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암은 해인사 맞은 편에 있는 봉우리, 비봉산 중턱에 있다. 산 모양이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비봉산이다. 처음에는 암자 이름도 봉서사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왕실의 원당(願堂)이 되자, 그때부터 원당암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원당이란 '소원을 빌려고 세운 집'이란 뜻이다. 다른 나라에서 도래한 불교를 기복신앙으로 만드는데 앞장선 것은 왕실이었다. 그리고 불교는 그것을 기꺼이 '호국'이란 이름으로 포장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종교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토착화할 줄 아는 포용력을 지녔다. 그러나 '토착화'의 귀결점은 기복신앙이다. 그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가졌던 삼신 신앙에서 단 몇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종교의 원시성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원당암 가는 길 / 안병기
<삼국사기>는 애장왕 3년(802)에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애장왕은 사랑하는 공주의 불치병이 낫자 그것을 부처님의 가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순응·이정 스님의 발원에 따라 가야산에 해인사를 지은 것이다. 공사 진척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에 적당한 곳이라 판단했던 것인가. 해인사를 짓기 전, 맞바라기 산자락에다 먼저 암자를 지었으니, 그게 바로 이 원당암이다.
주불전인 보광전 / 안병기
염화실/안병기
혜암스님의 유품과 사리를 전시해 놓은 사리굴 / 안병기
미소굴 왼쪽에 서 있는 통나무에는 '공부하다 죽어라'는 스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스님이 남기신 사리보다 더 영롱한 말씀이다.
미소굴에서 바라보는 풍경 멀리 가야산이 보인다/안병기
혜암(1920~2001) 스님은 1920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셨다. 27세 때, 해인사로 출가하여 인곡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듬해(1947)엔 성철·우봉·자운·도우·법전·일도 스님 등과 함께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에 참가하였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 선원· 범어사 금어선원· 안정사 천제굴· 설악산 오세암· 오대산 북대· 통도사 극락암 선원 등을 두루 거치면서 참선 수행에 온 힘을 쏟았다. 1991년 봄부터 이곳 원당암에 안거하시면서 사부대중을 지도하시다가 1999년에 이르러 조계종 제10대 종정으로 추대되셨다. 그리고 2001년 12월31일,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신 채 적멸의 길로 떠나셨다. 법랍 55세, 세수 82세였다.
시민선방인 달마선원/안병기
선방 옆 산자락엔 시누대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응달이라 그런지 이곳엔 아직 눈이 남아 있다. 하얀 눈에 둘러싸인 푸른 숲. 처음에는 차밭인가 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바라보니, 시누대숲이었다. 3월이지만, 아직 물러가지 않은 겨울의 뒷모습. 흰 눈에 갇힌 푸른 빛은 얼마나 희귀한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쾌해진다.
선방위의 시누대밭과 김치독/안병기
절집은 변해가는 세월 속에서 아직도 고향의 냄새를 간직하고 있는 드문 장소이다. 어쩌면 내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절집을 만행(萬行)하는 것은 그 잃어버린 냄새를 맡기 위함인지 모른다. 원당암을 등 뒤에 남겨둔 채 터덕터덕 산기슭을 내려간다. 맞은 편 산봉우리 위에 떠 있던 구름도 봉우리를 떠나간다. 저 구름은 해인사를 탐방하러 온 길이었던가. ⓒ 2008 OhmyNews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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