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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서울 한강

서울 성동-옥수동-옥수역 미타사

by 구석구석 2009.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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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동 395번지 미타사 (彌陀寺) 02-297-1992 

옥수현대아파트입구 방향 

 

미타사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395번지 종남산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교구인 조계사의 직할사찰이다
미타사는 옥수동 395번지 달맞이봉 아래 위치해 있다. 원래는 종남산 동족 기슭에 있는데 옥수동에 있던 메주가마를 자하문 밖으로 옮겨가매 사람은 적고 도둑이 많으므로 절을 이곳에 옮기고 절 이름을 종남산 미타사라고 고쳤다. 또 두뭇개에 있으므로 두뭇개승방이라고도 하였다. 고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다녔다고 한다.

 

성동구 명소10선 독서당터

 

옥수동 244번지 동쪽에 있었던 독서당은 세종 8년(1426년) 집현전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사가 독서를 하게 한 것이 그 효시였다. 독서당원은 한 번에 평균 6명 정도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당원으로 선발되는 과정이 대단히 엄격하였다. 국가의 권장과 큰 관심으로 학문에 정진한 당원 중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독서당의 권위는 대단하였다. 여기에서 배출된 유명한 인재 중에는 신숙주, 성삼문, 권채, 박팽년, 서거정, 유성원, 정인지, 이승조, 강희맹 등이 있다.

 

율곡 이이의 「동호문답」이 동호독서당에서 저술된 것으로 보여지며, 현재는 독서당고개 라는 지명만 남아 있으며, 특히 독서당길은 여기에서 유래된 도로명이다.

 

동빙고터

조선왕조에서는 한양 천도 이래 태조5년 예조의 속아문(屬衙門)으로 한강변 두뭇개에 동빙고를 설치하고 그후 다시 4.7Km 떨어진 둔지산(芚芝山) 기슭 한강변에 서빙고를 두어 해마다 한강에 얼음이 얼면 그것을 떠다가 저장하였다.

동빙고의 얼음은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등의 제사에 쓰게하고 서빙고의 얼음은 궁궐이나 백관들 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빙고가 자리하던 터전은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8번지이며 이곳의 관아에는 일찍이 옥호루(玉壺樓)가 곁들여 있어서 이채로왔다고 한다.

지금도 옥수동 8번지를 그곳 주민들은「핑곳골」,「빙곳골」,「빙고동」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제사에 쓰이는 얼음을 저장하던 동빙고에는 해마다 12월에 얼음뜨기를 시작하여 10,244丁의 얼음짝을 저장하였다.(서빙고는 규모가 훨씬 커서 134,974丁을 저장할 수 있었다.)

한편 한강에 얼음이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이만한 양의 얼음을 깊은 산골짜기에서 떠다가 대치해야 했다.
그리하여 이곳 동빙고의 얼음을 이듬해 3월 1일 부터 출하를 시작해서 10월 상강(霜降) 때에 그 해의 공급을 끝매듭지었다.

이곳 동빙고는 연산군(燕山君)이 두뭇개를 임금의 전용 놀이터로 삼을 때 그 구획 안에 들었기 때문에 왕 10년(1504) 10월에 서빙고로 옮기어 지은 일이 있어 그 후로 영영 폐지되고 만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듯 하나,
훨씬 후대인 肅宗朝(숙종조)의 김창흡(金昌翕)의 시에

    ... 산더미 같은 얼음장
    강뚝 10리 떨어진 두 빙고에 두네 ...

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동빙고와 서빙고가 서로 10여리 떨어져서 장관을 이루었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漢京識略(한경식략)』이나 『東國輿地備考』등에도 동빙고에 「옥호루」가 있어 명승으로 친다고 밝히고 있어 고종(高宗) 때까지도 동빙고가 두뭇개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光武(광무) 2년(1898) 폐지되었다.

 

사한단터

 

두뭇개에는 동빙고와 아울러 북쪽 산기슭 어저리에 사한단이 있었는데, 「용재총화」에 의하면 "司寒壇이 동빙고에 있어서 얼음을 뜰때면 날씨여!제발 추워지소서 하고 빌며 제사를 지냈다" 한다.
漢京識略(한경식략)'에 따르면 해마다 12월이면 郞官(낭관)이 이곳 사한단에서 물과 비의 신(神)인 玄冥氏(현명씨)에게 제사를 드리고 비로서 한강에서 얼음을 뜨기 시작하여 빙고에 저장하였으며
또 춘분에 開氷祭(개빙제)를 드린 후에 종묘 사직 등 제사지내는 곳에 얼음을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사한단에서는 날씨가 호되게 추워지기를 비는 祈寒祭(기한제)도 지냈다.

 

成宗(성종) 17년(1486)에 12월이 되도록 날씨가 유난히 포근해서 얼음이 얼지 않자 이곳에서 기한제를 지냈는가 하면 英祖(영조) 45년(1769)에는 기한제를 지낸 직후에 얼음이 꽁꽁 얼었기에 제관 들에게 상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태조는 즉위 3년(1394) 아직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전에, 이곳의 고려이궁을 객사로 삼고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 동교에 나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는데 , 이 때에 응봉에서 활을 쏘았던 바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포 도요연에 떨어졌으므로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태조는 다음해 3월 한강위 곧 지금의 응봉기슭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을 설치하였다. 한편 살곶이벌은 국왕의 군대사열장으로도 이름났던 곳이었다.

 

두모포」는 현재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으며 도성동남쪽 5리 쯤에 있었던 나루로 두뭇개, 동호(東湖)라고도 하였다. 동쪽에서 흘러나오는 한강의 본류와 북쪽에서 흘러오는 중랑천이 합류되므로 두멧개, 두물개, 두뭇개라 하여 붙여진 명칭인데 그 두뭇개가 한자음화하여 두모포가 된 것이다.

앞이 탁 트인 한강 상류에는 저자도가 있고 강건너 서쪽에는 압구정이 잇으며 동쪽으로는 봉은사 뒷산인 수도산이 있어 근경을 이루고 원경으로 동쪽에 남한산, 남쪽에 청계산이 자리잡고 있어서 용산의 남호, 마포의 서호와 더불어 여기를 동호라 하여 옛사람들이 즐겨 술마시고 시를 읊고 하였다.

 

선박의 강변에의 접안이 용이하여 일찍부터 사사로이 나룻배가 운행되어 강건너 강남구 압구정동 방면으로 행인을 건네 주었다고 보이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조운(漕運)의 편의를 위한 나루터로 이용하였다.

즉, 경상도.강원도 지방에서 남한강을 경유하여 오는 세곡선을 두모포에 집결시켰다.
그것은 곧 용산포(龍山浦)로 이설되었지만, 두모포는 그후 이곳에 빙고(氷庫) 가 설치되면서 얼음을 나르는 배들이 집결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이 나루에 나루의 옛 이름을 딴 동호대교가 설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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