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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제주시

제주 산양읍-산양리 새신오름

by 구석구석 2014.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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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 산양리 '새신오름'

 

새신오름은 가마오름과는 불과 1km 정도 거리에 있다. 새신오름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이 오름에 새가 많이 날아와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한자 표기로는 조소악(鳥巢岳)이다. 또 신서악(新西岳)으로 불리기도 하나 이름의 유래를 알지 못한다. 오름 자체가 낮은데다(표고 141.5m·비고 40m 정도) 둥글 넓적하게 생겨 보기에는 오름다운 느낌을 별로 못준다.

 

오름사면에 나 있는 갱도 출·입구만도 30여 곳이나 돼 탐사팀을 놀라게 했다. 오름사면이 마치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형국이다. 제주도내 지하갱도를 대표하는 가마오름 갱도의 경우 입·출구가 24곳 정도 파악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갱도 입구는 대부분 큼직한 돌 등으로 막혀 있다. 이유는 이 마을 주민들이 방목중인 소가 자주 지하갱도에 떨어져 죽는 바람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막아버린 것이다. 이 곳 갱도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갱도 입·출구가 30여개 이상 된다는 것은 오름지하가 거미줄처럼 갱도로 연결돼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세 차례에 걸친 조사에서 탐사팀이 확인한 갱도는 길이 약 150m 규모의 갱도 2곳과 130m 규모의 갱도 1곳, 70m, 40m 규모의 갱도 2곳 및 10m 크기의 갱도 3곳 등 모두 8곳이다. 탐사팀이 확인한 갱도의 총 길이만도 600m 가까이 돼 입구가 막혀 조사하지 못한 갱도를 포함하면 새신오름 갱도의 규모와 길이는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이 지하갱도는 벽면에 갱목을 세웠던 홈이 원형그대로 남아 있어 주목된다. 갱목 홈은 15cm, 홈과 홈 사이의 간격은 40cm 정도 된다. 갱도 내부 벽면을 따라 갱목을 세웠던 홈이 일정간격으로 나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갱도내부의 갱목흔적 중 보존상태가 양호해 가장 원형대로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갱목흔적은 당시 갱도내부의 구조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갱도 내부를 밝히기 위해 등잔 등을 놓았던 홈도 뚜렷하다. 갱도만 판 것이 아니라 실제 갱도 내부에서 일본군이 주둔했음을 추측케 한다.

 

‘주저항진지’는 주력을 다하여 방어해야 하는 진지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새신오름 역시 일본군의 강력한 지하요새로서의 기능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 마을 주민 김원욱씨도 “새신오름 북쪽에 탱크부대가 있었고 기마병과 의무병도 함께 주둔했다”고 말해 많은 일본군이 이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 일대에 주둔했던 탱크부대는 1945년 6, 7월쯤 협재에서 기뢰공격을 받아 일본함대가 침몰할 때 출동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새신오름은 비교적 낮은 오름이지만 서남부 해안을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서 해안가인 한경면 고산리까지 거리는 6km쯤 된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최정예인 제111사단 예하 243연대는 가마오름·새신오름 일대에 주둔했다. 새신오름에는 기갑부대가, 후방인 원물오름·당오름에는 제111사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사령부주둔지 맞은편 도너리오름에는 포병부대가 포진한 형태다.

새신오름의 갱도는 길이가 10여m 내외의 짧은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입구가 복수로 나 있다.

 

새신오름 갱도의 옹기는 이 일대가 가마(窯)의 집산지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제주는 예부터 철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철의 대용으로 다양한 그릇·용기들을 만들어냈다. 그 시기는 고려시대 중기부터 제작됐다고 보기도 한다. 전통도기(陶器·甕器)는 그야말로 다양하게 제작됐다. 그 종류만도 1백여종이 훨씬 넘는다. 전통도기는 생활속의 다양한 용기에서부터 심지어 악기로까지 활용됐을 정도로 쓰임새가 많았다.

 하지만 도기는 아무데서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주섬 대부분의 토양은 화산회토로 철분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어 도기 등을 제작하는데 적합하지가 않다. 그런데 제주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도기를 만들 수 있는 점토가 분포한다. 새신오름이 자리한 한경면 산양·조수·고산리, 대정읍 신평·구억리 일대가 도기제작이 성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일대에서 가마작업이 제일 먼저 시작됐다. 이곳에는 7기의 가마(노랑굴)가 현재 남아있다. 제주도 전체적으로 가마터는 40여 곳에 이른다.

 이러한 가마는 1948년 발생한 ‘4·3’ 사건의 와중에 많이 훼손됐다. 마을이 없어지거나, 사람들이 떠나버리면서 그릇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자, 자연스레 가마는 폐요(廢窯)되거나 자연적·인위적 요인에 의해서 점차 훼손되고 잊혀지게 된다. ‘4·3’ 사건 이후엔 다시 가마제작이 반짝 성행했으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옹기의 수요가 줄면서 점차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있다.

 제주섬 어느 곳도 그렇지만 이 일대 역시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공간의 ‘4·3’까지 이어진 질곡의 역사를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한과 아픔이 온전히 배어있다.

 

 

한라일보 특별취재팀=윤보석·이윤형·표성준·이승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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