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방곡곡/경상북도

경주 4번국도-황룡사 강선마을 선덕여왕

by 구석구석 2008. 1. 31.
728x90

 

 

 

 역사기행 답사지로 떠오른 경주...선덕여왕의 발자취를 따라서

 

 동아시아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은 불교문화를 꽃피우고, 폭넓은 인재등용의 리더십 등을 발휘 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는 평을 얻는다. 반면 선덕여왕 재위 동안 조용할 날도 드물었다. 재위 말년 내부에서는 여왕을 업신 여긴 반란이 이어졌고, 주변국의 외침도 잦았다. 분위기 반전을 위해 선덕여왕은 분황사, 황룡사 등 많은 사찰을 세웠다. 그중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대표적 건축물이다. 때문에 백성은 괴로웠다. 잦은 세금 징수에 노역까지 나서는 게 큰 부담이었다.

 

▲  황룡사 9층 목탑 주춧돌 / 스포츠조선 김형우기자

선덕여왕은 부처님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키고자 634년 분황사를 세웠다. 분황사는 신라 7대 가람 중 하나로 부처의 사리를 모신 모전석탑(국보 제30호)은 국내 최고(634년 완성)의 전탑이며, 익산 미륵사지석탑보다 5년을 앞선다. 기단부의 네마리 사자석상과 인왕상은 열린 세계와 닫힌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분황사 인근 황룡사는 선덕여왕 재임시절 첨성대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통한다. 그 위치도 서라벌의 중심이다. 신라시대 5악(岳)으로 통하던 토함산(동), 현도산(서), 남산(남), 소금강산(북)의 가운데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황룡사는 진흥왕(553년) 부터 선덕여왕(645)까지 4대 93년에 걸쳐 완공된 대역사였다. 본래 진흥왕이 어머니의 섭정을 피해 궁궐을 옮기려 했으나 그 터에서 '황룡'을 발견하고 사찰을 짓게 됐다는 설화도 전한다. 8만928㎡(2만5000여 평) 규모의 절터에 남아 있는 주추 만으로도 그 규모가 짐작된다.

 

신라 최초의 석탑 분황사석탑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이후에 삼국에서는 탑파가 전립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다들 목탑을 세우다가 차츰 전탑과 석탑 등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분황사 모전석탑/김환대

 분황사에 가보면 신라 최초의 석탑이라 할 수 있는 모전석탑이 있다.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한 석탑이다. 국보 제30호로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쌓았고 탑신 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있다.

 

기단 위에는 동서남북으로 사자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1층 탑신의 사방에는 감실을 두고 문을 내었는데 입구에는 각기 둘씩의 입체감이 두드러진 금강역사상(인왕상)이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금강역사상/김환대

 1915년 일본인이 수리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2층과 3층사이 탑 안에서 사리함과 각종 옥류 구슬 바늘과 침통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석함과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분황사 출토석합으로 경주박물관보관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은 경주시내 낭산(狼山)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낭산은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이리(狼)가 엎드려 있는 듯한 형상이다. 들판 건너에는 경주 제일의 명산인 '남산'이 버티고 있다.



숲을 중요시하던 시절 낭산은 '신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해서 '신유림'으로도 불렸다. 따라서 마을 이름도 하강선, 상강선 등 '강선마을'로 통한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도리천이 어디냐?"는 물음에 여왕은 "낭산"이라고 답했다. 우연일까? 여왕을 낭산에 모신 뒤 30년이 흐른 후 왕릉 아래에는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불가에서는 호국왕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의 위쪽을 '도리천'으로 칭한다. 릉에서 선덕여왕릉의 실존을 뒷받침 해주는 사찰 사천왕사지까지는 걸어서 5분 남짓. 아름다운 숲길이 이어진다.



실제 선덕여왕릉은 경주 사람들에게도 생소한 곳이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뜨기 전까지는 그랬다. 최근에야 이정표도 제대로 갖추고 왕릉도 부분 보수를 했다. 찻길에서 내려 왕릉까지는 5분여 거리. 고구마밭, 과수원, 소나무숲 등 한적한 숲길을 지나면 릉이 나선다. 왕릉은 명성에 비해 다소 초라한 느낌이다. 

 

진평왕릉

'진평왕릉을 들르지 않고는 경주를 봤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주 마니아들은 의외로 진평왕릉을 극찬한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을 모신 진평왕릉은 들판 한가운데 자리해 호젓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때문에 얼핏 썰렁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른 아침, 해질녘, 그리고 황금물결 넘실대는 10월의 들판은 시구가 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분위기 있다.



왕릉은 포항-울산 방면 산업도로에서 보문단지 가는길 오른편에 위치해 있는데,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에서 진평왕릉 까지는 걸어서 30분 쯤이 걸린다. 들녘을 가로지르는 길이 아름답고, 푸른 잔디며, 가품있는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신라역사문화체험

'추억의 수학여행' '달빛신라역사기행'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신라문화원에서는 '선덕여왕의 흔적을 찾아서'라는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신라문화체험장(대릉원주차장옆)을 출발~첨성대~선덕여왕릉(사천왕사지)~수오재(점심)~진평왕릉~분황사~황룡사 9층목탑지~신라문화체험장의 코스로 이어진다. 총 13km의 코스 중 6km는 걸어서, 7km는 차를 타고 일정을 마친다. 20명 이상의 단체가 희망할 경우 전코스 도보, 또는 자전거 기행도 가능하다. 매월 1, 3주 일요일과 2, 4주 토요일 오전 9시30분 출발. 어른 2만5000원, 어린이 2만원(점심, 교통, 안내, 체험, 교재, 입장료 포함)

 

신라문화원(www.silla.or.kr)에서는 대릉원과 첨성대 사이 홍원심인당에 1000㎡규모의 체험장을 마련하고 경주만의 특성을 살린 다양한 문화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종이금관만들기, 탁본, 첨성대-신라의미소-와당 등을 초콜릿과 비누로 만들기, 한지공예, 연만들기, 연날리기, 다도, 국악공연 등 다양한 체험거리를 운영하고 있다. 종류에 따라 3000~5000원. (054)777-1950

 

▶신라토기

경주의 또 다른 명물은 토기이다. 토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점토로 빚어 굽는 그릇을 말한다. 1200도의 고온으로 소성하는 중 나무의 재가 그릇에 붙어 특유의 자연유가 형성되며 색채는 거무스름한 회청색을 띈다. 가야와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그릇으로 이후 유약의 발달로 자기, 옹기 등이 출현했다. 토기는 가벼운 데다 숨쉬는 그릇으로 과학성까지 지니고 있어 최근 들어 부쩍 조명을 받고 있다. 특히 경주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가장 신라답고 경주다운 흔적'으로 신라토기를 꼽는다. 때문에 신라토기를 재현하는 명장, 기능장 등의 전시장에는 외래관광객이 줄을 잇는다. 신라토기의 대표적 장인으로는 국내 최초로 신라토기명장에 오른 유효웅 명장(68ㆍ신라요 대표)과 기능전승자 류진용씨(57ㆍ한국토기 대표) 형제를 꼽을 수 있다. 이들 형제는 서로 힘을 합쳐 40년 동안 신라토기 재현에 열정을 받쳐 왔다.

 

우선 유효웅 명장은 드라마 '선덕여왕'의 소품으로 지금껏 1000여 점의 신라토기를 구워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대다수의 그릇이 유 명장의 손끝에서 빚어진 것들이다.

 

유 명장은 "신라 도공의 혼과 정열을 유추하며 전통 재현에 혼신을 쏟고 있다"며 "가볍고 기능성이 뛰어난 신라토기의 진가가 널리 알려져 생활토기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고 바램을 나타냈다.

 

형 유효웅씨가 선 굵은 작품세계를 펼친다면 동생 류진용씨는 섬세한 토기 재현에 몰두하고 있다. "전통을 닮도록 재현하려 노력한다"는 류진용씨는 아들 류국현씨(33ㆍ기능계승자)와 함께 실용적이고도 젊은 감각의 생활토기를 빚어내고 있다. 신라토기(경주시 하동 201-10. 경북 민속공예촌 소재. 054-746-1115), 한국토기(경북경주시 동방동 359-6, 054-748-0791)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