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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서울 동대문-청량리 세종대왕 청량사

by 구석구석 2009.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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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157 세종대왕기념관 02-969-8851~3  

 영휘원(홍릉)과 홍릉수목원의 임업연구원사이에 위치

 

[일대기실]
세종대왕의 어진, 왕자시절의 독서도, 즉위도, 대마도 정벌도, 주자소도, 집현전 학사도, 지음도, 서운관도, 육진개척도, 이만주 정벌도, 측우기도, 훈민정음 반포도, 전제상정도, 내불당도, 강무도 등 15폭의 그림 진열

[한글진열실]
세종대왕 때 지은 《훈민정음》을 비롯한 《용비어천가》,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등의 간행도서, 세종 이후의 간행도서, 옛활자 관계도서, 한글기계화 자료(타자기), 한글 글씨 병풍 등 진열

 

불교의 선종을 중히 여기는 경전으로 석가가 능엄경을 설법하여 음란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제일계로 삼고 있는바 능엄경은 중용보다 낫다고 함으로써 법문의 진수라 하겠음 ·조선 제7대 임금 세조가 한글로 토를 달고 (세조8년 1462년) 왕사 신위의 도움을 받아 한계희, 김수온이 번역한 불교 경전의 최초 언해본임 ·불교용어(한자)에 대한 한글풀이를 하고 있으므로 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임.

 

 

고려말 명승 보제존자 나옹화상이 충정왕 2년(1350)에 원나라 고승 몽산화상 덕리를 찾아보고 돌아왔는데 이때 나옹화상이 법어를 약록하여 온 것을 추후 엮은 책으로 보통 몽산법어약록이라 부름 ·조선조 제7대 임금 세조때 명승 혜관존자 신위가 왕명을 받들어 한글로 토를 달고 언해함 ·몽산화상의 법어 6편과 나옹화상의 법어 1편으로 모두 7편임 ·불문에서 많이 즐겨 읽는 책으로 여러번 중형 및 복각되어 세상에 널리 퍼졌음 ·초판의 간행연도는 아직까지 확실치 않음.

[과학진열실]
세종시대의 활자조판 인쇄과정을 재현한 것을 비롯하여 측우기, 아부일구(해시께), 일성정시의, 천체관측기 등의 발명품과 별자리 그림인 천상열차분야지도(석각), 도량형, 12율관, 동국지도, 총포, 돈, 한의학기구 등 진열

[국악진열실]
세종 때 정비된 각종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의 국악기 70 여점과 악사복식 및 무용 복식, 진연청도 등 진열

[옥외 전시]
세종성왕 기념탑, 수표석, 알부일구(해시계), 측우기, 누각(물시계), 세종대왕신도비 및 구 영릉 발굴 석물(문인석, 무인석, 석마, 석양 석등) 등 전시  

 

청량리1동 61 천장산 청량사 02-966-2192

북한산에서 뻗어 서울의 동쪽 외곽을 에워싼 한가닥의 산줄기 중간에 자리한 회기동과 청량리동에 걸쳐 천장산이 있다.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의 상량문’에 따르면 “진여불보(眞如佛寶)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시방삼세에 두루 하지만 드러나 보이지 않으므로 가람의 뒷산을 ‘천장산’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불교사찰의 입지유형 가운데 가장 빼어난 명당터로서 “하늘이 숨겨놓은 곳”이라는 산이름을 얻었다.

 

청량사(淸凉寺)는 천장산(天藏山) 남쪽 기슭에 자리한 비구니 도량이다. 예부터 4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한 돌꽂이 승방이 바로 이 곳이다. 원래 청량사와 돌꽂이 승방은 별개의 절이었으나, 1895년 일제의 조선강점흉계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황후의 능인 홍릉이 조성케 되자 홍릉자리에 있던 청량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게 되었고, 때마침 돌꽂이 승방도 사세가 기울어 두 절이 병합되었다고 한다. 
 

 청량사는 한말에는 도성 사람들이 자주 몰려와 쉬던 휴양지였고, 일제 치하로 나라가 어려웠을 때는 많은 애국지사, 고승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과 불교운동에 앞장선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한때 청량사에 머물렀다고 하며, 1939년 7월 12일에 한용운 선생의 회갑연이 이곳에서 조촐하게 열렸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불교계 학자인 박한영도 이 절에서 기거했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판 글씨는 박한영의 글씨로 전해진다. 청량사는 회한의 역사 속에서 위법망구의 불심으로 도량을 가꾸어온 비구니대중스님들을 보듬어 안고 오늘도 대자대비의 원행으로 도심 속에 회향하고 있다.

 원래 지금의 홍릉 자리에 있었던 청량사는 1895년 일제의 조선강점흉계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정변 이후 청량사터가 명당의 정혈이라 하여 황후의 능인 홍릉이 조성케 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돌꽂이절인 석고사를 청량사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지금의 홍릉자리에 청량사가 표시되어 있고, 현재의 임업시험장 자리에는 돌꽂이절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원래 청량사와 돌꽂이절은 별개의 사찰이었으나 홍릉조성으로 청량사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고, 돌꽂이절 또한 폐사되면서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청량사는 1890년대를 기점으로 신명을 다바친 비구니 스님들의 큰 원력에 의해 본격적인 중창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1894년 돌꽂이절에서 남채백 비구니 스님이 법당과 칠성각을 청량사로 옮겨 대니승방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이후 김봉학, 신자영, 장동일, 정부연, 신원삼 비구니 스님들의 연이은 불사가 이어졌다.

 

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발전에 필요한 고급인재를 양성하고 기초 및 첨단과학을 연구하는 연구중심의 대학.
1971년 특별법에 의거, 설립된 한국과학원이 전신이며 198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통합하여 한국과학기술원으로 발족하였다가 1989년 연구부문이 독립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되고, 교육부문은 '한국과학기술원'으로 다시 설립되었다. 1989년에는 한국과학기술대학과 통합되어 체계적이고 일원화된 과학영재 교육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한국개발연구원

경제발전 및 사회발전에 관련된 사항을 조사·연구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1971년 설립되어 국민경제의 발전 및 이와 관련된 제부문의 과제를 현실적으로 연구, 분석함으로써 국가의 경제계획 및 경제사회 정책수립에 기여하고 있다.  

 주요 업무는 국민경제사회발전에 관한 조사 연구, 중장기 경제예측 및 계획에 관한 기초연구와 정책수단의 개발, 국내외 연구기관과의 공동연구, 연구용역의 위탁과 정부용역의 수탁, 연구결과의 출판 및 발표, 국내외 공무원 및 기타 단체직원의 경제교육 등이다. 연구방향 및 연구과제 선정 등의 문제는 연구자문위원회가 자문하고 있다.

 

청량리동산5-7 한국국방연구원

국방정책 대안을 개발하고 국방자원관리 방책을 연구하는 전문 연구기관.
국방정책·전략환경·국방경제 등의 정책기획, 군사전략·전력구조·전략평가 등의 전략발전, 무기체계·군사기술·군수지원 등의 군수관리, 인사, 교육훈련, 병무관리 등의 인력관리와 전산정보에 관한 연구 등 국방문제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여 국방 정책 결정에 자문을 제공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하고 있는 연구기관으로 자주국방태세 확립과 효율적인 국방자원관리에 기여하고 있다.

산업연구원

산업·무역 및 기술에 관련된 국내외 동향과 정보를 조사·연구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1982년 1월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와 국제경제연구원을 통합하여 재단법인체로 발족되었다가 1984년 산업연구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연구원의 설립목적은 산업·무역 및 기술에 관련된 국내외 각종 정보를 신속 수집, 조사, 연구하여 이를 널리 보급, 활용하게 함으로써 기업의 국제 경쟁력 제고와 국가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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