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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남도

태안 소원면-소근진마을 소근진성

by 구석구석 2008.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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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호가 10여채로 변해버린 소근진 마을

이 마을은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1만호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 정도로 크게 번성한 곳이었다. 군사적으로는 왜적을 막던 요충지요, 경제적으로는 조곡을 실은 세곡선이 서울로 통하는 해상 교통로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육상 교통이 점차 발달함에 따라 본래의 기능이 사라지고 급기야는 면단위에서 리단위로 전락하는 처량한 신세가 된 마을이다.

 

 

대소산과 천마산 사이에 깊게 파인 V자형의 만입된 곳에 나지막한 산들과 섬들이 포구를 감싸듯 입구를 에워 싸고 있어 선박들이 은닉하기에 안성맞춤이고 원북, 태안 등을 통하여 육지와 연결되는 육상 교통의 기항지로서 손색이 없던 곳이었다.

 

이런 이유에선지 이곳을 가는 길은 여러 갈래 길이 있고 이곳에서도 만리포, 천리포 등의 서부지역과, 원북면 신두리ㆍ학암포 등의 북부지역,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인 태안지역으로 쉽게 나갈 수 있다. 소원면 소재지에서 우회전하여 신덕ㆍ영전방향으로 6.5km를 가면 소원초등학교 소근분교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비포장 도로로 3km 쯤을 더 가면 소근진성 서문쪽에 다다른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역사속의 관문이지만 마을의 형태로 보아 성문의 규모나 모습 등을 짐작할 수 있다. 걸어서 언덕 쪽으로 100여m를 가다보면 산의 8부능선쯤에 동문터와 함께 높이 4m 남짓한 성곽이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참사루, 염파루라는 관사가 있었다는 서북쪽에는 집터였음을 말해주듯이 대나무만 무성하게 자라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소근리 소근포진성

소근포진성은 소원면 소근리의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조의 중종 9년(1514)에 축조된 석성으로서 그 둘레는 656미터이며 높이는 3.3미터이다. 이곳에 축성하게 된 동기는 침입해 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서였다. 특히 고려말기부터 더욱 심하게 나타난 왜구로 인하여 연안의 주민들이 약탈을 당하고 심지어 피살되는 등 그 참상은 형언할 수 없었다.

고려의 31대 공민왕 22년(1373)에는 왜구의 침입이 몹시 혹독 하여 태안 군수가 겨우 한 두명의 아전을 데리고 서산군에 붙임으로서 결국은 태안군이 폐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왜구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군이 폐군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침략상이 잔악하였음을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태안군이 폐군된지 무려 66년 뒤인 세종 21년(1439)에 새 공관을 짓고 김흔지군수가 부임 하였다. 그후 75년에 소근포진성이 축성 되는데, 이는 태안군이 폐군된지 무려 141년 뒤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해적의 방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 말기인 1350년대 초기부터 1380년대 중엽까지 무려 10여회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받은 것이다. 이 소근포진성은 당시의 유일한 태안군의 진성으로서 외적 방어에 최선을 다하여 오다, 1894년 동학혁명 때 폐성 되었다.

 


현재 성벽일부만 남아있고 또한 성내에는 대여섯 채의 민가가 지난날의 역사의 흔적을 외면한채 한가롭게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 소근포진성은 소근포에 축성된 성이므로 편의상 소근포란 지명을 붙이어 그대로 소근포진성이라 호칭하였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민들 사이에선, 이를 줄여서 통칭 소근진성 또는 소근성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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