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777사령부 / 성남 분당
ㅇ 국방부 국방정보본부 직할의 정보기관으로 첩보부대로 사령관은 소장이며 국군의 신호정보의 수집·지원 및 연구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며 정보사와 함께 국방정보본부 직할에 속해있는 실무 사령부이다.
ㅇ 1956년 1월 10일, 한국과 미국은 한미정보공유협정을 체결하고 3월 27일에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777부대를 창설했다. 당시 규모는 200명의 부대원에 불과했다. 1959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으로 본부를 이전한 후 1979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로 본부를 다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ㅇ 미국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과 같은 역할을 한다.
ㅇ 훈련소나 신교대에서 신병교육을 마친 후 777사령부 배정 자원들은 각급 후반기교육부대에서 후반기교육을 받게되며 이때 성적이 높다면 포상휴가를 받을 수 있다. 후반기교육 수료이후 자대가 정해진다. 자대는 전국 방방곡곡에 위치해있다.
군대내부는 선진병영의 최고봉에 있으며, 부조리가 거의 없다시피하다. 다만 군생활이 아니라 거의 회사생활과 마찬가지라서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데 몸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ㅇ 780정보단
눈치보는 군 수뇌부 겨냥한 한철용의 ‘쿠테타’
6·29 서해교전과 기막힌 군사정보 유출 배후
10월4일 국방부 국정감사장에서 5679부대장인 한철용 육군 소장(韓哲鏞·제주 오현고-육사 26기 출신) 이 6월29일 일어난 서해교전(이하 6·29교전)과 관련해 “북한이 도발할 수 있다는 정확한 보고를 올렸으나,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이 묵살했다.
그런데 김장관은 기무사를 동원해 5679부대를 표적수사했다”고 폭로해 큰 충격을 주었다. 한소장의 발언에는 현정부의 대북정책을 뒤흔드는 ‘쿠데타적인 성격’이 깔려 있는 것 같았다.
며칠 뒤 한소장의 폭로에는 진급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또 5679부대와 정보사령부가 40일간 정보 교류를 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져 또 한번 국민들은 경악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군대를 믿고 국민들은 생업에 종사해도 되는 것일까.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만큼 이 사건 발생 경위와 원인을 뿌리에서부터 추적해 보기로 한다.
정보사의 모태 777부대
5679부대는 대한민국군 부대 중에서 부대 이름이 없는 유일한 부대다. 지금은 5679지만 얼마전만 해도 9125부대, 한때는 7235부대로 불렸다. 이 부대는 도깨비처럼 이름을 자주 바꾸는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부대명으로 나온 숫자를 더하면, 단(單) 단위는 항상 ‘7’이 된다는 사실이다.
5+6+7+9=27이고 9+1+2+5=17, 7+2+3+5=17이다. 왜 이 부대 이름의 숫자를 더하면 단 단위는 7이 되는가. 이 부대 통칭이 777부대기 때문이다.
777부대는 ‘스리 세븐 부대’로 불린다. ‘스리 세븐’이라는 명칭을 얻은 데는 사연이 있다. 이 부대는 한국군이 아니라 6·25전쟁 때 UN군 사령부 노릇을 하던 미국 극동군 사령부(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6·25전쟁중 미 극동군은 한국 민간인으로 구성된 KLO(Korea Liaison Office) 부대를 이용해 대북첩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한국군으로 편성된 대북첩보부대 창설을 준비했다.
미 극동군은 북한 지역에서 가장 왕성하게 유격전을 펼친 구월산부대(부대장 김종벽)를 백령도로 철수시켰다. 이 부대를 근간으로 1956년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에 대북첩보부대를 창설했는데, 이것이 777부대의 시작이었다. 777부대는 미군 예산으로 미군 장교가 지휘권을 행사하며 한국군 첩보요원을 양성했다. 미군도 아니고 한국군도 아닌 연합부대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777부대로 불리게 된 것이다.
777부대의 위세는 대단했다. 장교와 사병을 불문하고 부대원들은 권총을 소지했고 머리를 길렀으며 사복을 입고 다녔다. 당시 이러한 ‘위세’를 부릴 수 있던 부대는 이 부대와 CIC(지금의 기무사)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IC 요원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종종 신분이 노출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777부대원은 북한을 상대하므로, 국내에서는 요원들의 신분이 노출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상당기간 이 부대는 “그런 부대가 있다고 하더라”하는 ‘카더라’ 통신으로만 존재가 알려졌다.
‘천리안’과 ‘보이지 않는 손’
얼마 후 777부대에서 미군의 직접 지원 없이 한국군이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분야가 떨어져 나왔다. 이때 떨어져 나온 요원으로 창설한 것이 HID부대다. HID는 북파공작원을 양성해 북한군 지역으로 침투시키는 일을 주로 수행했다. HID는 국군정보사령부로 이름을 바꾸는데 전두환(全斗煥) 정부를 고비로 정보사는 북파공작원을 보내는 공작을 중단했다. 대신 과학 정보를 확대하는 쪽으로 주 임무를 바꾸었다.
오랫동안 미군은 U-2 고공정찰기와 KH-12 첩보위성 등으로 북한지역의 사진을 찍어왔는데, 이 사진 분석 임무가 정보사로 이관된 것이다. 정보병과 장교들은 전후방 각부대의 정보 참모로 나가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진 판독 임무는 주로 부사관들이 담당했다.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선발된 이들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는데 돌아오면 대개 준위로 진급해, 장기간 복무하며 사진 판독 업무에 종사했다.
사진판독관의 실력이 높아지자 정보사는 독자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업을 추진한다. 금강산 이남의 북한 지역을 촬영할 수 있다고 해서 지난 2000년 ‘금강’이라는 코드네임이 붙은 정찰기를 도입한 것이다. 미군의 U-2 정찰기는 대공미사일이 닿지 못하는 고도까지 날 수 있어 이따금 적 영공으로 침투해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금강정찰기는 터보 프롭 비행기라 대공미사일의 사정권 안에서 비행하기에 북한 지역으로는 침투하지 못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고도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정보적인 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휴전선 바로 북쪽을 찍은 사진의 해상도가 U-2기 사진보다 뛰어나다고 한다. 따라서 최근에는 미군도 금강정찰기가 찍어온 사진을 얻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에서 온 귀순자를 신문해 정보를 얻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북한으로 우회침투하는 공작도 활발하게 벌였다.
이로써 정보사는 명실상부한 한국군 최고의 정보부대로 발전했다. 한마디로 정보사는 멀리서 적진을 살펴보는 ‘천리안(千里眼)’과 ‘보이지 않는 손’으로 북한을 다루는 특수부대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777부대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사실 정보사가 충분한 실력을 갖고 있다면 777부대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주한미군은 독자적으로 501 정보단을 운영하므로, 정보를 교환할 필요가 있으면 한국군 정보사와 501정보단이 바로 교류하면 된다. 그러나 정보사의 출발점이 777부대에서 파생돼 나오는 형식이다 보니, 777부대도 ‘고유의 일감’을 확보하게 되었다. 신호정보 수집과 분석이 그것이다.
신호정보는 적지에서 나오는 방송이나 통신처럼 무선(無線)으로 나오는 모든 전파를 말한다. 가장 일반적인 신호정보인 공중파 방송은 TV 수신기와 라디오로 주파수만 맞추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는 주파수로 전파된다. 좋은 예가 휴대전화다. 휴대전화는 사적인 정보를 주고받는 도구라 통화내용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조사는 휴대전화에서 발신되는 주파수가 마구 바뀌는 시스템을 채택했다. 때문에 주파수를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곧 주파수가 변해버려서 쉽게 감청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파수가 변조되는 공식을 알면 충분히 감청할 수 있다. 군사용 무선통신 체계는 휴대전화보다 복잡하다. 군사용 통신은 일반인은 해독할 수 없는 암호나 음어로 대화 내용을 구성하는 데다 주파수 변조도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든다.
777부대가 운용하는 배두정찰기. 777부대의 감청능력은 상당히 뛰어나다고 한다.
777부대는 북한에서 나오는 수많은 전파를 잡아 주파수를 연결한 후 여기서 오고간 암호나 음어를 찾아낸다. 그리고 축적해온 노하우를 이용해 암호와 음어를 풀어 대화 내용을 복원해 낸다.
777부대도 정찰기를 운용한다. 린다김과 이양호(李養鎬) 전 국방장관 간의 스캔들로 유명해진 ‘백두정찰기’가 그것이다. 이 정찰기는 백두산 이남에서 오고가는 신호는 전부 수집한다고 해서 ‘백두’라는 암호명을 얻었다.
초기 777부대에서는 주로 미군이 암호를 해독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군 부사관들이 돌아와 해독에 참여했다. 이들은 북한군과 같은 한국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미군보다 해독능력이 뛰어났다. 이후 777부대에서는 미군보다는 한국군이 주류로 등장했다.
정보사가 ‘천리안’과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부대라면 777부대는 ‘큰 귀’와 ‘IQ가 좋은 두뇌’를 가진 부대다. 큰 귀와 좋은 두뇌를 이용해 777부대는 적지않은 전과를 쌓아왔다.
남북정상회담에 가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북한은 김대중 정부 때에도 적잖이 도발을 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 언론은, 지금과 달리 북한의 도발을 비중 있게 다뤘다.
1998년 10월20일 황해도 해주에서 나온 북한의 공작선이 야음을 틈타 강화도로 침투했다 해병대 2사단(청룡부대) 초병에게 발각돼 북한으로 도주한 적이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언론과 야당은 천용택(千容宅) 당시 국방장관을 공격했다.
강화도는 군(郡) 단위의 큰 섬인데 500명 남짓한 해병대 한 개 대대가 지킨다. 이는 해병대 2사단의 방어 지역이 육군 사단보다 현저히 넓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공작선 침투 사건 조사에 나선 합참은 ‘1개 대대가 강화도를 방어한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간첩선을 나포하지 못한 것만 문제삼아 대대장 김모 중령(해사 37기), 연대장 우모 대령(해사 30기) 등을 보직해임하고, 2사단장 손모 소장(해간 39기)은 징계위원회에 회부, 그리고 해병대 2사단을 작전통제하는 육군 수도군단장 홍순호 중장(洪淳昊·학군 4기·현재 육군 2군사령관)에게는 경고 조치를 내렸다.
해병대를 포상한 777부대
합참의 이러한 징계는 책임은 부하에게 넘기고 야당과 언론의 공격으로부터 천장관을 살려주려는 ‘떳떳치 못한 행태’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국방부와 합참의 결정에 항의하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후 777부대가 이 결정을 뒤엎는 조치를 취했다.
777부대는 ‘해병대 대대가 간첩선을 놓친 것은 간첩선을 추적할 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감청한 정보를 토대로 제대로 작전했다.
어쩔 수 없어서 간첩선을 놓친 것 외에는 상부 보고를 포함한 초동 작전을 제대로 추진했다’고 판단해, 간첩선을 발견했을 때 나오는 포상금을 받게 해주었다. 777부대는 ‘쟁이들’ 부대답게 장관이 어떤 결정을 내렸든 상관하지 않고 소신껏 판단하는 근성이 있는 것이다.
1998년 12월18일 북한 조선로동당 작전부는 전남 여수 앞바다로 반잠수정을 상륙시켰다. 그리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진운방’으로 위장해 침투해 있던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을 태우고 나가다가 해군에 발각돼, 다음날 광명함이 쏜 76㎜ 함포를 맞고 격침되었다. 해군이 반잠수정을 격침할 수 있었던 것은 777부대가 북한의 공작선 침투를 제대로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777부대는 신호정보 수집을 통해 북한의 공작선 한 척이 남포항을 빠져나와 중국 상해 앞바다의 한 섬에 들러 식량과 물을 보급받은 후 공해를 빙 돌아 전남 해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믐날인 12월19일 전후의 3일간(19일부터 21일 사이) 전남 해안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보고서를 제출했다(반잠수정이 침투할 때는 일체의 무선교신을 중단하므로 추적할 수는 없다).
육군 31사단은 이러한 정보를 받고도 반잠수정이 여수 해안에 상륙해 고정간첩을 태워 나가는 걸 놓쳤으나 다행히 해군이 발견해 격침시켰다. 반잠수정 격침으로 국회에 해임결의안이 제출되는 등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던 천용택 국방장관이 가까스로 살아났다.
1998년 12월31일 국방부는 여수 반잠수정 격침 사건을 기리기 위해 여러 부대와 장병을 포상했는데 이때 공작모선에서 나오는 전파를 정확히 추적했던 777부대의 미국인도 표창을 받았다. 실력 있는 사람이나 기관은 자존심이 강한 게 특징이다. 때로는 이 자존심이 ‘화(禍)’를 자초하기도 한다.
한국군이 정상적으로 발전하려면 777부대는 정보사에 통합돼, 정보사가 영상정보·인간정보·신호정보를 모두 수집·분석·판단하여야 한다. 그러나 두 부대가 각기 다른 영역을 갖고 병존(竝存)하다 보니 경쟁심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갈등은 부사관을 중심으로 한 전문가 집단에서 특히 강하다.
두 부대를 통합하면 지휘부를 구성하는 고급장교가 진출할 자리도 훨씬 줄어든다. 때문에 장교들도 내심 통합을 반대해, 두 부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심이 생기게 되었다.
6·29교전이 일어나기 전인 지난 4월에서 5월 사이 약 40일 동안 정보사가 777부대에 대한 영상정보 제공을 중단한 것도 바로 자존심 싸움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정보사가 일선 부대에 보낸 정보 중에서 일부 정보의 출처를 777부대로 밝혔기 때문에 일어났다.
정보의 세계는 매우 특이해서 정보를 찾아낸 사람은 밝히기보다는 감추는 것이 오히려 ‘영광’이다. 즉각 777부대는 정보사에 “왜 우리 부대를 출처로 밝혔느냐”고 심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기분이 상한 정보사의 실무책임자(대령)가 777부대에 온라인으로 항공사진 정보를 제공하는 KCITS(Korea Compressed Imagery Transmission System·한국영상전송체계)를 차단해버렸다.
신호정보 수집 전문부대라도 영상정보가 있어야 정확한 암호 해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부대가 어느 지점에서 나오는 특이한 신호를 잡았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이 무슨 전파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정보사에서 그곳에 북한군 함정이 있음을 확인해주는 영상정보를 제공하면, 신호정보 분석관은 해군 작전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해 암호를 빨리 해독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미군 첩보위성이 찍은 사진은 미 공군과 한국 공군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KCOIC(Korea Combat Operation Intelligence Center·한국전투작전 정보본부)를 통해 정보사에 제공되고, 정보사는 이 사진을 분석한 후 다시 각 부대에 전파한다. 정보사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미군에게서 제공받는 위성사진 분석자료도 제공해 주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교류 중단을 한철용 777부대장은 물론이고 정보사령관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두 부대장은 6월13일 북한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다음에야 이를 알고, 6월14일 부대 마찰을 봉합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여기서 두 부대장이 합의를 했는데도 정보사는 48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777부대에 대한 온라인 정보 제공을 재개했다. 두 부대에 ‘쟁이’가 많다 보니 이처럼 사소한 마찰도 극단적인 대립으로 확산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부대장도 모른 싸움
이러한 문제는 두 부대의 상급자인 국방정보본부장(중장)이 풀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국방정보본부장인 권영재 중장(權寧載·육사 25기)은 그럴 만한 조정능력이 부족했다.
여기에는 한국군의 고질인 인사 문제가 깔려 있다. 한소장이 폭탄 발언을 한 데는 그의 육사 1년 선배인 권영재 본부장 그리고 김동신 장관과의 깊은 갈등이 숨어 있다.
권영재 본부장은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할 때 ‘직위진급’을 했다. 직위진급 한 장교는, 지난 호 ‘신동아’가 ‘출신별 TO 할당과 직위진급 남발이 문제’ 기사에서 적시했듯이, 2년 후 전역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조건부’진급이다.
더구나 권소장이 직위진급한 후 맡은 보직은 777부대장이었다. ‘군인사법 시행령’은 777부대장을 직위진급자만 가는 보직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2년이 오기 전 권소장은 다른 보직으로 이동했다. 보직이 바뀌면 전역이 2년 연기되는 것이 군의 관례다. 그리고 다시 2년이 되기 전에 정보사령관에 임명돼 전역을 피하게 되었다.
반면 한철용씨는 일반진급을 했다. 일반진급한 장교는 이후 상위 계급으로 진급할 자원이므로, 대개는 진급 직후 지휘관 보직을 받는다. 소장으로 일반진급한 장교는 사단장으로 나가고 중장으로 진급한 장교는 군단장 보직부터 맡는 것이다. 한철용씨는 일반진급을 했기에 8사단장을 역임하고 이어 국가정보원의 국방보좌관을 지내고 777부대장으로 옮겨와 있었다.
지난 해 11월8일 발표된 군 정기인사에서는 육사 27기가 중장으로 진급해 군단장으로 나갔다. 그러니 이 인사를 앞두고 25기인 권영재씨나 26기인 한철용씨는 마음이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계급정년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정보병과에 할당된 유일한 중장 보직인 국방정보본부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노력했다.
승자는 권영재 소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장이 직위진급했기 때문에 중장도 직위진급하게 되었다. 한 사람이 두 번이나 직위진급을 하는 것은 특혜로 비칠 수 있다. 지난 해의 육군 인사는 ‘매우 이상’해서, 준장에서 소장으로 직위진급한 장교 중에 권영재·차형구·황진하씨가 다시 중장으로 직위진급하는 ‘혜택’을 누렸다.
일반적으로 준장에서 소장으로의 직위진급은 각군 총장이 결정하나, 소장에서 중장으로의 직위진급은 국방장관이 결정한다. 당시 육군 총장은 김판규(金判圭) 대장이고 국방장관은 김동신씨였다. 일반진급을 하고도 마지막 기회를 놓친 한소장이 섭섭한 감정을 느꼈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사실. 한소장은 권소장의 진급에 대해 전역서를 제출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보물선 인양사건으로 감정 상해
지난 해 정치권은 G&G 그룹의 이용호(李容湖) 회장이 주가를 올리기 위해 정관계를 상대로 광범위하게 로비한 사건이 터져 매우 시끄러웠다. 그런데 ‘이용호 게이트’에 신승남(愼承男) 검찰총장의 동생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여론은 서울지검 특수부와 대검 중수부의 이용호 게이트 수사를 불신했다.
그로 인해 올해 초 차정일(車正一) 특검팀이 구성돼 재수사에 착수했다. 이용호 게이트는 무척 범위가 넓은데 그중 하나가 보물선 인양과 관련된 정관계 로비와 주가 조작이었다.
1999년 12월 이용호씨는 진도 앞바다에 침몰해 있다는 구 일본군의 보물선을 건져 올리기 위해 이희호(李姬鎬) 여사의 조카인 이형택(李亨澤)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에게 “해군함정의 도움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형택씨는 이를 이기호(李起浩) 경제수석에게, 이수석은 국정원의 고 엄익준(嚴翼駿) 2차장에게, 엄차장은 국정원 국방보좌관으로 와 있던 한철용 소장에게, 한소장은 해군 정보작전참모부장인 오승렬(吳承烈) 소장에게, 오소장은 이수용(李秀勇) 참모총장에게 이야기했으나, 해군은 함정 지원을 하지 않았다.
차특검팀은 보물선을 인양하기 위한 ‘부탁의 고리’가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밝히려고 올해 초 777부대장으로 와 있던 한소장에게 출두를 요구했다. 한소장은 상급자인 엄익준 차장의 지시를 해군에 전한 것밖에는 잘못이 없었다. 또 장군이라는 체면이 있어 검찰 출두를 피하고 싶었다.
그는 김동신 장관이 국방부 차원에서 그를 보호해주리라 기대했으나, 김장관은 그러지 않았다. 한소장은 7시간 동안 차특검팀의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나왔다.
반면 해군의 오승렬 소장은 차특검의 소환을 받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한소장은 또 한번 감정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빵빵하게’ 부푼 풍선은 살짝만 찔러도 “뻥”하고 터져버린다. 김장관을 향한 한소장의 감정이 그런 상태로 치닫게 된 것이다.
비밀자료 ‘블랙북’
여기서 잠깐 한국군의 정보전달 체계를 설명한다. 정보본부는 777부대와 정보사 외에도 해외정보부와 군사부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777부대와 정보사는 대북정보만 주로 수집한다). 해외정보부는 외국에 나가 있는 무관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한다. 군사부는 대북정보가 아니라 전부대에서 일어난 정보를 다룬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정보융합처에서 합쳐진 후 추릴 것은 추려서 정보본부장과 합참의장, 국방장관 그리고 필요시는 대통령이나 국정원장에게까지 올라가는 일일보고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보고와 별도로 야전부대로 보낼 ‘블랙북(B/B)’을 제작한다. 블랙북은 사단장과 사단의 정보·작전참모, 그리고 사단 기무대장만 볼 수 있는 비밀 자료다. 정보본부에서 이 일을 하는 실무 책임자는 정보융합처장인 정형진(丁亨鎭) 육군 준장이다.
6월10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한국은 미국과 1 대 1로 비기는 바람에 16강 진출이 불투명해졌다. 6월14일로 예정된 포르투갈전에서 이겨야만 ‘고대하던’ 16강 진출이 확정된다. 온 국민이 16강 진출을 열망하던 11일 북한 함정이 서해 NLL(북방한계선)을 침범했다. 그리고 포르투갈과 시합을 하루 앞둔 13일 또 침범했다.
바로 이날 777부대는 북한군이 교신하는 것을 포착했는데, 그중 ‘여덟 자’가 이상징후로 판단되었다. 777부대는 정보융합처에 보낸 보고서에 ‘특수정보(SI·Special Intelligence)’로 불리는 문제의 여덟 자를 적시하고, 북한군의 NLL 침범은 △연례적인 전투검열 △월드컵 및 국회의원 재·보선과 관련한 한국 내 긴장 고조 △우리 해군 작전활동 탐지 의도 중 하나일 것이라는 판단 내용을 적었다.
그런데 다음날 정보융합처에서 제작해 야전부대로 전파한 블랙북에는 북한군의 NLL 침범 이유는 제1번이 단순침범, 제2번이 우리 해군의 대응태세를 떠보기 위한 것, 제3번이 북한 해군의 전투태세 검열로 적시되었다.
사단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야전부대에는 정보본부의 블랙북과 함께 777부대에서 발간하는 자료도 전파된다. 따라서 블랙북과 777부대에서 나온 자료는 13일 침범에 대해 같은 결론을 내고 있어야 한다. 정형진 처장은 국방부에 파견돼 있는 777부대 연락장교인 윤영삼 대령을 불러 “777부대는 정보본부의 판단과 같은 자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윤대령은 이를 777부대의 담당 처장에게 연락하였다.
정형진 처장은 왜 이런 부탁을 했을까. 이는 국방부 특조단(단장 金勝廣 육군 중장)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이날 정처장은 777부대의 판단을 존중한 블랙북을 만들어 김동신 장관의 결재를 받으려고 갔다. 그런데 블랙북 초안을 받아 본 김장관은, “블랙북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늘어놓는 식으로 만들면 예하부대가 혼란스럽지 않겠느냐. 똑바로 분석해 다시 보고하라”고 질책했다.
질책을 받고 사무실로 돌아온 정처장은 과장회의를 소집해, 블랙북 내용을 토론케 했는데 ‘장관에게 지적당할 소지가 있다’는 의견이 도출되었다. 이에따라 이미 블랙북이 전파된 곳에는 블랙북 내용을 수정하라고 지시하고, 전파되지 않은 곳에는 수정된 블랙북을 만들어 전달했다.
이런 사실을 털어놓은 정처장은 특조단에 “김장관이 블랙북을 수정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777부대의 국방부 연락장교 윤대령도 “정처장의 지시를 잘못 이해하고 777부대에 전달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
특조단은 김장관의 질책은 2번과 3번 판단을 삭제하고 단순침범을 1번으로 넣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조단은 “장관의 질책이 있더라도 777부대와 정보융합처는 적절한 판단보고를 올렸어야 한다”며 “두 부대는 업무과실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아무튼 블랙북 내용이 바뀌고 777부대에서 야전에 전파한 자료의 내용까지 바뀌면서 ‘풍선’은 더욱 빵빵해졌다. 월드컵 경기에서 선전을 거듭해온 한국은 25일 벌어진 준결승에서 독일에 1대 0으로 져 3·4위전으로 밀려났다. 결승 진출이 좌절돼 아쉽긴 했지만 4강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니 국민들은 매우 만족했다.
6월27일 단순침범 판단 문제
그 다음날인 26일 해군작전사령부는 해군 2함대에게 연평도에 고속정 1개 편대를 추가배치케 했다(평시에는 2개 편대 배치). 13일 침범에 대한 정보기관의 판단이 바뀐 데 따르는 우려와 월드컵 안전 등을 고려한 복합적인 조치였다. 해군작전사령부의 이러한 조치가 없었다면 6·29교전에서 해군 피해는 더 컸을지도 모른다.
2함대가 연평도에 고속정 한 개 편대를 추가 배치한 바로 다음날인 27일 북한 함정이 또 NLL을 침범했다. 이날 777부대는 북한이 의도적인 도발을 할 것을 암시하는 15자의 결정적인 SI를 잡았다. 777부대는 정보융합처에 보낸 일일보고에 이 SI를 적시했으나 북한 함정의 침범은 ‘단순침범으로 판단된다’고 적었다. 이것이 한소장 사건이 터진 후 한소장을 ‘거짓말쟁이’로 모는 결정적인 소재가 되었다.
이에 대해 한소장은 특조단 조사에서 13일에 있었던 블랙북과 777부대 자료의 수정 사건 등을 거론하며,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단순침범으로 판단된다고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일보고서에 15자의 SI를 실어 우리가 전하려고 하는 뜻이 무엇인지 밝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장관을 두둔하는 세력은 “15자 만으로는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다. 777부대가 생략한, 15자 전후에 있는 문장이 있어야 북한이 도발을 준비하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왜 777부대는 15자만 적었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자기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한미연합사도 동원했다. 한미연합사에도 777부대에서 작성한 일일보고가 전파되는데 거기에도 최종판단은 ‘단순침범’으로 돼 있었다. 김동신 장관 옹호세력의 주장은 15자가 있건 없건 777부대의 최종 결론은 단순침범 아니냐는 것이다.
특조단은 777부대가 15자의 특수정보를 적시한 것은 사실이나 최종판단은 ‘단순침범’으로 내림으로써 6·29교전 도발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28일 북한 함정은 또 NLL을 넘어왔다. 그런데 이날 1999년 연평해전에서 처절하게 파괴돼 예인돼 갔던 등산곶 경비정 684정이 연평해전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날도 777부대는 단순침범으로 보인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터키와의 월드컵 3·4위전이 예정돼 있던 29일 오전 또다시 NLL을 넘어온 등산곶의 684 경비정은 차단기동에 나선 해군의 357 고속정을 선제사격해 침몰시켰다.
6·29 교전이 일어나고 아군 피해가 생각 밖으로 큰 것으로 밝혀지자 복잡한 상황이 벌어졌다. 야당에서 진상조사단을 만들고 합참에서도 조사단을 만들어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북한 경비정이 선제사격을 할 것이냐는 북한군의 통신정보로 감청하는 신호정보만 판단해야 하니, 합참과 기무사는 777부대 조사에 집중했다.
누가 한소장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777부대는 기무사를 능가하는 자존심으로 뭉친 부대다. 이러한 부대가 부대 창설 46년 만에 ‘정신적인 라이벌’인 기무사의 조사를 받게 됐으니, 부대장 이하 ‘쟁이’들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7월10일 기무사는 정보본부장과 777부대장·해군작전사령관 등을 징계(경고 또는 보직해임)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
그러자 한소장이 전역지원서를 내며 “장관과 정보본부장·기무사령관이 짜고 나를 제거하려고 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한소장은 국정원의 국방보좌관을 지내 국방부 고위 인사에 관한 정보가 많다고 한다. 때문에 국방부 간부들은 중장 진급에서 ‘물을 먹은’ 한소장을 잘못 다루면 폭탄 발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 한소장 목에 방울을 달 것이냐?’ 주요지휘관 징계건은 싱겁게도 7월11일 김동신 장관이 이준 장관으로 교체됨으로써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한소장의 반발은 이때부터 준비되었다. 7월18일 그는 국방부 연락장교인 윤영삼 대령을 불러 6월13일 올린 777부대의 판단보고가 변경된 경위서를 작성케 했다. 그리고 기타 자료를 모아 이것을 공개할 날을 기다렸다.
777부대는 국방부 직속이지만,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고 업무 통제도 받는다. 국감이 열리면 777부대장은 국방위와 정보위에 모두 출석한다. 측근들에 따르면 한소장은 비공개로 열리는 정보위 국감에서 이를 공개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한편 육군 대장 출신인 한나라당 박세환(朴世煥) 의원은 이 시기 6·29 교전에서 당한 것은 군 지휘부가 ‘알아서 기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그 원인을 추적하고 있었다. 박의원이 이런 판단을 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2000년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이 있은 후 임동원(林東源)씨가 이끄는 국가정보원이 그해 10월20일 북한의 로동신문과 중앙방송이 요란하게 보도한 금강산댐(북한에서는 임남언제) 2단계 공사 완료 사실을 은폐했기 때문이다.
이날 북한 언론은 금강산댐을 88m 쌓아 올리는 2단계 공사를 완료하고 125m로 올리는 3단계 공사에 바로 돌입함과 동시에 담수에 들어갔다. 이러한 공법은 서방세계에서는 유례가 없는 매우 위험한 공법인데도 국정원은 ‘누구의 눈치를 보는지’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둘째는 6·15 정상회담 후에도 북한이 계속해서 북방한계선을 침범했는데 국방부가 이를 은폐했기 때문이다. 박의원은 북한 함정의 북방한계선 침범을 아이러니컬하게도 북한 방송을 통해 알았다.
정상회담 5개월 후인 2000년 11월15일 북한의 중앙방송은 “남조선의 해군 전투함정이 11월5일과 6일, 13일 그리고 14일에 우리측 영해에 대한 침범행위를 감행했다. …
서해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사태는 지난해 6월에 있은 서해사건(1999년 6월15일의 연평해전) 전야를 방불케 하고 있으며, 북과 남 사이에 6·15공동선언이 발표되고 군부 고위급회담(국방장관회담)까지 진행되고 있는 때에, 이런 엄중한 군사적 도발은 좋게 발전하고 있는 정세를 역전시키려는 남조선 군부의 고의적이며 계획적인 책동이다”라고 방송한 것.
북한 방송이 있자 합참은 “우리 함정은 북한 영해를 침범한 사실이 없다”고 짤막히 해명했다. 이때 박의원은 일단의 2함대 장교들로부터 “합참이 정말 웃기는 소리 하고 있다. 먼저 북방한계선을 넘어온 것은 북한 함정이다.
우리는 그들을 쫓기 위해 출동했다가,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합참은 우리 배가 넘어간 적이 없다고 엉터리 답변을 할 것이 아니라 북한 함정이 먼저 넘어왔다는 것부터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제보를 받았다.
국정원과 국방부의 ‘알아서 기기’
그후 박의원실은 정보를 더 수집해 “북한이 2000년에만 15번이나 북방한계선을 침범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제서야 합참은 “1999년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을 120회 침범했으나 2000년에는 12번밖에 침범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박의원은 국정원은 물론이고 국방부까지도 누군가를 위해 ‘알아서 기고 있다’고 판단했다.
남북정상회담 후 북한은 수적으로는 도발을 줄였는지 몰라도 질적인 면에서는 결코 도발을 줄이지 않았다. 그 좋은 사례가 정상회담 1년 후인 2001년 6월2일부터 17일 사이에 일어난 북한 상선단의 한국 영해 침범과 북방한계선 무단 월선 사건이다.
셋째 이유에 해당하는 이 사건은 일본 등에서 물건을 싣고 출항한 북한 상선이 한국의 영해인 제주해협을 통과해 동해와 서해의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한 항구로 들어가는 형태로 발생했다.
국제법은 사전 통보가 있을 경우 제3국 상선은 연안국의 영해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 조건으로 통과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無害통항권). 따라서 북한 상선도 사전 통보를 하면 한국 영해를 무해통항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남북은 분단 이후 정치적인 합의에 따라 쌀이나 구호물자 등을 싣고 간 일부 선박을 제외하고는 무해통항권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더구나 북한은 상선회사가 없이 국가기관인 무역성에서 상선단을 운영한다. 상선을 타는 사람은 대부분 군사칭호(계급)를 갖고 있어, 상선단은 제2의 해군 함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북한 상선단이 갑자기 무해통항권을 주장하며 영해를 침범했다.
북한이 이렇게 이상한 작태를 보이는데도 임동원 통일·한승수(韓昇洙) 외교·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과 신건(辛建) 국정원장·김하중(金夏中)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조영길(曺永吉) 합참의장이 모인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는 ‘민간선박일 경우 북한이 사전통보하거나 허가를 요청해 오면 사안에 따라서 NLL을 통과시키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합의를 도출했다(6월3일).
이러한 사실 때문에 6·29교전이 일어나자 박의원은 ‘군인들이 알아서 기느라 자신 있게 정보판단을 하지 않았고, 그것이 북한군의 선제공격을 허용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9월16일과 17일 박의원이 속한 국방위는 국방부를 상대로 국감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박의원은 한소장을 향해 “6·29교전 직전 북한군에 이상 징후가 없었느냐. 777부대는 제대로 판단했느냐”라고 물었다. 한소장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큰 목소리로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만 해도 한소장은 비공개로 열리는 정보위 국감에서 진실을 이야기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정보위는 야당의 홍준표(洪準杓) 의원과 여당의 천용택(千容宅) 의원 참석문제로 논란을 빚다가 국감 종료일인 10월5일까지도 열리지 못했다.
‘정보맨’인 한소장은 이러한 움직임을 살펴보며 애초 계획을 수정했다고 한다. 즉 10월4일 마지막으로 열리는 국방부 국감에서 질문이 있으면 자신의 정보를 공개하려고 마음 먹은 것이다. 이때쯤 박의원실 역시 한소장이 뭔가를 터뜨릴 것으로 짐작하고 10월3일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기자를 불러 6·29 교전과 관련해 모종의 사태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10월4일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는 이를 각각 1면과 사회면에 보도했다. 이렇게 사전에 예고된 다음에 국감이 열렸다. 그러나 국방부에서는 ‘풍선이 너무 부풀어 올라 스스로 터지려 한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인지, 그 누구도 사전에 한소장의 입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박의원이 한소장을 상대로 “777부대는 상급부대인 국방정보본부와 이견이 있었는가”라고 물었고 한소장은 “그렇다. 180도로 판단이 달랐다”며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다. 이것이 한소장 폭로가 터져나오게 된 전말이다.
징계 결정한 특조단
특조단은 777부대가 6월27일의 침범을 단순침범으로 판단한 것을 꼬투리잡아 “과오가 드러난 권영재 정보본부장·한철용 소장·정형진 정보융합처장. 윤염상 대령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전장관에 대해서는 어떠한 혐의점도 어떠한 징계도 부여하지 않았다. 특조단의 이러한 판단은 과연 옳은 것일까.
한소장 사건이 시사하는 것은 상당히 많다. 첫째 정보사와 777부대 간의 라이벌 의식이다. 정보통들은 “이 문제는 두 부대를 정보사로 통합하는 것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국군의 정보 수집과 분석 능력이 발전한 지금, 두 부대를 따로 운영할 이유가 없다. 미군과 정보교류는 통합된 한국군 정보사가 KCOIC나 미군의 501정보단과 교류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군의 고질인 직위진급 문제다. 한소장 사건은 두 번에 걸친 권영재 정보본부장의 직위진급과 연관이 있으므로, 당시 인사권자인 김동신 장관이 제대로 인사를 한 것인지를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
10월4일 한소장이 국감장에서 흔든 777부대의 일일보고서는 현장에 있던 MBC와 YTN의 ENG카메라에 글자가 찍혀 방송되었다. 직위진급제도 개선과 함께 국방부는 한소장이 군 비밀을 공개한 것과 명령체계를 어긴 부분에 대해서도 엄격히 조사해 처벌해야 한다. 병사들에게는 말끝마다 ‘통신보안’을 강조하는 장군이 방송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 군사 비밀을 공개한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셋째로 가장 심각하게 살펴야 할 것은 최고 지도자가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한 방향을 지향할 때, 정보기관까지도 ‘알아서 기는’ 자세로 정보판단을 몰아주려는 경향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돌이켜 보면 큰 사건은, 정보가 없어서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입수한 정보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일어났다.
리멤버 357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선 부대는 물론이고 백선엽(白善燁) 소장-남로당 사건으로 불명예 전역한 박정희(朴正熙) 문관-김종필(金鍾泌) 중위를 주축으로 한 육군본부 정보국은 ‘인민군이 전쟁을 도발할 것 같다’는 정보를 수도 없이 올렸다. 그러나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을 중심으로 한 육본 수뇌부는 이를 무시했다. 그래서 6·25전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전쟁 전에 5열이 군 수뇌부에 침투해 있었던 것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1941년 12월 미국이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을 허용한 것도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정보를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지난 해 9·11테러가 있은 후 ‘FBI와 CIA에서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 보고했는데 상부에서 이를 무시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6·29교전도 정보가 없어서 당한 것이 아니다. 정보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상층부의 태도 때문에 357고속정은 무방비상태에서 선제공격을 당했다.
지난 8월21일 해군은 6·29교전 때 침몰한 357고속정을 인양했다. 예상했던 대로 고속정은 포탄을 맞아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처참한 상태였다. 6·29교전에서부터 한소장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경위에 정통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357 고속정을 국방부청사 한가운데에 ‘리멤버 357’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하라. 북한군의 도발을 잊지 않기 위해 고속정을 전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군 지휘부가 객관적으로 사태를 보지 못할 때, 입버릇처럼 ‘통신보안’을 외치도록 훈련된 병사들이 타던 배는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리자는 것이다. 이렇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도 ‘알아서 기는’ 장교가 있다면 그가 바로 군복을 벗어야 할 사람이다.”
글: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대우> hoon@donga.com
발행일: 2002 년 11 월 01 일 (통권 518 호)
'군사 안보 > 육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8기계화보병사단 8기보사단 오뚜기부대 1기갑여단 (0) | 2018.12.28 |
---|---|
보병5사단 수색대대 비마수색대 (0) | 2018.12.27 |
한국 보병2사단 노도부대 비호수색대대 스키부대 (0) | 2018.12.21 |
1사단 전진부대 수색대대 (0) | 2018.12.20 |
저격수 sniper 명사수 (0) | 2012.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