간만 길이 280m×폭 50m 정도인데, 동궁과 월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경우 광장의 규모는 길이 500m×폭 50m(면적 7600평)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의봉 4년명(679년) 당 고종의 연호)’ 기와 등이 확인됐다. ‘의봉’은 당 고종(재위 649~683)의 9번째 연호(676~679년)이다. 따라서 ‘의봉4년’은 679년을 가리킨다. 따라서 광장의 최초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광장은 지금도 도로 포장 등에 쓰는 마사토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먹 크기의 냇돌과 자갈 등을 촘촘히 덮은 구조로 조성했다. 광장보다 더 남쪽에 조성된 주거단지와의 구분을 위해 설치한 담장도 보였다. 280m 정도 확인된 담장은 광장보다 60㎝ 정도 높게 조성됐다. 담장은 기와를 얹은 구조였고, 출입문도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발굴을 담당한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이민형 연구원은 “너비 1.5m의 담장은 동궁(월지)까지 500m 정도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황룡사 광장’의 규모는 도로를 제외한 광화문 광장(약 600m×60m) 보다는 약간 작다. 그러나 1300~1400년 전의 서라벌에 조성된 광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라 할 수 있다.

/  경향신문 2022.5 역사스토리텔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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