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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전라남도

화순 동면-서성리 오성산

by 구석구석 2009.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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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너릿재 터널을 지나 화순읍까지(국도22,29호선)온 후 벌교.고흥방면으로 가다보면 만연리 고인돌이 있다. 이 고인돌에서 전남대병원, 수자원공사, 양계단지 방향으로 가서 삵재를 넘으면 좌측에 양계단지가 있고 오른쪽으로 오성산성에 오르는 임도가 있다. 임도정상에 산성안내판이 있고 안내판이 있는 산 정상쪽으로 오르면 산성이 있다.

 

화순군 동면 서성리, 백용리, 화순읍 일심리 일대 / 오성산성

 

화순읍과 동면의 경계인 오성산에 있다. 정유재란시 최경운과 화순향민들이 왜적을 맞아 전투를 벌이던 격전지이다.산정에는 최경운 전망유허비가 있으며 많은 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고 있다. 성터의 흔적은 동남쪽으로 축성한 것이 보이나 남아있는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화순현의 주성으로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성산성은 오성산을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는 동면 서성리 오성마을이 있고, 남으로는 동면 백용리 백동마을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화순, 동쪽으로는 동면 서성리가 있다.

오성산성은 해발 290.4m 높이의 오성산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테뫼식 산성이다. 산성의 전체연장길이는 1/5,000지도를 이용한 실측에 의하면 약 650m이고, 경사도를 감안한 실제거리는 약 675m 내외로서 작은 규모이다. 성벽은 능선이나 절벽을 이용하고 있는데 해발 250 ~ 275m 일대에 위치하고, 대부분의 주변의 돌을 가공하여 축조하였다.

동벽은 능선 사면을 이용한 것이다. 산경사면을 깍아낸 후 자연석을 가공하여 축조하고 있다. 성벽은 경사면을 깍아낸 후 한쪽만을 축조한 편축 벽이다. 성벽은 임도를 만들면서 크게 훼손되어 있는데 성돌들이 능선상에 산재되어 있고 성벽단애면에는 기와와 토기편이 산재되어 있다.

남벽은 건물지 앞의 능선사면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있다. 성벽은 내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4~5단의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있다. 남벽의 일부는 산경사면을 깎아낸 후 양쪽에 돌을 축조한 협축인데 성돌은 자연석을 가공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 하부에는 큰 돌을 놓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하고 있다. 큰 성돌 사이에는 잔자갈을 끼워 놓어 성벽을 보강하고 있다.

서벽은 능선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있다. 가파른 능선을 깎아낸 후 자연석을 가공한 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고 있다. 성벽은 현재 노출되어 있지 않지만 능선상에 산재되어 있는 돌로 보아 성벽이 매몰된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는 능선을 따라 돌아가는 산성의 연결선만 추정할 수 있다.

북벽은 가파른 능선과 절벽을 이용하고 있다.가파른 능선을 다듬은 후 부분적으로 성벽을 쌓고 있는데 자연지세를 잘 이용하고 있지만 대부분 훼손되어 있다.

 

건물지는 남벽 안쪽 능선사면에 있는데 해발 250m 지점에 해당된다. 능선이 내려오다가 비교적 평탄한 면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는 민묘들이 자리잡고 있지만 주변에서 많은 기와편과 토기편이 수습되어 원래는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지 범위는 40 x 10m의 반원형을 띠고 있으며 앞에는 길다란 석축이 조성되어 있다.

산 정상부에 전적비가 있다. 전적비는『진사최공경운전망유허비(進士崔公慶雲戰亡遺墟碑)』로 숭정 오년 경인 십이월(崇禎 五年 庚寅 十二月) 세워졌다고 새겨져 있는데 숭정 오년 (崇禎 五年)은 1632년이고 경인년(庚寅年)은 1650년,1710년 등이어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기념비의 내용은 최경운이 선조 임진년에 난이 일자 두 아우와 상의하여 의병청을 화순 삼천리에 설치하고 고경명, 박광옥 등에게 글을 보내 의병 천여명을 모았으며 큰아들은 금산으로 보내 고경명을 돕게 하였다는 것이다. -ⓒ 마운틴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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