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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경상북도

경주 68번국지도 육통리 회화나무 흥덕왕릉 안강송

by 구석구석 2008.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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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마을에는 천연기념물 제318호로 지정된 회화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주로 향교나 사찰 등에 심었는데, 공해에 가장 강한 나무로 가로수나 공원수로도 이용되고 있다. 

 

 

 

나무의 수령은 약 400년으로 추정되며, 약 600년 전인 고려 공민왕 때 이 마을에 살던 김영동이란 젊은이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면서 19세에 이 나무를 심어놓고 부모님께 자식처럼 키워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 2008 OhmyNews 김환대

 

 

 

신라 왕릉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흥덕왕릉

흥덕왕릉은 이곳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에 있다. 육통리는 형산강을 따라 발달한 안강평야의 북서쪽에 있고 마을 뒤쪽으로 소나무 숲들이 보인다. 왕릉전문가인 이광국 선생이 흥덕왕릉 방향을 정확히 짚어낸다.

능 영역에 도착하니 주차장 옆으로 사당인 숭덕전이 있고, 소나무 숲 사이로 왕릉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숲에 들어서 보니 소나무들이 정말 잘 생겼다. 함께 간 류병륜 선생이 이곳 안강 지역의 소나무들이 특이해서 안강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을 해준다. 흥덕왕릉이 훌륭한 것은 우수한 수종의 안강송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능 관리인이 가지치기 등을 통해 소나무를 잘 가꾸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왕릉 앞으로 가면서 우리는 왕릉의 배치와 규모, 석물의 조화, 그리고 조각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한다. 특히 이광국 선생이 신라왕릉 중 이렇게 완벽하고 훌륭한 모습을 간직한 경우를 찾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먼저 능역 초입에 있는 석주(촛대석)와 무인석, 문인석을 본다. 8각형의 막대형으로 기단 위에 세워진 석주 높이가 이들 문,무인석과 크기가 비슷하다.

석주 뒤 좌우로 두기의 무인석이 서 있고 그 안으로 다시 두기의 문인석이 서 있다. 무인석은 서역인을 닮았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얼굴에 보이는 미소와 머리를 묶은 띠, 뒤쪽 머리를 묶은 다음 흘려내게 한 모양이 마치 화랑도(花郞徒) 같기도 하다. 그리고 문인석은 좀 더 인자한 모습으로 머리에 관을 썼다. 관복 안으로 두 손을 받쳐 들고 있으며, 발은 겉으로 드러냈다. 문인석의 조각은 너무나 정교하다. 꽃무늬와 선까지 보이도록 아주 섬세하게 처리했다.

 

봉분과 그것을 둘러싼 석물들

이제 우리는 잘 가꾸어진 잔디를 밟으며 봉분 앞으로 다가간다. 타원형의 봉분을 둘레석(호석)이 감싸고 있고, 그 바깥으로 난간석이 세워져 있다. 난간석 앞으로는 네모난 상석이 자리하고 있다. 봉분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가 좌우를 감싸고 있다. 신라 왕릉은 평지에 있는 경우가 많으며, 소나무 숲이 좌청룡 우백호 구실을 하고 있다.

 

봉분은 밑둘레가 65m, 지름이 22.2m, 높이가 6.4.m인 원형봉토분이다. 봉분의 둘레에는 호석을 세웠고, 사방에 12개의 지신상을 조각해 놓았다. 정면으로부터 왼쪽으로 돌아가며 새겨진 동물을 보면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순이다. 뒷면 한가운데에 쥐가 있고 이어 소, 호랑이, 토끼, 용, 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동물조각은 방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능을 지키는 호위무사 역할도 한다. 그래서 모든 동물들이 칼과 창 도끼 등 무기를 들고 있다. 이들 조각은 아주 정교하여 천 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동물 형상이 아주 분명하다. 햇볕이 잘 드는 정면의 조각들이 훨씬 더 선명해 보인다. 특히 칼을 든 양과 도끼를 든 토끼가 인상적이다.


12지신상이 새겨진 봉분 바깥으로 난간석을 둘렀는데 석주(돌기둥)만이 있고, 걸대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돌기둥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어 이곳에 걸대가 꽂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능의 사방에는 네 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능을 지키고 있다. 괘릉에는 네 마리 돌사자가 능 입구를 지키고 있는 데 비해, 이곳 흥덕왕릉은 봉분을 지키고 있다. 흥덕왕릉은 성덕왕릉, 괘릉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무덤제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능이다.

 

 

왕릉 한쪽에 있는 비석없는 귀부 / 이상기

 

왕릉 앞 왼쪽에 비석이 세워졌었는데 현재 비석은 사라지고 아래 받침돌인 귀부만 남아 있다. 머리 부분은 마모가 심해 조금은 두리뭉실해졌지만 몸통 부분의 갑주 조각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앞발과 뒷발의 조각도 분명해서 발가락까지 표현되어 있다.

 

흥덕왕의 아내 사랑이 앵무새 이야기까지 만들어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은 본명이 김수종(경휘)으로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고, 당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하였다. 그는 당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고 내치에 힘썼으나 자식이 없어 이후 왕위 다툼이 심화되는 빌미를 만들고 말았다.

 

 

돌사자가 능을 지키고 있다/이상기

 

흥덕왕은 대단한 애처가였던 모양이다. 즉위한 해 12월에 부인인 장화부인이 죽자 아내를 사모하는 마음에 슬퍼하면서 즐거움을 멀리했다고 한다. 신하들이 재혼을 청했으나 왕이 말하기를 “외짝새(隻鳥)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서랴. 어찌 차마 무정하게 곧 재취를 할까 보냐”하고 신하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시녀들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출처: <삼국사기>)


이와 관련된 일화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데 ‘흥덕대왕과 앵무새’ 이야기다. 짝 잃은 암컷을 그리다 죽은 앵무새 이야기로, 왕은 그 앵무새를 위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제42대 흥덕대왕은 보력 2년 병오(826년)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자 홀로 남은 수놈은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는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했더니 새는 그림 속의 그림자를 보고는 제 짝을 얻을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는 알 수 없다.”

 

 

애처가였던 흥덕왕은 장회왕비와 함께 이곳 경릉에 묻혔다/이상기

 

그래서인지 흥덕왕은 자신을 먼저 죽은 아내인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해주기를 유언했고, 안강 북쪽 비화괴(比火壞)에 묻혔다(출처: <삼국유사>). 그리고 “흥덕릉은 안강현 북쪽에 있으며 속칭 경릉(獍陵)이라 한다”고 <경주읍지>에 적혀 있다. 1977년 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가 이곳을 발굴했을 때 흥덕(興德)이라고 새긴 비 조각이 나와 흥덕왕릉임이 확인되었다.

자료 - ⓒ 2008 OhmyNews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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