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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충청남도

홍성 96번지방도 김좌진생가 간월호

by 구석구석 2008.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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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은 어딘가 특별한 기색을 갖고 있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최영 장군이, 근세에 들어서는 한용운 선생과 김좌진 장군 등 걸출한 인물들이 이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고장에서 태어나 자란 깡이 센 인물은 깡만 센 인물들이 아니며 그야말로 충청인의 기질을 그대로 갖고 있는 걸출한 인물들이다.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는 소위 깡이 센 걸출한 인물들이 충청지역 특히 내포 땅에서 어떻게 났을까 의아해 했으나 충청인의 기질을 이해하면 그리 이상할 것도 아니다.

 
택리지에 따르면 내포는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지칭한다. 즉 지금의 아산, 예산, 당진, 서산, 태안, 홍성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야산의 서쪽에 큰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는 경기도와 바다를 사이로 마주하며 바닷물이 내륙까지 깊숙이 들어온 지형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생전의 김좌진 장군 모습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지휘했던 독립군사령관으로 유명한 백야 김좌진 장군(白冶 金佐鎭 將軍 1889~1929)의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김좌진 장군이 태어나 성장하였던 곳으로 그는 고종26년(1889) 선원 김상용의 10세손인 형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생가는 명문 사대가 출신답게 터도 넓고 비교적 공들여 조성해놓았으며, 대문 앞 문패는 장군이 지금도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담장과 장독대도 정갈하게 꾸며 놓았으며 굴뚝도 특이하게 만들어 놓아 흥미롭다.


생가지는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어 현재 24평 규모의 생가1동과 관리사 1동, 부속사 3동 그리고 유품 전시관이 설립되어 있다.
드넓은 옛 터에는 생가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유물전시관과 사적비, 추모비 들이 있어서 장군을 흠모하게 했고, 호명정사(湖明精舍)라는 현판이 붙은 사랑채 기둥에는 누구의 시인지 모르지만 장군을 기리는 주련 한 수가 걸려 있어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 하였으며 용력이 뛰어났던 그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16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면서 30여명이나 되던 가노(家奴)의 문서를 불사르고 해방시키는 용단을 내렸다.


18세때 이미 호명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고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그는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한성일보 이사로 있다가 3.1운동 때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특히 1920년 4월 20일부터 나흘동안 벌인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 1000여명을 사살하고 독립군 피해는 전사 60명, 부상 90명에 불과한 대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 사살의 확실한 숫자는 분명치 않지만 그 휘하에서 싸웠던 이범석 장군의 기록에는 3300여명, 중국군 발표로는 1300여명, 일본군의 발표로도 900여명이라고 하니 적어도 900명보다는 훨씬 많았을 것이고 세계전 사상 유례가 없는 전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민족자주 독립에 앞장섰던 당시 장군의 나이는 약관 31세였다.
1925년 김혁, 최호, 나중소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9년 김종진, 이을규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수석에 취임하여 재만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였다.

 

그토록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장군이었지만 그 후 사분오열되는 독립운동의 파쟁 속에서 한편 중국의 항일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40세를 일기로 한 공산당원자객의 흉탄에 순절하고 말았으니 어찌 아깝지 않은가.

김좌진. 그는 문인이자 무인이었다. 사람들은 붓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좌진 장군은 칼과 붓을 둘 다 사용한 사람이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많은 독립군을 지휘한 통솔력으로 전투를 했다는 그의 업적을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지호 / 자동차여행가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홍성 나들목에서 나가면 된다. 바로 만나는 고가차도 아래서 좌회전해 고가를 넘어오는 도로에 합류한 다음 500여미터를 가면 다시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안면도 방향으로 좌회전해 50여미터를 가면 왼쪽으로 김좌진생가와 한용운 생가를 가리키는 푯말이 서 있다. 이를 따라 다리를 건너면 정면으로 김좌진생가가 커다랗게 보인다.



 ▲상황리 바닷가의 속동전망대

 

어사포구와 궁리포구 중간의 임해관광도로변 바닷가에 들어선 속동전망대에서 바로 앞의 자그마한 모섬까지는 나무계단을 이용한 산책로로 이어진다. 겨울바다 여행에 나선 가족들은 이곳에 차를 세우고 천수만을 건너온 바람을 맞으면서 모섬까지 걸어보기도 하고 안면도 뒤로 숨어드는 낙조를 감상하며 하이 파이브를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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