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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부산광역시

부산 수안동 동래동헌

by 구석구석 200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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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그 어느 고장 보다도, 끊임없이 왜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피를 흘린 곳. 그 부산의 동래는 부산의 뿌리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1592년) 왜군 선발대 1만 8700명이 병선에 분승하여, 4월 13일 부산 앞바다를 침입하여 부산진성을 지키던 아군은 모두 순사했다. 그 이튿날 동래성으로 쳐들어온 왜군들의 칼에, 군, 민 관은 혈투의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무너지는 동래성과 함께 왜군의 총칼 아래 모두 순사했다.
 

'동래부 동헌'은 오늘날의 부산시청과 같은 곳. 1636년(인조 14)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창건하였고, 1711년(숙종 36) 동래부사 이정신(李正臣)이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현재의 현판은 독립운동가 한형석 선생의 글씨다.
 

이 '동래부 동헌 건물'은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한다. '동래부동헌'은 충신당과 그 부속 건물들(동․서익랑, 망미루, 독진대아문, 회랑, 염문 등)을 말하고, 충신당, 객사 등을 포함한 관아 건물 모두를 말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약 60년 뒤인 1658년 당시의 동래부사 '민정중'은 그날의 순절자들을 추모하고 후세에 그 애국충절을 널리 알려 후세인들의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해, 당시의 전황을 탐문하여 기록한다. 그리고 여러 책자를 살핀 뒤 자료를 완성하여 화공을 시켜 순절도를 그리려 했으나, 부임 7개월 만에 예조 참의가 되어 조정으로 오르게 되자, 그 자료는 동래부에 남게 된다.

 

그 자료가 기초가 되어 숙종 35년 동래부사 권이진이 화공을 시켜 그린 순절도들은, 당시 동래성 남문 안에 안 양쪽 벽에 걸려져 오가는 부민들의 충성심을 일깨웠다. 부산진 순절도(보물 제 391호)와 동래부 순절도(보물 제 392호)는 그후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손에 넘어갈까 훼손될까 각별히 조심한 끝에, 60년 초반까지 부산 안락동 충렬사 안락서원에 소장됐다가, 유물 보존의 어려움 및 교육자료 활동으로 현재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보존되고 있다.

 

'동래부 동헌'의 수안동의 유래는, 으뜸되는 관아 안이라는 뜻의 수안, 또는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오는 등 물이 흔하다고 수안(水安), 동래성 수문안의 동네라는 설이다. 조선말기까지 동래부와 동래관찰사의 아헌으로 사용됐다. 일제시대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양산군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건물의 구조는, 아헌인 충신당의 좌우에 동·서익랑과 대문, 바깥대문이었던 동래도호아문, 독진대아문이 부속되어 있었다. 일제시대에 서익랑은 파괴·철거됐다.
 
망미루와 독진대 아문은 지금의 금강공원 입구와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 세웠다. 충신당과 대문만 본래의 위치에 보존되어 있으나, 부지는 축소되었고, 원래 떨어져 있었던 동익랑이 충신당에 너무 가까이 이건되어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인다.
 
'동래 동헌'은 안타갑게 일제시대부터 관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벽면, 평면구조, 천장, 마루 등이 많이 개조된 데다 보수를 거치면서, 목재 등의 재료가 대부분 교체되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산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단일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면서 유일한 동헌이며,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경내에는 부사 이공원진 청덕선정비, 부사 황공호 청덕선정비, 부사 조공봉진 영세불망비, 부윤 윤공필은 청덕선정비 등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동래부 동헌이 있는, 오늘날의 동래시장의 자리가 중심이었던 이곳에 오면, 당시의 동래성을, 왜군들이 포위한 가운데 '인생문'의 성벽을 넘어, 왜군이 공격해 오는 급박한 상황과 동래부사 송상현 공이, 성과 함께 운명을 하기 위해 조복을 입고, 북방을 요배하는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더구나 부산의 뿌리로서의 '동래부 동헌'은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자, 선조들의 충혼의 정신이 깃든 성역이다.  

ⓒ 2008 OhmyNews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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