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를 가는 길은 경부고속도로 천안 IC를 빠져 나와 21번 국도로 진입 온양온천, 도고온천을 경유 예산에 도달한다. 다시 45번 국도를 타고 덕산면 덕산온천과 충의사를 거치면 수덕사 입구다. 또 한가지 방법은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를 나와 좌회전하여 45번 국도를 타고 예산방면으로 진입해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서쪽으로 20Km 정도 달리면 「호서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덕숭산(德崇山)과 만나게 된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이 만들어 낸 덕숭산은 북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이 병풍처럼 둘러 쌓인 중심부에 우뚝 서있다.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낮은 구릉과 평탄한 들녘이 서로 이어지며, 계곡이 골마다 흘러내리는 이곳은 예로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고 일컬어 왔다. 여기에 불조의 선맥이 면면히 계승되고 많은 고승 석덕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찰 수덕사(修德寺, 041-337-6565)가 자리하고 있다.
사천리산41번지 이응노기념관(구 수덕여관)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전설이 깃든 수덕여관이 옛터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 41번지 1054㎡의 대지위에 건평 182㎡ 크기의 ㄷ자형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복원된 수덕여관은 이제 더 이상 나그네를 재워주고 산채정식으로 유명한 밥을 지어 파는 곳이 아니다. 객실에 고암의 작품이 걸린 전시관으로 변모하고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불자들이 템플스테이로 이용하는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수덕여관앞쪽과 안뜰, 이 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인 나혜석과 이응노, 일엽스님간의 아름다운 일화가 간직되어 있고 1960-1980년대까지 중·고등학생들이 수덕사로 수학여행을 가면 단골로 묵던 명소였다 / 안서순
새로 지은 수덕여관은 초가지붕에다 7개의 방, 방과 방 사이의 장짓문, 툇마루, 부엌, 안마루, 안마루에 가지런히 놓인 뒤주, 대문 양쪽에 있는 방의 누마루, 나무를 때어 구들을 데우는 온돌 방바닥까지 집의 형태는 옛 모습 그대로다. 고암은 수덕여관을 1944년에 구입해 15년간 살았다. 그러나 고암이 실제로 집에 머문 세월은 길지 않다. 여관은 부인 박귀희(2001년 사망) 여사가 운영했고 그는 바람처럼 떠돌다 잠깐씩 머물고 떠나곤 했다.
수덕여관과 암각화/안서순
그렇지만 고암은 집집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세간에 잘 알려진 2점의 암각화와 수덕여관 앞 남쪽에서 계단을 오르는 언덕바지 작은 바위에 '수덕여관'이라고 고딕체에 가까운 한글체로 새긴 것은 고암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다음 1969년 몸을 추스르기 위해 이 집에 머무는 동안 새긴 것이다.
수덕여관손님 나혜석
1896년. 김일엽과 같은 해에 경기도 수원에서 부유한 관료의 집안에서 넷째 딸로 태어난 나혜석은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유학, 유화를 공부한다. 유학시절 오빠 친구인 게이오 대학생 최승구와 열애에 빠졌고 결핵을 앓던 최승구가 사망함으로서 그들의 관계는 막을 내리지만 첫사랑 최승구는 나혜석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된다.
결혼과 외도, 3명의 자녀, 이혼을 거치고 자녀를 보고 싶은 마음이 병이 되어 신경쇠약과 손이 떨리는 수전증까지 찾아와 병든 몸을 이끌고 전국을 유람하다 수덕여관에 찾아온 것이다.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되는 것마저 거절당한 혜석은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중이 되게 해달라고 1인 시위를 하는 한편, 붓 가는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화가 이응노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복원전의 수덕여관모습 / 이정근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버린 이응노는 나혜석이 이곳을 떠날 무렵 1944년 아예 수덕여관을 사버리게 된다. 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훗날 21세 연하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버리고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희가 여관을 운영했으나 그마저 2001년 사망함으로서 폐허가 되어버렸다.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낀 혜석은 수덕여관을 나와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 아닌 수도생활을 하면서 잠시 머물다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안양 양로원을 거쳐 청운 양로원에 기거하던 혜석은 양로원 생활이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음인지 양로원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헤매다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그때가 1948년 12월 10일이다.
복원전의 수덕여관/이정근
울창한 수목과 기암괴석이 풍부해 절경을 이루는 덕숭산에 자리한 수덕사는 수도총림 덕숭산사라 하여 예산8경의 1경을 이루며, 고승들의 법통을 이어받은 비구니의 수도도량으로 자리잡은 곳이다. 사기에 따르면 백제 말 숭제가 창건하고, 제 30대 무왕 때 혜현이 묘법연화경을 강설하여 이름을 높였으며,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이 중수한 것으로 돼있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 목조건물의 하나인 대웅전
일설에는 신라 진평왕 21년(599년)에 지명이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해지며, 조선 제26대 고종 2년에 만공이 중창한 후로 선종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덕사 가람구조의 아름다움은 여러 단으로 이어지는 석축과 건물의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완만한 덕숭산의 구릉을 따라 삼단의 석축을 쌓고 가장 위쪽에 대웅전을 배치한 전형적인 산지 가람이다.
대웅전을 중심 축으로 한 수덕사 가람 배치는 도입, 전개, 결말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일주문에서 시작된 흐름을 연결하는 전개부는 황하정루에서 조인정사까지의 공간이다. 황하정루 아래의 어두운 공간은 전개부분의 시작으로 이는 시계의 갑작스런 변화를 유도하여 시선의 집중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석축과 계단은 공간 상승의 효과와 더불어 주불전인 대웅전을 시각적으로 더욱 강조하게 된다. 결말부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을 말한다. 이 공간은 일반적으로 주불전을 중심으로 하여 사면이 석축이나 건물로 둘러싸인 것이 특징으로 전개부와는 구별되는 기단위에 결말부가 형성된다.
유형문화재 제103호인 3층석탑
1962년에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수덕사 대웅전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목조건물이다. 1937년 건물을 해체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건축연대를 알 수 있게 됐는데, 우리나라의 목조건축 중에서 건축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1308년(고려충렬왕 34)에 건립된 것으로 천장과 벽의 장식이 세련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측면에서 보는 대웅전의 모습은 압권이다.
앞뒤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맞배지붕의 선, 그리고 측면의 벽에 드러난 목재부의 안정된 구조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제작연대가 뚜렷하고 구조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건축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높다랗게 쌓아올린 기단 위에 건축되었으며, 기단 양쪽에 계단을 두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건물이 고식을 보여주는 특징 하나는 기둥이 뚜렷한 배흘림을 하고 있는 점이다. 대웅전 옆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고주(高柱)를 보면 그 특징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건물은 11량이나 되는 큰 편이며 맞배지붕으로 엄정하게 처리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이 옆에서 보면 잘 드러난다.
진입로 입구 식당가
한편 경내에는 대웅전이 창건된지 약 200여년 후인 통일신라 무열왕 때에 원효대사가 건조한 유형문화재 제103호인 3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는데, 석탑은 백제시대의 특징인 단탑형식을 취하고 있다. 신라의 탑 건조 양식인 전형적인 양탑방식을 지양하고 백제의 탑 형식을 취한 것은 대웅전 자체의 건립이 백제인 것을 참작한 것 같다.
이 탑을 세우기 이전에 원래의 탑이 있었는데 어떤 연유로 없어졌는지는 모르나 원효대사가 원래의 위치에 다시 복원 건립했던지 아니면 대웅전이 백제에서 창건한 사찰임을 감안 백제양식을 취해 단탑으로 건립하여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탑 자체의 조각은 단순 무미하나 그 이면에는 신라의 섬세 정교한 조각예술의 향기가 은은히 풍겨 나옴과 동시에 화려한 솜씨를 승화시켜 단순함 속에 표현된 신라 당인의 예술이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일작이다.
이밖에도 경내에는 문화재 자료 181호인 7층석탑, 육괴정, 만공선사 사리탑이 등이 있으며, 대웅전 왼편에 놓인 1천20개의 돌계단을 따라 30분정도 올라가면 만공스님이 참선을 위해 창건한 정혜사 앞마당에 도달한다. 부속 암자로는 '청춘을 불사르고'의 일엽스님이 기거한 것으로 유명했던 환희대도 있다.
1990년 중창한 황하루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며, 황하루 지하에는 성보박물관 등 볼거리도 많이 있다. 한지호(자동차여행가)
수덕사와 한 몸이 되어 있는 ‘호서의 금강’ 덕숭산
덕숭산은 숲, 바위 등 모든 것과 함께 수덕사와 한 데 어우러진 산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덕사를 위한 산이라 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덕숭산을 수덕산이라고도 한다. 덕숭산은 남쪽을 향하여 양편의 등성이가 두 팔을 벌려 가운데 바위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가운데 골짜기 아래쪽에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 덕숭산은 호서의 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산 전체에 숲이 울창하고 멋이 있는 노송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숲에 둘러싸인 산 한가운데의 골짜기는 바위로 되어 있으며, 깊고 가팔라 낮에도 해를 보기 어렵다. 이 경관이 좋은 덕숭산 남면 일대는 거의가 수덕사 경내로 산 여기저기에 정혜사, 정월사, 금선대, 향운각, 소림초당, 비구니 암자인 견성암, 환희대, 그리고 만월당, 선수암, 운수암, 극락암, 만공탑, 관음보살상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소림초당 등은 깎아지른 바위벼랑 위에 벽을 등지고 숨은 듯 앉아있기 때문에 길에서는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덕숭산의 또 다른 멋은 등성이 산비탈 곳곳에 갖가지 모양의 큰 바위덩이가 높이 솟아있는 점이다. 숲 위로 솟아 있어 그 위에 서면 조망이 좋고 시원하다.
덕숭산은 내포 땅을 조망하기에 좋은 자리에 있다. 당진 서산 예산 홍성 고을 일대를 일컫는 내포는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있고 농산물과 해산물도 넉넉하여 살기 좋고 민심도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건너의 가야산은 물론 도고산 금오산(예산) 봉수산 오서산 백월산 팔봉산 삼준산 등 내포의 모든 산들이 조망된다.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시대에 지은 가장 오래 된 목조건물이며, 기둥이 예술적인 배흘림 기둥으로도 유명하다. 이 대웅전은 1937년 해체 수리 때 나온 묵서명에 의해서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덕사가 유명한 것은 경허, 만공 등 걸출한 스님들이 일본의 압제에 굽히지 않고 선지를 연구하고 실천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 근대 선(禪)의 중흥을 이룬 것이다.‘청춘을 불사르고’라는 글을 남긴 일엽 스님도 수덕사에서 평생을 지냈다.
사천왕문 안에 들어서서 바로 앞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 마신 뒤 왼편 언덕에 있는 견성암으로 올라갔다. 일엽 스님이 계셨었다는 이 비구니 암자는 예전과는 사뭇 달라 규모도 커져 있었고 조경도 잘 되어 있었다. 특히 뜰에서의 조망이 좋았다.
견성암에서 나와 포장길을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갔다. 찻길은 향적당까지 이어졌다. 높은 석축 위에 세워진 향적당도 선원인 듯 조용했다. 정혜사으로 가는 길은 향적당 별채인 진영당 오른편 아래에서 이어졌다.
향적당을 나서면 바로 천연 돌다리 아래를 지난다. 높이가 2m쯤 되는 굽은 다리가 마치 사람이 다듬어 올려놓은 것 같다. 다리가 아니라 대문 위의 대들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돌다리를 지나 숲길을 더 나아가면 정혜사 아래에서 수덕사 본전에서 골짜기를 따라 올라온 길과 만난다. 정혜사 앞을 지나지만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조용했다.
정혜사를 지나면 얼마지 않아 산등성이에 오르게 된다. 산등성이엔 대포처럼 비스듬히 하늘로 솟은 바위와 거북처럼 생긴 큰 바위 등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숲 위로 솟아 있어서 그 위에 서면 산 사이로 홍성이 보이고 오서산과 백월산, 남당리 바다도 보인다. 정혜사를 거치지 않고 만공탑에서 올라온 길과 만나고 얼마지 않아 고스락에 올라서게 된다. 고스락은 꽤 넓고 조망도 좋지만 남쪽 용봉산쪽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고스락 아래 소나무숲 그늘이 시원하여 쉬면서 간식과 점심 먹기에 좋다.
내려갈 때는 정혜사를 거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올라올 때는 몰랐으나 정혜사쪽 길을 가시철망으로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정혜사를 거치지 않는 길은 정혜사 바로 아래에서 향적암을 거쳐 돌다리를 지나 올라온 길과 수덕사에서 올라온 길, 그리고 정혜사쪽 길과 만나는 사거리다. 이 사거리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공 모양의 둥근 돌을 팔각기둥 셋이 떠받치고 있는 만공사리탑을 보게 된다. 만공월면(滿空月面)과 삼보(三寶) 및 팔정도(八正道)를 나타내는 현대적인 이 사리탑이 60여 년 전에 만들어졌고, 한글로 써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공탑을 지나 가파르게 돌계단을 내려가면 이번엔 관음보살상이 나타난다. 만공 스님이 1924년 천연암석에 조성한 관음보살상이다. 개울 건너 절벽 위에 향운각이 있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다.
그 다음에는 유명한 소림초당이다. 바위벼랑 위에 제비집처럼 지은 이 초당도 역시 만공선사가 1925년 터를 잡고 손수 설계하여 지은 집으로, 선사는 평생 이 초당에서 지냈다 한다. 폭포를 이루고 있는 개울 건너에서 나무 사이로 초당을 볼 수 있다.
개울에서 옆문으로 수덕사 경내로 들어가 관음바위를 지나 국보인 대웅전을 둘러보았다. 대웅전 양편의 배흘림 기둥은 언제 보아도 신기하다. 우리는 넓은 뜰을 지나 황하정 누각 아래를 지나고 사천왕문 금강문을 지나 절 밖으로 나온 다음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도 들러 고암이 새긴 암각화를 보는 것으로 덕숭산 산행을 마쳤다. 3시간이 좀 넘은 산행이었다.
사천리 6-4번지 수덕사경내 그때그집식당 041-337-6633, 0133
산에서 나오는 온갖 종류의 나물을 한자리에서 맛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찬 한가지 한가지가 내는 색다른 감칠맛은 어디에서도 쉽게 맛 볼 수 없으며, 뚝배기에 갓 끓여낸 구수하고 담백한 맛의 된장 찌개와 석쇠에 구운 더덕 양념 구이는 단숨에 밥 한공기를 비워내게 한다.
또한, 그 맛을 인정받아 TV 방송국은 물론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산채스페셜, 산채특한정식, 산채한정식, 산채더덕정식, 산채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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