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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남도

합천 야천리 용탑선원 홍제암 가야산 각사마을

by 구석구석 2008.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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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용탑선원

 

해인사 일주문앞 삼거리에서 용탑선원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1945년에 창건한 이 암자는 해인사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암자다. 이 길은 가야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계곡을 따라 뻗은 길을 걸어가자 금세 암자에 닿는다. 용탑선원은 계곡 건너편에 있다.

 

 

 

계곡에는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크고 튼튼한 시멘트 다리와 외나무다리. 커다란 나무의 몸통을 켜서 그대로 걸쳐놓은 외나무다리. 다리 옆엔 '이 다리를 건너면 불심 깊은 불자는 업장이 소멸된다'라고 쓰여 있다. 나는 불자가 아니니, 건너 봤자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나 '밑져야 본전'이란 말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 말에 의지해서 외나무다리를 건너간다.

 

 

문짝 없는 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선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석탑 앞에 앉은 돌사자들만이 나그네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넌 도대체 어느 절 사자를 본뜬 짝퉁이냐? 그러는 넌 누구의 짝퉁인데?

돌도 오래되지 않으면 촐싹댄다. 탑 좌측으로 눈길을 돌리자, 용탑선원과 감로당이 앉아 있다. 꽤 늙은 건물인데 밭은 기침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묵묵할 뿐이다. 아마도 이 암자에서 맨 처음 지어진 건물인가 보다.

 

감로당현판이 걸린 요사채/안병기

이 암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분이셨던 용성 스님의 사리탑을 관리하고자 지은 것이다. 스님께서 입적하고 나서 5년 뒤의 일이었다.  

용성(1864~1940) 스님은 전북 남원(현재의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태어났다. 법호인 용성은 남원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16세 때 해인사에서 화월(華月)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3·1운동 때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민족대표 33인에 속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면서 대처승의 법통 계승을 인정하는 일제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했다.

 

1899년 10월 5일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에서 태어난 고암((1899~1988) 스님은 1916년 해인사에서 제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혜월·만공·용성·한암 등 당대 최고 선지식들의 회상에서 25 하안거를 지낸 후, 38년 용성스님에게서 견성을 인가받고 전법계를 받았다.

 

법당 뒤로 보이는 상자당/안병기

1967년 이후, 세 차례나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었으며 80년에는 용성문하의 스님을 대표하는 용성문장에 취임했다. 88년, 용탑선원에서 세수 90세, 법랍 71세로 입적했다. 평생 자비보살의 무소유를 실천하신 스님이었다.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청정해진다(心淨卽國土淨)'는 법문을 자주 설하셨다고 전한다.

 

법당은 '칠불보궁'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이름 그대로 안에는 일곱 분의 부처를 모셨다. 한 보살이 오체투지로 절을 하고 있다. 절하는 모습 속엔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신심이 반영돼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굴법당전경/안병기

입구에 지켜선 삼층석가사리탑은 1965년 고암 스님이 세웠는데 석가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바로 정면 산 아래엔 석조 미타굴법당이 있다. 산비탈을 깎아 지은 굴 법당이 있다. 법당 안 벽은 전부 석재로 마감했다.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음보살 및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법당 옆 샘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신다. 물을 담아두기 위해서 파낸 것일까. 아주 큰 돌확이다. 수도꼭지에서 돌확으로 아주 가느다란 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다. 정신도 쉬지 않고 부서져야 한다. 저렇게 부서져야만 명징한 의식을 얻을 수 있다. 저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용탑선원뒤로 가야산이 보인다/안병기

경내를 나와 용성 스님의 사리탑과 고암 스님의 부도가 모셔진 언덕으로 올라간다. 부도들은 용탑선원과 홍제암 사이에 있다. 암자 뒤에는 용성 스님의 선농일치를 생각나게 하는 꽤 너른 텃밭이 있다.

 

먼저 용성 스님의 부도탑과 비를 들여다본다. 1941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만해 한용운이 비문을 지었으며 일재 최종환이 글씨를 썼다. 앞에 있는 고암 스님의 부도와 비를 들여다 본다.

위대한 스승과 스승의 입적 후에도 변함없이 받들던 제자가 함께 누워 있는 풍경.  죽음이란 본디 적막한 것이다. 그 적막을 두 사람의 우의가 따스하게 감싼다. 가야산 상왕봉보다 높은 정신의 두 봉우리가 여기 잠들어 있다.  ⓒ 2008 OhmyNews 안병기

 

 

고암스님 부도와 용성스님 사리탑(좌), 용성선사 비문/안병기

 

사명대사가 입적한 암자 홍제암 

홍제암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당 유정(1544~1610) 스님이 3년간 머물다가 입적한 곳이다. 암자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다. 사명대사의 죽음을 애도한 광해군이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내려 '홍제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홍제암은 용탑선원 아래에 있다. 백용성 스님 부도에서 홍제암까지는 지척이다. 

 

 

홍제암입구/안병기

 

사명대사 부도는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한 종 모양의 부도로,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2단을 이루었는데, 아랫단은 사각형이고 윗단은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부도의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를 올려 놓았다.

 

 

홍제암입구에 있는 보물 제1301호 사명대사부도와 석장비/안병기

해서체로 쓴 사명대사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이다.  광해군 4년(1612년)에 세운 것인데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시대(1943년) 때는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합천 경찰서장 다케우라가 석장비를 네 조각으로 깨뜨려 버렸다. 현재의 비는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홍제암 인법당은 1614년(광해군 6년) 혜구 스님이 사명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영당을 건립한 이래 수차례 개·중수되었다고 한다. 인법당이란 큰 법당이 없는 절에서 중이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집을 말한다. 1770년(영조 46) 해봉이 중건했다고 하며 그 이후에도 수차례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현 건물은 1979년 10월에 완전 해체 복원한 것이다.

 

  

 정문인 보긍문과 보물 제1300호 홍제암 인법당(因法堂) / 안병기

인법당은 H자형 건물이 한 동으로 된 커다란 건물이다. 그러나 사명대사와 관련된 영자각·조사전 등 여러 기능의 공간이 함께 들어 있는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건물 중앙부는 법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하고 있으며,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양쪽에서 협시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무량수와 무량광을 보장하는 자비로운 부처님으로 서방극락 정토를 주관하는 부처다.

 

법당 가운데 칸 위에는 "귀로난야(歸老蘭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귀로'는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쉬는 것을 말하며 '난야'는 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야말로 사명대사에게 딱 어울리는 글귀다. 이 글씨는 지관 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오른쪽 영자각에는 유정·휴정·영규의 상을 모셨다. 처음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셨을 때는 표충사라고 했으나 밀양의 표충사에도 사명대사를 모신 곳이 있다고 하여 이곳을 폐했다. 그러나 밖에 붙은 현판은 여전히 '표충사'라고 돼 있다.

 

인법당 왼쪽에는 서래당이라고 가로로 기다란 건물이 있다. 서래는 조사서래(祖師西來)의 준말이다. 달마대사가 서쪽인 인도에서 동쪽인 중국으로 온 것을 말한다. 통으로 터진 건물 형태나 전면에 노출된 계자난간으로 봐서 아마도 재가 신도 등을 교육하는데 쓰이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서래당 뒤 자운대율사영각과 석빙고 같이 생긴 굴과 독이 즐비한 장독대/안병기

서래당 뒤쪽에는 자운 스님의 진영을 모시는 영각이 있다. 자운 (1911~1992)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이시다. 진영은 한지에 먹선을 그려 채색한 수묵채색화다. 주장자를 들고 있는 모습, 꼭 다문 입, 근엄하고 꼿꼿한 모습을 보면 율사가 천분이었던 분 같다.

 

영각 옆에는 석빙고와 장독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장맛을 변치 않게 하는 건 장독이다. 들락날락 숨을 쉬게 하는 장독이 없다면 장은 곧장 썩어 버린다. 장독은 장을 가두기도 하지만 장을 장답게 하는 원천이기도 한 것이다. 계율도 그런 것 아닐까. 스님이라는 장맛을 유지시켜주는. 그런 점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율사의 영각 옆에 장독이 있다는 건 매우 절묘한 배치인지 모른다. ⓒ 2008 OhmyNews 안병기

 

 

겨울의 가야산

가야산 입구의 초소에서는 문화재 관람료라면서 주차비를 받았다. 해인사의 왼편 계곡을 타고 눈이 덮인 산길을 올라갔다. 맑은 시냇물과 눈 덮인 겨울 가야산의 하얀 풍경에 절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부산에서는 정말 귀한 눈이다. 희끗희끗한 잔설의 겨울산은 자유로운 시공 속을 흐르는 섬처럼 아름답다. 여기 올라오니 숨 막히는 절경에 모두 넋을 잃는 표정.

투명한 살얼음이 깔린 맑은 계곡을 향해 떨어지는 물소리는 목탁소리보다 더 청아했다. 앙상한 계곡의 나뭇가지들은 고드름을 주렁주렁 주렴처럼 내리고 있었다. 청록의 나무에 하얀 눈송이들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아름답고, 비탈진 계곡의 앙상한 크고 작은 나무와 푸른 대나무 잎들은 눈 옷을 겹겹이 껴 있고, 얼음 밑 장을 뚫고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는 나귀처럼 눈이 덮인 숲 속에서 희미한 말방울소리를 듣는 듯.

 

가야산 칠불봉

칠불봉은 해발 1433m이고 상왕봉이 해발 1430m이니, 칠불봉이 가야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 가야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를 정복했다는 감회에 찰칵찰칵 여기저기 카메라 찍는 소리가 박수소리처럼 들렸다.

칠불봉(七佛峰) 정상에 내려다보니 저 멀리 사바세계가 내가 두고 온 속세인가 싶다.

 

가야국의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후의 아름답고 지고한 사랑처럼, 두 사람은 혼례하여 많은 자손을 두었으나, 그중에 일곱 왕자가 허황후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의 수행력에 감화되어, 처음 입산 수도하게 된 곳이 가야산 칠불봉이다.

허황후는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든 왕자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이곳을 수차례 찾아와 만나고자 했으나, 이미 출가하여 세상을 잊은 지 오래인 일곱 왕자를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황후는 왕자들이 수도하고 있는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비치는 이 연못에서 그림자만을 보고 애달픈 마음을 달래며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왕자들은 지리산으로 수도처를 옮겨 그곳에서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에도 이와 같은 영지 전설의 내용이 남아있다.

아름다운 전설과 유래가 깃든 장소는 선사들의 영혼이 깃든 장소. 그래서일까. 아릿한 황후의 모정에 그리운 것들이 연쇄적으로 반응해 다소 감상적이 된다.

자료 - ⓒ 2007 OhmyNews 송유미 

 

 고바우식당 「산채한정식」
가야산국립공원과 함께 해인사 주변으로는 많은 음식점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그 중에 「고바우식당」은 가야산에서 나는 산채로 맛을 내는 전문 식당이다.
20여 가지의 기본찬과 함께 한 상 가득 차려나오는 산채 한정식(1인분 1만원)에는 고사리, 취나물, 참나물, 더덕, 도라지 등 신선한 나물에다 멸치, 장조림, 깻잎, 김치, 오이, 연근 조림, 건파래 무침, 더덕부침, 표고버섯볶음과 된장찌개 등이 함께 오른다.
기본 산채 한정식에 자연산 송이국을 곁들이면 음식값(1인분 1만5천 원)은 오르지만 무와 양파를 우려 식물성 다시물을 넣고 끓여낸 들깨가루가 첨가된 송이국은 뽀얀 것이 그윽한 맛을 낸다. 또한 찹쌀과 보리쌀을 갈아서 넣은 국물을 부은 싱그러운 물김치의 맛도 입안을 개운하게 한다. 

산채하며 음식재료의 대부분은 인근 가야산에서 자생하는 무공해 식품들로 인근 할머니들이 캐다가 조달해 주고 있다. 20대 처녀시절부터 장사를 시작한 주인 김윤자 씨는 35년 간 한결같은 정성으로 업소를 지켜왔고, 한번 다녀간 손님은 정확하게 기억하기로 정평이 있다. 
산채정식 외에도 더덕구이(소: 1만5천 원)가 유명한데, 산더덕에 고추장과 갖은 양념을 발라 구워내는 구이는 밥반찬은 물론 술안주로도 제격이다.
이곳은 특히 5년 전 오부치게이조(小淵惠三) 일본총리가 방한했을 때 해인사를 다녀가면서 맛보았던 전통사찰음식이 관광상품으로 개발되었고 인근 일곱 곳의 식당과 함께 전통사찰음식점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전통사찰요리는 고기와 오신채(파, 마늘, 생강, 부추, 홍거) 인공조미료 등을 일체 사용하지 않아 맛이 깨끗하고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한지호 자동차여행가
055-932-7311 / 신용카드가능 / 20대 / 9시~21:00 / 연중무휴 / 가야농협 앞에서 좌회전하면 좌측 편

 

야천리 각사마을 055-934-0408

홀잎나라 각사 마을은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의 하나인 법보종찰 해인사 자락에 위치하며, 마을 뒤로는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가야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전방 좌측에는 남한의 작은 금강산이라 불리는 매화산의 기묘한 암봉들이 마치 수많은 동자들이 경을 펼쳐 놀고 앉아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하고, 홍류동 계곡수가 마을 앞 가야천을 휘어져 내려가며 홍류동 계곡과 해인사 주변의 늙은 노송은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은 가일층 정취를 뛰며, 특히 봄이면 마을 앞 가로수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하는 곳으로서 사시사철 가야산국립공원과 해인사에 탐방객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주변마을이다.


2006년 농림부 녹색농촌체험마을, 농협중앙회 farmstay마을로 지정을 받고, 2007년 산림청 산촌마을로 선정되어 2008년부터 사업이 시작되는 마을로서 해인사와 연계한 해인사 역사탐방, 가야산국립공원 전문 자연해설가의 지원 아래 가야산 자연관찰로 체험, 가야산 야생화 박물관체험 등 주변관광 자원을 바탕으로 각사마을에서는 농사체험, 놀이체험, 자연생태계체험, 도자기체험, 만들기체험 등 연중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농촌체험과 학습이 함께 이루어진다.

 

* 체험일정
봄 - 딸기.토마토.홀잎따기, 산나물캐기, 텃밭분양, 산딸기, 오들게따기, 냉이.돈나물캐기
여름 - 감자캐기, 옥수수따기, 다슬기잡기, 미꾸라지잡기, 물고기관찰, 곤충채집, 모심기체험, 김매기
가을 - 고구마캐기, 밤줍기, 수확체험(호두, 산송이, 감, 배, 사과따기), 벼베고 탈곡체험, 메뚜기잡기
겨울 - 도자기체험, 해인사유적지탐방, 별자리찾기, 목공예, 떡메치기, 촌두부만들기, 묵은김치맛보기, 가마솥 밥짓기

 

* 체험비용
어린이, 청소년 : 식대 3,500원 / 숙박비 5,000원
일반 - 식대 4,000원 / 숙박비 5,000원
민박 - 숙박료 1실 30,000원 / 팜스테이 - 식대 4,000원 / 숙박비 10,000원

야천리 989-1번지 대가야식당 055-931-1592

고디탕(다슬기) / 08:00 ~ 21:00 / 연중무휴 / 100석

가야산 기슭에서 자생하는 신선한 산나물 등을 재료로 하며 다슬기국과 곁들여 먹으면 신선하고 담백한 맛을 느낄수 있다. (96년 2월 대구 MBC 맛자랑에 방송되었음)

해인사관광호텔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숙박지구에 자리하고 있다. 토속적인 산채음식을 맛볼 수 있는 한식당과 지하 암반수를 사용하는 사우나 등 부대시설을 갖췄다. 숙박과 아침식사(해장국이나 된장찌개), 저녁식사(산채정식)를 포함한 4인 가족 패키지 가격이 13만7천원. 산행 후의 사우나, 돌솥비빔밥, 커피가 포함된 등산객 패키지는 1만원. 문의 055-93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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