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조사와 의상조사의 창건설화가 깃든 안적사의 전설에 의해, 겨울산은 적멸 그 자체이다.
산과 계곡과 안적사는 나를 위해 그곳에 있는 것처럼…. 저녁연기 모락모락 올라오는 내동마을에 닿은 발길은, 어디에서 만나지 못한 마음의 절 한 채를 만난다.
신비한 저녁 운무가 맴도는 앵림산, 그러나 내 마음의 귀는 아직 어두워 꾀꼬리 울음이 들리지 않는다. 평생 진리의 소리를 찾아 전국 산하를 누비며 호국의 횃불을 당긴 두 분의 고승의 원대한 염원처럼 저녁 산사의 종소리는 징하게도 크게 울린다. 저 종소리에 문득 가슴이 미어지는 까닭 또한 나는 알지 못한다. 억새들은 희끗희끗 바람에 풀씨를 부지런히 날리고, 산은 안적사를 품고 더욱 깊어만 간다.
안적사는 천년의 사찰이며 기장군의 대표사찰이다.
안적사는 신라 30대 문무왕 원년 불기 1205년(서기 661년) 에 원효조사와 의상조사, 두 분이 수도의 길을 찾아 명산을 순방하며 다니다가, 동해가 환히 바라보이는 장산기슭을 지나갈 때 숲속에서 난데없는 꾀꼬리 떼들이 모여 날아와 두 스님의 앞을 가로막으며 어깨와 팔에 안겼다고 한다.
두 분은 이곳이 보통 상시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원효조사가 가람을 세웠기에, 개산조(開山租)가 원효조사(元曉租師)이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에 대한 일화는 전국 곳곳의 사찰의 유래만큼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삼국유사'에 원효대사는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았고 거침이 없었다"고 쓰여 있지만, 모두에게 알려진 것처럼 원효대사에게는,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가 있었다. 그러나 의상대사에 대한, 고해를 건너 열반한 행적이 기이할 정도로 너무 깨끗하다.
△적멸계단/송유미
아무튼 두 스님은 요즘말을 빌리면, 선의의 라이벌 관계이었다. 똑같은 시각에 공부를 시작하여 누구든지 먼저 오도(悟道)를 하게 되면 만나자고 맹세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토굴을 지어 피나는 정진의 세월을 보낸 후, 성불에 먼저 입문하신 의상조사가 천녀(天女)가 나타나 천공을 매일 올리게 되었다.
△원통문/송유미
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원효조사'를 청하여 천공(天供)을 같이 하려는데, 천녀가 나타나질 않아 원효조사는 기다리다 그냥 처소로 돌아가신 뒤에 천녀가 천공을 가지고 나타났다. 의상조사는 이에 심히 천녀를 나무라니 천녀는, '이곳 가람 주위에 화광(火光)이 가득 차 들어 올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야 의상조사는 원효조사의 신통으로, 의상조사의 교만한 마음을 알고 금강삼매화(金剛三昧火)를 놓은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의상조사는 원효조사의 도력이 자기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고 교만하지 않고, 원효조사를 사형(師兄)으로 정중히 모시며 이곳에 수선실(修禪室)을 넓혀 큰 가람을 신축하여, 금강삼매론경등일심법계(金剛三昧論經等一心法界)의 진리를 후학에게 설파 지도하며, 신라 백성에게 화엄사상을 역설하시어 구국정신을 고취시켜 삼국통일에 근간을 이루었다.
△안적사 일주문/송유미
후대에 두 분의 일화와 함께 안락사터의 산명(山名)은 앵림산(鶯林山)이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정진수도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를 요달하여 적멸상(寂滅相)을 통관하였다 하여, 사명(寺名)을 안적사(安寂寺)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전국에서 수선납자(修禪衲子)들이 구름 모이듯, 남방수선제일 도량(南方修禪第一道場)으로 불법의 바다를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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